250914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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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14 NKRV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이런 고민을 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너무나 감사한데, 왜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을까? 왜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죄에 넘어지고, 똑같은 문제로 아파하고, 또 똑같이 후회하고 있을까?” 주일에는 은혜받고 결단하지만, 월요일만 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보며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고민이 깊어지면 우리는 복음에 대해 두 가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하나는 ‘내 노력과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더 뜨겁게 기도하고, 더 애를 써야 해!’ 라며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어차피 나는 연약한 인간이야. 하나님은 나의 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나의 모든 죄를 은혜로 덮어 주시잖아? 그러니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아.’ 이것은 복음의 은혜를 값싼 방종의 면죄부로 만들어 버리는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로마서 6장 1절은 바로 이 두 번째 오해에 대해 아주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질문은 오늘 설교의 핵심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이 놀라운 진리가, 우리가 계속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외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진리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죄와 싸우는 우리의 싸움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고, 신자라는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배경 설명] '노예'와 '세례'의 진짜 의미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편지를 처음 받았던 2000년 전 로마 성도들의 세상으로 잠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우리에게는 없는, 그러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두 가지 현실적인 감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노예 제도’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살아있는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신의 의지나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동쪽으로 가라면 가야 했고, 서쪽으로 가라면 가야 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삶의 방식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죄의 종(노예)’ 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로마 성도들은 그것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지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죄의 노예’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 죄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는 ‘세례’의 무게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세례는 감사하고 기쁜 예식이지만, 당시 로마에서 세례는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 부르던 세상에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반역 행위였습니다. 가족이 섬기던 우상과 신들을 버리고, 음란하고 타락한 로마의 문화를 등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핍박을 각오하는 **‘과거의 나에 대한 장례식’**이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옛사람의 죽음과 장사요,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의미하는 실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은혜의 개념 오늘날 우리에게 은혜는 조건 없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당시 로마 사회에는 후원자, 고객 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엇다. 힘 있고 부유한 후원자가 자신의 고객에게 돈과 음식, 법적 보호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면 그 은혜를 받은 고객은 평생에 걸쳐 후원자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감사로 보답해야 했다. 그러기에 그 은혜를 받고 후원자를 배신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로 여겨졌다. 따라서 로마 성도들에게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목숨 값을 치러준 새로운 후원자게 내 삶 전체로 충성을 바치겠다’라는 맹세로 들렸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천막을 만들면서 자비량 선교를 한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자비량 선교를 하는 것과 목회자가 이중직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본문 해석 1] 위대한 선언: 당신은 죽었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더 짓자”는 말에 왜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까?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거나 “죽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과거형으로, 완성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어난 법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선포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에게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을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칭찬하거나 욕을 하면 반응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와 죄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유혹하고, 옛날처럼 우리를 조종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 죄의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주인님, 들어오십시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이미 장례를 치른 빈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 여러분의 옛 주인인 ‘죄’에 대하여 사망 선고를 내렸고,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런데 왜 죽은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그에게 돌아가려 합니까? 그는 더 이상 여러분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이 없습니다!”

[성경적 예화] 출애굽: 자유인이 된 노예

이 놀라운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노예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들을 쫓아오던 바로의 모든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애굽의 권세, 그들을 지배하던 노예의 신분은 홍해 바다 깊은 곳에서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세례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죄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완전히 끝장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법적으로, 실제적으로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된 그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며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자유인이었지만,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전히 **‘노예 근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자유인이었지만,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노예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자유인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의 나라 '애굽'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습성인 '노예 근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나의 신분을 기억하고, 옛 주인의 유혹을 거부하며, 새로운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죄와 상관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를 옭아매던 죄의 사슬이 끊어졌다는 해방 선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특권, 그리고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나라에서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우리를 쫓아오던 죄의 권세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광야에서 불평하고 있습니까? 왜 옛 주인인 죄가 그리웠던 것처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다. 너의 신분을 기억하고, 이제 자유인답게 살아라!”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자유인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의 나라 '애굽'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습성인 '노예 근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나의 신분을 기억하고, 옛 주인의 유혹을 거부하며, 새로운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죄와 상관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를 옭아매던 죄의 사슬이 끊어졌다는 해방 선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특권, 그리고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 위에서 날마다 승리하시는 목사님과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적용] 새로운 삶의 방식: '여기는' 믿음으로 살라!

그렇다면 이제 자유인답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답게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11절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동사는 ‘여길지어다’ 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로기조마이(logizomai)’인데, ‘계산하다’, ‘셈하다’, ‘결론을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끼라는 말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게 믿음으로 선언하고 계산하라는 명령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통장에 돈이 한 푼도 없었는데, 어떤 부자가 제게 100억 원을 입금해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은행 명세서에는 분명 ‘잔액: 100억 원’이라고 찍혀있습니다. 이것은 법적인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습관이 있어서, 그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폐지를 줍고, 굶주리며 삽니다. 통장에는 100억이 있는데, 저는 여전히 가난뱅이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여긴다’는 것은, 내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은행 명세서에 찍힌 ‘사실’을 믿고, 이제 100억 부자답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세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습니까? “너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너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잔액,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옛 습관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붙들고 믿음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첫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십시오. 음란한 생각이 들 때, “나는 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 생각은 죽은 나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라고 선포하십시오. 미움과 분노가 차오를 때, “나는 이 감정의 노예가 아니다. 나는 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계산하십시오. 더 이상 죄와 힘겹게 씨름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돌아서십시오.
둘째,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죄를 피하는 소극적인 삶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적극적인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시간, 재능, 물질, 그 모든 것을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도구로 여기십시오. “하나님, 오늘 제게 주신 이 하루를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까요? 제 눈과 귀와 입술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까요?” 이 질문이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1절부터 11절까지를 통해 우리의 놀라운 신분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받았고,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후원자를 모신 자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며, 우리 구원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신분의 선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12절에서 “그러므로(Therefore)” 라는 강력한 한 단어로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의 신분이 변했다는 **사실(Fact)**이, 우리의 삶에서 **순종이라는 행동(Act)**으로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을 아는 것에서 그치면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몸의 각 부분, 즉 우리의 눈, 우리의 입술, 우리의 손과 발을 **‘무기(ὅπλα, hopla)’**에 비유합니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은 자신의 무기를 반드시 지휘관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전쟁터에는 두 명의 지휘관이 있습니다. 한 명은 우리의 옛 주인인 **‘죄’**이고, 다른 한 명은 우리의 새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 무기(너의 눈)를 나에게 다오.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것을 보는 데 사용하자.” “그 무기(너의 혀)를 나에게 다오. 비방하고 거짓말하는 데 사용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너의 그 거룩한 무기(너의 손)를 나에게 다오. 이웃을 돕고 섬기는 데 사용하자.” “너의 그 무기(너의 발)를 나에게 다오.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는 데 사용하자.”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전에는 죄에게 무기를 넘겨줄 수밖에 없는 노예였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무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유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해야 할 영적 결단입니다. “하나님, 오늘 나의 모든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싸움이 버겁게 느껴지십니까? ‘결국 또 내 의지로 싸워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지치십니까?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우리에게 이길 수밖에 없는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강한 의지나 결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강력한 은혜가, 우리를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키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힘 주시는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의 새로운 후원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싸우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신분 위에 굳게 서서 매일의 삶에서 순종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때, 죄는 결코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며, 여러분은 은혜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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