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 삶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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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 삶의 방향
민수기 22:1–3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서론]
[서론]
전도사님이 20살에 처음으로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일이었어요.
미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쁘고 설레였는지 몰라요.
그래서 캐리어에 짐을 싸면서도 신나서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짐을 쌌지요.
영어도 잘 못해서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걱정도 하며
설레임 반, 두려움 반
비행기를 타고 미국이란 나라로 떠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주 저렴한 비행기 표 , 그것도 학생표로 티켓팅을 해서 그런지
전도사님이 가려는 곳, 미시시피주 라는 도시까지 가기위해 2번을 경유해야 했어요.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려면 다른 게이트로 이동해야 하는데, 다음 비행기까지 8시간을 기다려야 했어요.
그래서 구경도 좀 할 겸, 혼자 용감하게 공항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그 다음 게이트까지 어떻게 가야할 지 방향을 잃어버렸어요.
그 때 눈 앞이 캄캄하고 등에는 식은 땀이 나고,
아~~~
미국이라는 곳에서 잘 지내려고 이것 저것 가지고 오고, 그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기대를 하고, 디즈니도 가고 여기 저기 가고 싶은 곳도 가려고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내가 방향을 잃어버려 그 길을 제대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친구들, 우리 는 언제나 우리의 삶에 이런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요. “나는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지?”
왜냐하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틀어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사는 걸, 어떤 사람은 돈이나 멋진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친구의 인정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어요.
오늘 성경 말씀 속에도 세 부류의 사람이 나와요
첫번째 사람은 모압 왕 발락 이라는 사람인데, 이 발락왕은 편안함만 쫓다가 두려움에 빠진 사람이에요.
두번 째는 주술사 발람 이에요. 이 사람은 돈과 욕심만 쫓다가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지요.
마지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들은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오늘 성경속 이 세 사람을 통해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번 배워 보도록 할께요.
[본론]
[본론]
1. 발락 – 편안함만 쫓다가 두려움에 갇힌 사람
1. 발락 – 편안함만 쫓다가 두려움에 갇힌 사람
첫번째 사람은 발락이라는 사람이에요.
이 발락 이라는 이름은 “약탈자, 파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헤서 가나안으로 오면서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당시에 모압 왕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계속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어요. 그러다 드디어 모압 땅 근처까지 오게 된 거지요.
그 때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모압의 왕 발락은 너무 무서웠어요.
발락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너무 크고 강해 보이니까 무서웠던 거에요.
편안하게 지내던 일상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위협적이고 무서운 대상,
그들의 삶에 위기를 가지고 온 세력이었지요.
그 때 발락은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요?
발락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사람을 찾았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편안한 삶만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주술가 발람이라는 사람을 불러요.
주술가란 지금의 무당같은 사람인데, 누군가에게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거나, 저주를 빌어주는 사람을 말하지요.
발람은 발락을 통해서 신적인 주술을 통해 이스라엘과 싸우는 선택을 하게 되어요..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위협을 막아내려고 했지요.
발락의 목적은 단 한가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지키는 것, 자신의 편안한 삶을 지켜내는 것이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발락이 추구한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방향은 편안함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편안함과 안락함만 바라보는 인생은
오히려 그 편안함과 안락함 때문에 늘 두려움에 갇혀 지낼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빠져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명기 2장 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은 이미 모압과 싸우지 말라고하셨어요.
그래서 모압은 이스라엘로 인해서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발락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 그 편안함 때문에, 그 안락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두려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발락은 이렇게 편안함을 쫓다가 두려움에 갇혀 버린 인생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2. 발람 – 욕심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
2. 발람 – 욕심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
두 번째 사람은 발람이에요.
발람은 발락이 데려온 주술사이지요.
이 발람이라는 이름은 “탐닉하는자, 멸망시키는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발람에게 발락이 선물과 돈을 가득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잘라고 부탁을 하는 거에요.
처음에 발람은 겉으로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해”라고 말하며 거절했지만,
더 큰 복채를 가지고와 부탁을 하는 것에 마음이 흔들려.
속으로는 돈과 명예 욕심이 가득차 버렸지. 그래서 계속 기다리면서 혹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실까 기대하게 되었지요..
결국 발람은 나귀를 타고 길을 가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막혔어. 발람은 못 봤지만, 나귀는 천사를 봤어. 그래서 길을 피했지. 그런데 발람은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어.
그때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서 말하게 하셨어!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 있어요?”
그제야 발람의 눈이 열려서, 칼을 든 천사를 보았어. 발람은 욕심 때문에 눈이 멀어서 정말 중요한 걸 보지 못했던 거야.
'발람'(Balaam)은 그 이름의 의미가 '탐닉하는 자', '멸망시키는 자'를 뜻하는데, 이러한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과 잘 부합된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탑욕에 눈이 어두워(벧후 2:1-22;계 2:14), 결국 발락의 제의를 받아들여 3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민 23:1-24:9). 이와갈이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하지 못하고 축복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발람의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 그 막후에서 일어난 이 발람의 사건에까지 하나님께서 적극 간섭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위의 온갖 사악한 세력들의 손으로 부터 건져 내었던 것이다.
3. 이스라엘 – 하나님 때문에 복 받은 백성
3. 이스라엘 – 하나님 때문에 복 받은 백성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은 이스라엘 백성이야.
그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발락과 발람이 자기를 저주하려는 걸 전혀 몰랐어.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지켜 주고 계셨어. 발람이 저주하지 못하게 막으시고, 이스라엘이 **“복 받은 자”**임을 분명하게 하셨지.
하나님은 말씀하셨어.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이니라.” (민 22:12)
이스라엘의 진짜 복은 돈도 아니고, 편안함도 아니었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지.
[결론]
[결론]
전도사님이 공항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서 비행기를 잘 타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사실, 길을 헤매다가 비행기 마지막 탑승시간까지 이제 30분만 남은 상황이 되었어.
눈물이 나기 시작했지, 미국에 못 갈 것 같고 사실 영어도 잘 못 했던 때라 더 무서웠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어. 도와주세요. 하나님~!! 기도를 하고 눈을 딱 떳는데 바로 앞에 한 글자가 보이는거야. 바로 INFO~!!
정말 신기했어. 막 돌아다닐 때는 보이지 않았던, 심지어 그 옆을 지나다녔는데도 보이지 않았던 그 글자가 보이는거야.
그래서 안내 부스에 가서 잘 못하는 영어로 그 다음 게이트로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막 쌸라쌀라 설명을 해 주는데, 긴장하고 불안하니까 영어가 안들려서 내가 그냥 데려다 달라고 했어.
못 알아듣겠다고 그냥 나좀 여기 데려다 달라고..
그래서 그 안내원이 잘 데려다 줘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세상의 편안함과 돈과 좋은 물질에 두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지.
그런데 오늘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편안함만 바라보면 오히려 두려움에 갇히고 돈과 욕심을 따라가면 눈이 멀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야.
우리를 지켜주시고 진짜 복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세요 .
그런데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어떻게 할까?
아까 전도사님이 안내원에게 그냥 데려다 달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이 내 손 잡고 함께 가자고 기도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항상 저와 함께 계셔 주시고 저를 이끌어주셔서 삶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우리 친구들 되길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말씀실천]
[말씀실천]
나는 요즘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혹시 편안함이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오늘도 나를 **“복 받은 자녀”**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자!
[기도]
[기도]
“하나님, 발락처럼 편안함만 쫓지 않게 해주시고, 발람처럼 욕심 때문에 눈멀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통해서 읽었던 것 같은데요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가 쓴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입니다.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거대한 얼굴 모양의 바위산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언젠가 이 바위와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니스트는 평생을 그 인물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지요.
그 동안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몇 몇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상당한 재력가였고, 어떤 이는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유명한 정치가였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요
어느 날 마을에 한 시인이 나타나 어니스트를 찾아오게 됩니다.
그 시인은 어니스트의 삶과 인격을 보고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과 닮았음을 보게 되고, 사람들에게 알리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어니스트 자신은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며
여전히 겸손하게 자리의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큰 바위 얼굴의 이야기입니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어니스트가 바라보고, 기대했던 큰 바위 얼굴은
우리 인생이 바라보고 기대해야 하는 아름다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하구요
어니스트가 마침내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삶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닮아가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바라보며 따라가야 할 삶의 아름다운 방향과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발락, 편안함을 쫓다가 두려움에 갇혀 버렸습니다
민수기 22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민수기 22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 이더라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을 떠나서 모압 평지에,
곧 요단강 건너편에 진을 쳤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민수기 20장의 말씀으로 가데스 바네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정탐꾼들의 부정적 보고에 마음이 무너져서
가나안 땅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애굽 땅을 다시 바라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한대로 광야에서 방랑하며 살게 하십니다.
40여년이 이르러 다시 돌아온 가데스 바네아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모습은 여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며 하나님과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민수기 21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평지까지, 요단 동편 땅까지
인도해 가시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민수기 21장 1절 위의 단락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호르마를 점령하다!”
그리고 민수기 21장 10절의 단락제목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으로 떠나다”로 되어있고
그리고 민수기 21장 21절의 단락제목은 “요단 동편을 점령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와 요단 동편을 점령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민수기 21장 21절부터 마지막 35절의 요단 동편을 점령하는 이야기는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도록 도우셔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모압 평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행진 끝에 도달한 땅이 여리고 맞은 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해서 좋겠지만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민족들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첫 번째 인물이 나옵니다.
모압 왕 발락입니다.
민수기 22장 2~3절입니다.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의 행진을 보면서 두려워 했다고
심히 번민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발락의 입장에서, 모압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지내던 일상이 갑자기 등장한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기에 이스라엘은 위협적인 대상이었고
그들의 삶에 위기를 가져온 세력이었습니다.
삶의 위기 앞에서, 삶을 흔드는 위협 앞에서
모압 왕 발락은 뭐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발락의 선택을 볼까요?
민수기 22장 5~6절입니다.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사람을 부릅니다.
발락은 일종의 주술가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거나, 저주를 빌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발람은 발락을 통해서 신적인 주술을 통해 이스라엘과 싸우는 선택을 합니다.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위협을 막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발락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지키는 것, 자신의 편안한 삶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자신의 통제권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위협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대화와 타협의 여지 없이 혐오하고 배제해서 적으로 만들고 제거하려 합니다.
자기 보다 큰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힘도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발락에게는 오로지 자기의 편안함, 자기 자신, 그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발락의 선택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발락이 추구한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방향은 무엇입니까?
편안함입니다.
안락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락은 편안함이, 안락함이 우리의 최고의 가치와 방향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편안함이, 안락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생은
역설적으로 그 편안함과 안락함 때문에 늘 두려움에 갇혀 지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빠져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명기 2장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은 모압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로 인해서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락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 그 편안함 때문에, 그 안락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두려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발락은 이렇게 편안함을 쫓다가 두려움에 갇혀 버린 인생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 발람, 풍요로움을 쫓다가 욕망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인물은 발람입니다.
이름이 비슷하죠?
발락은 모압 왕이고,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데려온 주술가입니다.
발람을 통해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발람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압 왕 발락이 주술가 발락을 데려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2장 7절입니다.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발락은 발람을 부르기 위해서 복채를 사용합니다.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금액의 재물이었을 것입니다.
발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동원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했고
특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민수기 22장 8절입니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녀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발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과연 발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발람이 찾았다 해도, 만나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방인 주술가 발람을 하나님이 만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발람을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십니다.
민수기 22장 12절입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발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하지만 발락의 요구는 멈추지 않습니다.
민수기 22장 15~17절입니다.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락은 이번에는 더 높은 관리들을 발람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제안보다 훨씬 더 좋은 제안을 합니다.
당신을 크게 존귀하게 해주겠다!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
쉽게 말하면 백지 수표를 준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거절해야 마땅합니다.
발락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민수기 22장 18~19절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의 대답은 그럴듯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냐고,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발락이 보낸 관리들을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여기서 유숙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지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람의 속내를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척 하지만
그 속에는 발람의 제안에 대해서 짙은 아쉬움이 남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락의 백지수표에 대한 미련이 가득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려 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락이 추구한 인생 최고의 가치와 방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욕망입니다.
세상 재화에 대한 욕망, 탐욕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삶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람은 재물에 대한 욕망도, 탐욕도
우리의 최고의 가치와 방향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 욕망이, 그 탐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발람이 보여주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보여줍니다.
발람이 보낸 관리들을 따라간 발락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칼을 드십니다.
민수기 22장 21~22절입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재차 하나님의 의견을 물으러 온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노의 칼을 들고 나타나신다니 왜 그러시나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그의 탐욕을 인정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의 탐욕은 책망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이것을 발람은 못 보고.
그 대신 발람이 타고왔던 나귀만 봤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2장 23절입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아선 것을 봅니다.
그래서 돌이키려고 했지만
발람은 아무것도 못 보고 이런 나귀를 채찍질 합니다.
그리고 이 실랑이가 3번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발람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쫓아, 탐욕을 쫓아 살아가는 발람이
이 순간 그 욕망 때문에 눈을 떴지만 눈이 멀어버린 인생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은 눈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볼 수 없는
정말로 중요한 영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버린 인생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발람의 상태를
짐승만도 못한 상태임도 이야기합니다.
탐욕을 쫓아 살아가는 인생,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인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인생은 욕망에 눈에 멀어버려서
인생의 정말 중요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어떤 경우는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이렇게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쫓다가
눈이 멀어버린 인생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3. 이스라엘,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대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민수기 22장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쫓아,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민수기 22장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 평지, 요단 건너편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바라보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풍요로움을 쫓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쫓아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가나안은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 혹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사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 맺는 그 관계에 걸맞는 품위와 품격과 명예를 가지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밥을 먹어줍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도대체 뭐가 되는 것입니까?
민수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시는
너무나 감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12절입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발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고!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오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가장 큰 복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 모압 왕 발락이, 주술사 발람이
그들을 향해서 어떤 일을 모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없는 그 곳에서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에서부터 그들을 지켜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만한 목적이 되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편안함을 넘어, 풍요로움을 넘어
하나님의 목적이 되는 인생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인생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살아가는 복을 누리는 인생입니다.
물론 훈련은 받을 것입니다.
연단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합니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쫓아서 살라고
풍요로움을 쫓아서 살라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행복이고, 의미이고,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편안함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풍요로움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그래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 맺는 그 관계에 걸맞는 품위와 품격과 명예를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되어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내용이고, 의미이며,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평안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풍요롭지 못한 현실 속에서도
세상에 낙심하지 않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평안함과 풍요로움이 허락될 때는
그것에 취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누리고 흘려보내는 아름다운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 인생을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으로 지키시고 돌보시며,
하나님의 나라까지 직접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삶이 우리 가운데 가득차고 넘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