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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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마태복음 27:45–46 NKRV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던 시간은 금요일 오전 9시부터 같은 날 오후 3시까지였다.
언제인지 분명하게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제6시는 6시에다가 6을 더하면은 12시가 되고 제9시는 15시니까 오후 3시가 되는 거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는 임종하시는 오후 3시에 임박해서 가상칠언 중 네 마디 말씀을 거의 한 번에 쏟아 놓으셨다.
그 말씀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나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네 번째 말씀을 통하여 멸망당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II.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 3시간이 지나는 정오쯤에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어두움이었다. 해가 빛을 잃어 온 천지가 암흑처럼 변하는 이상 현상이었다.

A. 어두움이 임한 때.

첫째로 그때는 온 땅의 어두움이 임하여 천지가 캄캄하게 된 때였다.
어둠의 원인을 일식이라고 하는 견해에 대해 역사적 해석을 통한 반박
이 어두움의 원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일식이나 매우 두터운 먹구름이 해를 덮은 자연적 현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천문학적으로 북아프리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관측될 수 있는 일식 현상은 주후 34년 3월 19일에 있었는데, 이것은 십자가 사건 때의 어두움의 원인일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유대인의 월력으로 니산월 14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 학설이 있다.
AD 30년 설과 AD 33년 설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연대를 선택하든지 니산월 14일은 보름달이 뜨는 시기다.
그런데 개기 일식은 초승달이 뜨는 시기에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이 일식 현상이었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개기 일식은 아무리 길어도 몇 분, 최대한으로 잡아야 약 7분 30초 정도만 계속된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두움이 3시간 이상 지속되었다는 십자가 사건의 하늘의 어두움이 일식 현상일 수는 없다.
어둠에 대한 하나님의 슬픈 감정을 의미적으로 문법적 해석
오히려 교회사 속에 등장했던 많은 주석가들은 이 현상을 의미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광경이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성부 하나님조차도 눈을 가리고 싶어 하신 것으로 보았다.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팠기에 그 거룩한 슬픔의 감정을 어두움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어둠에 대한 성경신학(하나님의 심판과 임재)적 의미
성경에서 칠흑 같은 어두움은 크게 두 가지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나 심판을 지시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을 앞두고 경험했던 아홉 번째 재앙을 떠올리게 한다(출 10:21-23).
이는 궁극적인 심판, 곧 애굽 땅의 모든 처음난 것들이 남김없이 죽는 심판의 전조로서 주어졌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지시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거기에는 빽빽한 구름과 흑암, 태풍과 불, 그리고 나팔 소리가 동반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었지만 그분의 임재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과 깊은 어두움에 가려져 있었다(출애굽기 19장 16- 18절).
어둠은 초자연적 기적의 역사
예수의 네 번째 말씀은 구속사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순간에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팔레스타인 작은 땅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이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의 운명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로마서 8장 22절).
온 땅의 어두움으로 인한 이 사건은 일반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
어둠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역사신학적 해석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순교자 유스티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나 어거스틴도 의견이 일치하였다.
이 뛰어난 교부들은 이 어두움의 원인이 일식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가진 초자연적 기적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네 복음서의 조화(네 콘센스, 에반게리스타 등) 제 1205번째 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 비상하고 놀라운 어두움의 원인은 신적인 능력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으니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도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께서 죽으실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해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실 때에도 지진이 발생했고 바위들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일식이나 짙은 구름과 같은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 현상이었다.
또한 그 어두움이 임한 범위도 골고다 언덕 주변에서만이 아니라 온 땅 곧 온 세상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안디옥 출신의 전설적인 그리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349-407)의 해석과 같이 " 이 어두움은 온 우주가 창조주이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깊은 애통과 슬픔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크리소스톰 마태복음 설교 제 779번째 열,
“동시에 이 어두움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외아들이 죽으시는 현장에 임한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보여준다. 화목 제물로 죽으시며 아들 예수의 죽음을 받으시기 위해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찬란하고 강력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캄캄한 어두움이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어두움은 온 세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계와 우주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B. 버리셨나이까

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문법적 해석_발음(히브리어+아람어)
당시 예수께서 사용하시던 일상 언어는 아람어와 갈릴리 지역의 히브리어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더해 예수께서는 경전을 읽으시기 위해 성경 히브리어를 알고 계셨을 것이고, 또한 랍비들이 학술 및 구전 토론에 사용하던 미쉬나 히브리어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누가복음 2장 46절 참고).
당시 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향으로 사실상 로마 제국에서도 만국 공용어가 된 코이네 그리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네 번째로 남기신 말씀은 그리스어 성경에 음역된 대로 읽으면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이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합성된 문장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단수 명사 “엘”에 1인칭 소유격 단수형 “이”가 붙은 완전한 히브리어 “엘리”의 반복이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에 “라마”라고 표기된 부사는 원래 아람어 발음으로 “레마”이다.
이는 “어찌하여”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이다.
“사박다니”는 “버리다. 떠나다. 남겨두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동사 원형 “쉐바끄”에 동사 남성 2인칭 단수 “타”와 목적격 1인칭 단수 “니”가 합쳐진 말로서 아람어 단어의 정확한 발음은 “쉐바끄타니”이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문법적 해석_사박타니 발음을 통해 히브리어+아람어 합성어 증명
신약 그리스어 성경의 발음이 아람어 본문에 기록된 “쉐바끄타니”와는 다르게 “사바끄다니”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로는 당시 복음서 기록자가 십자가에서 들려온 예수의 발음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마도 “쉐바끄타니”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들릴 때에 “사바끄다니”로 들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러한 발음의 차이가 지역 방언의 상이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인 것으로서 그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구약의 인용
그런데 이 구절은 예수께서 지어내신 말씀이 아니라 구약 시편 22편 1절 상반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으시고, 그 구절을 본 떠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섞어서 인용하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하면 “내 하나님이시여, 내 하나님이시여 어찌 나를 떠나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아자부타니”(시편 22편 1절 상).
탈굼 성경으로 본 시편 22편
그런데 히브리어 시편의 아람어 번역이 있다.
이는 당시 히브리어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당시 중근동 지방의 국제 공영어, (링구와 프랑카) 이를 아람어로 번역한 것이다.
예수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람어로 서로 소통하였으며, 당시 성경 히브리어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격조 높은 언어였다.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과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들만이 성경 히브리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아람어 번역을 시도하였다.
아람어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정확히 번역하기보다는 히브리어 원문에 약간의 해석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아람어 성경을 “탈굼”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번역 해석 설명”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에 의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모세 오경 이것을 “토라”라고 부르고, 선지서를 “느비임”이라고 부르고, 성문서를 “케투빔”이라고 부른다.
모세 오경의 아람어 번역은 온켈로스 탈굼, 선지서 번역은 요나단 탈굼, 그리고 성문서 번역은 케투빔 탈굼이라고 부른다.
탈굼의 세 번째 범주인 케투빔 탈굼 중 일부인 시편 탈굼은 탈굼 테힐림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수의 가상 제 사언은 여기서 인용하신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만 예수께서 이것을 인용하실 때 탈굼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경의 마소라 사본의 본문을 섞어서 인용하셨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이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신학적 해석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첫째로는 그분의 육신으로 느끼는 큰 고통과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감정에 대해 말해준다.
둘째로는 십자가 아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이 말씀을 듣기 원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토록 큰 소리로 외치셨던 것이다.
당신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대속의 의미를 깨닫기 원하셨기 때문에 큰 소리로 외치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셔야 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예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반기감은 결코 그분 자신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하신 인류의 모든 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께로 전가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는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역사신학(칼케톤 신경)적 해석
예수는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신 분이셨다.
곧 하나의 신적 인격에 두 개의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주후 451년에 채택된 칼케톤 신경은 이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칼케톤 신경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공존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게 존재하였다. "... in duabus naturis 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erabiliter...”
따라서 지금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의 경험이다.
네 번째 말씀에 대한 역사신학(토마스 아퀴나스)적 해석
이에 대해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약 1225- 1274) (이런 천재가 오래 살아야 되는데 글쎄 50세밖에 못 살았어요.)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 대전」제3부 46문 9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 버림받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연합의 은혜나 신적인 능력이 분리됨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철회된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분의 인성의 더 큰 고통에 속하여 그분이 우리의 슬픔을 더욱 완벽하게 당신 자신에게도 전가하실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성에 관한 한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친밀함으로부터의 분리를 당신의 온 몸으로 겪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인성으로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과의 연합을 기초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대속해 주셨다.
신학적 용어 “내포적 대신”에 대한 해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것을 신학에서는 "내포적 대신”(inclusive substitution)이라고 한다.
이는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으신 채 그들의 죄를 당신 자신에게로 전가시키시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 예수께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몸소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품에 있는 구원받을 인류는 예수의 “내포적 대신”의 고난을 통해 자신들의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의 값을 치른 것으로 여김 받게 되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울부짖으며 외치신 이 말씀은 예수 안에 있는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죄 때문에 처절하게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고난 곧 그리스도의 대리적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잃어버리신 위로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게 되었고, 그분이 버리신 생명 때문에 우리가 사망을 보지 않게 되었고, 그분이 받으신 형벌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되었다.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기에 우리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사랑하시나이까?” 라고 감격할 수 있게 되었다.
적용_자기 깨어짐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결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지적과 같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라고는 죄밖에 없었는데,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드려서 우리를 하나님께 저주받는 자리에서 사랑받는 자리로 옮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신앙을 타락하는 첫 걸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을 발판으로 예수 사랑은 세상 사랑으로 향하고, 은혜에 대한 갈망은 죄에 대한 유혹으로 바뀌게 된다.
아! 우리가 받은 구원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의 은혜가 감사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때가 언제였는가?
적용_감격을 회복하자.
기나 긴 역사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 교회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신앙의 두 기둥이 있다.
하나는 십자가 신앙이고, 또 하나는 재림 신앙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에 감격하는 신앙과 그리스도께서 곧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며 충절을 지키는 재림 신앙이었다.
이제 눈물이 없는 기도, 감격이 없는 예배, 은혜가 없는 설교, 기쁨이 없는 교제는 사라지게 하자.
매일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선물처럼 여기며 구원의 은혜의 거룩한 희열을 느끼며 살자.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에 자신을 바치며 살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그날까지 예수의 생애는 땀과 눈물과 피로의 생애였다.
주님의 생애는 토혈을 일생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피를 토하듯 진리를 선포하시고 섬기시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생애였다.
그러므로 항상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가자.
적용_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의 영적 생활은 고요히 온 마음을 다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시작된다.
그러한 영적 생활의 진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risto) 연합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고, 나아가 하나님과 교회 사이의 관계의 공식이다.
이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다.
원리적인 연합은 구원받음으로 이루어진 연합이고 이는 불변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가 성화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는데, 이 연합의 정도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렇듯 성화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빌립보서 1장 9절).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의 영혼 또한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함이 없이 우리는 신령한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욱 소중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이 세상의 무가치한 것들에 대한 욕망에 쉽게 내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 본성이 위의 것을 바라보기를 힘쓰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소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에 두기를 힘쓰자.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느낄 때마다 이것이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행복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고통을 받으시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죽음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얻은 바 되게 하시려고 그분은 버림을 받으셨으며,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하시려고 그분은 징벌을 받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게 하시려고 그분은 징계를 당하셨다.
적용_구약의 인용
이러한 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다.
"그가 찔리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장 5절).
단 한순간도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거저된 것이라고 여기지 말자.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그 구원이 거저된 것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지불한 아무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신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을 지불하게 하셨으니, 이는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마귀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소장이 되셨기에, 누구든지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잊지 말자.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범죄함으로 파괴하였던 것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한 시도 잊지 말자.
적용_역사신학(존 오웬)적 인용
17세기 복음주의의 신탁으로 불리던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1616-1683)은 자신의 책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과 담화”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경건이든지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 있고 능력 있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끊임없이 부지런히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수단입니다. (What is it that makes any grace, as to its exercise, lively and vigorous, but a view of the glory of God in Christ? And constant, diligent views of the glory of Christ are the most excellent means of our being transformed into the image of God.)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하자.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토악질나는 부패하고 악한 일들이 일상화되고 있는 이 도시를 보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모든 타락한 삶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끔찍한 타락이나 범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우리 마음에서 생각이라는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묵상하기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찬 마음이다(요한일서 2장 15-16절).
적용_역사신학(존 뉴턴)적 인용
한때 잔인한 노예 상인이었다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여 유명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영국 성공회 목사 존 뉴턴(1725-1807)이었다.
그는 노년의 치매로 기억력이 매우 나빠져 심지어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자신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말했다.
이를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리차드 세실은 자신의 책 “존 뉴턴 목사에 대한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서 뉴튼 자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나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러나 두 가지 사실만은 기억한다.
내가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말이다.”
(My memory is almost gone, but I remember two things: I am a great sinner, and Christ is a great Savior.)
그러므로 한순간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묵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지 말자.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잠기게 하자.
그리하여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온 마음에 가득히 느껴져서 예수의 고난 때문에 울고, 예수의 영광 때문에 환희하는 삶을 살아가자.

C.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죽어가시면서 하늘에 계신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의 인성(고통)과 신성(친밀함)에 대한 고찰
그분의 인성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겪고 계셨으나, 예수께 여호와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 앞에 1인칭 소유격을 붙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그것은 언제나 화자와 하나님 사이의 말할 수 없이 친밀한 교제와 시간적으로 오래된 사귐을 가리킨다(출애굽기 15장 2절, 시편 5편 2절, 18편 28절, 22편 10절).
예수께서 비록 인성으로는 지옥의 불속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함께 버림받음을 겪고 계셨다.
그러나 신성으로는 말할 수 없는 친밀함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고 계셨다.
까리따스와 아모르 수이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히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무게도 없는 것과 같이 되어서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때는 우리가 지순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이다.
그리고 영원히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중력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 사랑, Amor sui”의 무게다.
우리가 이 영혼의 중력으로 작용하는 이 무게를 덜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진토에 떨어진 것과 같은 처지가 된다.
이러한 경험에 대해 시인은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시편 44편 25절).
이러한 상태에서 영혼은 죽은 자처럼 되기에 시인은 이러한 영혼을 살아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편 119편 25절).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런 사랑이 남아 있는 한, 그 영혼의 중력 때문에 아무리 찬송과 기도로 날갯짓을 해도 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지 못한다.
아모르 수이를 이기는 방법_십자가 묵상
그러나 그런 영혼의 무게를 단번에 덜어 내버리는 길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세상의 덧없는 욕심을 거기에 못 박는 것이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리라”
조용히 눈을 감고 삼라만상에 대한 분주한 인상을 잠시 지워버리자.
그리고 2천년 전 십자가가 있는 갈보리 언덕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자.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를 묵상하자.
가시 면류관을 쓰셔서 찢기신 그분의 얼굴을 생각하자.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벗으신 을 기억하자.
그 형벌은 마땅히 우리가 전적으로 당했어야 할 형벌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분이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생겨난 "우리의 죄, 우리의 큰 죄"(Mea Culpa, Maxima Culpa).
이게 전통적으로 이제 회개할 때 쓰던 표현이에요.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입니다.” 잊지 말자.
십자가 묵상을 통한 현장성 경험
이렇게 십자가를 묵상하면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죽음의 현장에 내가 서 있게 된다.
마치 입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십자가 고난의 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로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보게 되고, 그분의 가쁜 숨소리를 느끼게 된다.
거기서 죄인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심장에 참여하게 되고, 그분의 허리를 찌른 창 끝에 심장이 터져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묵상은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가치 없는 세상 정욕과 우리 마음에 단단히 달라붙은 세속의 집착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준다.
아모르 수이를 이기는 방법_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
그리하고 나면 이제는 우리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차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난을 모두 감당하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셔서 세상 만물과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
그 사실을 묵상해 보라.
천군과 천사들에게 에워 싸이신 채 경배를 받으시는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우리를 친히 지켜보시고, 천사와 또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우리를 응원하신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에 달려갈 길을 다 가기 위하여 분투하는 우리들을 위해 왕 되신 예수께서 하늘에서, 아니 지금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도우신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묵상의 유익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묵상은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위로와 용기를 준다.
가치 없는 세상 정욕과 우리의 마음에 단단히 달라붙은 세속의 집착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준다.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 만물을 통치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바라보라.
우리의 고난은 잠시 잠깐이며, 영광과 상급은 영원하다는 사실에 거룩한 싸움을 싸워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부르자.
그렇게 상하고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첫사랑으로 감격하던 때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당신을 애타게 찾는데 십자가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데, 어찌 그런 당신의 자녀들을 메마른 영혼으로 버려 두시겠는가.

III.적용과 결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예수께서는 극단적으로 고통을 받으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저주의 형벌을 받으시는 순간에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마음에는 과연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는가?
한때는 그랬지만 그러나 죄악이 우리를 삼키고 영혼은 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신령한 기쁨과 거룩한 감동을 잃어버리고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지 않았는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
예수 없이 온 세상을 소유하는 것이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예수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제 돌이켜 십자가로 돌아가자.
뒤늦게 깨닫고 골고다 언덕으로 돌아온 제자 요한도 받아주시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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