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_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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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의 노래
어느 사형수의 노래
마음의 노래가 있는 예배입니까?
마음의 노래가 있는 예배입니까?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어느 해 서울에 있는 교도소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교도소 간부는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제소자는 많은데 예배 시간과 장소는 한정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말했습니다. 여기 예배에 모인 제소자들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예배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예배실을 나올 때였습니다. 누군가 교도소 안에서 제작된 소식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간증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온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던 살인범이었습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형 집행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집사님의 끈질긴 전도를 받고 회심하였습니다. 그 자신을 전도한 집사님께 보낸 간증 형식의 편지 사본이 그 소식지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집사님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제 눈에 무엇이 씌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제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는 자신의 장기를 모두 환자들을 위해 기증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마음에는 찬송이 있습니다. 지난 날이 후회스럽지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오늘 힘든 일이 있지만 감사합니다. 그래서 찬양합니다.
한 사람이 흥얼거리는 노래는 그의 정서를 말해줍니다. 그는 그런 정서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찬송은 설교를 기다리기 위한 준비 순서가 아닙니다. 또한 설교가 끝난 후 마무리로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이 다 걷히기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도 아닙니다.
마음을 담지 않고 중얼거리는 말을 기도라고 할 수 없듯이, 교회 안에서 부르는 노랫가락이라고 모두 찬송일 수 없습니다. 찬송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사람들이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예배 찬송이 되려면 함께 불러야 합니다. 온 교인이 함께 찬송하고 그것을 통해 경배받으시는 하나님의 연납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표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찬송이 됩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노래
은혜 받은 성도의 노래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난관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홍해였습니다. 홍해 바다가 가는 길을 막고 있었고, 뒤로는 애굽왕 바로가 보낸 600대의 병거가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출14:6-7). 앞에는 넘실대는 파도, 뒤에는 추격하는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바다 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드디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벽처럼 서 있는 물 사이로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출 14:21-22).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셨습니다(출 14:26). 다시 합쳐진 물은 애굽의 모든 병거와 마병들을 덮었습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 14:28).
늘 의심이 많고 잘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달랐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바닷물이 좌우로 밀리고 갯벌이 드러난 썰물 현상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2).
그들은 바닷속에서 물고기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수족관을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을까요?
모든 원수들은 수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건너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출 15:1).
그 유명한 구원의 대서사시가 바로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찬송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찬송할 이유가 있을 때에 찬송다운 찬송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찬송다운 찬송이 되려면
찬송다운 찬송이 되려면
청소년 집회의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은 찬양에 상당히 마음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한 트럭은 족히 될 듯한 음향 장비와 악기가 동원되었습니다.
1시간 가까이 뜨겁게 찬송을 하고 나서 잠시 몇 가지 광고가 있었습니다. 다시 찬송이 계속되었습니다. 인도자가 다시 찬송을 하자고 할 때 제 옆에 있던 학생들이 투덜거렸습니다. “에이 씨, 우린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찬송을 하래...”
찬송다운 찬송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대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백성 전체가 거대한 성가대가 되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있을 때 찬송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였고 그 감격은 찬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찬송을 통해 무엇을 해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홍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보호하시는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구원 경험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찬송입니다.
흔히 찬송을 통해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합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합니다. 많은 악기를 동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심지어 감동을 주려는 심리적인 기법도 동원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순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품을 회상합니다. 또 그 성품에서 비롯된 구원과 은혜에 대해 감격합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만나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으로 교인들의 정서를 겨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깨달음 없이 직접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예배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먼저 마음을 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영적 제사입니다.
찬송은 내용이 있는 가락입니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노래하기 좋아하는 본성이, 인간은 노래하기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찬송을 부름으로 신앙의 유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신자의 본성과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부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만약 찬송이라는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건조하겠습니까? 예배 속에 찬송이 없다면 분위기가 얼마나 우울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예배를 보십시오. 점점 더 많은 악기가 동원되고 성가대의 규모는 커졌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들어서고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음향 기기와 조명 기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배자의 마음속에 울려퍼지는 영혼의 찬송이 없다면 모두 쓸모없습니다.
가장 좋은 찬송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배 찬송의 중심은 회중찬송입니다. 전문적인 음악 전공자들의 연주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을 들음으로 은혜 받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온 교인이 함께 부르는 찬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찬송을 부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속옷 소리에 맞춰 모든 사람이 함께 찬송하였습니다. 홍해 건너편에 구름같이 모인 백성들이 모두 함께 소리 높여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형식과 자유의 조화
형식과 자유의 조화
찬송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형식과 자유의 조화입니다. 예배에는 일정한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한 부름, 참회와 고백,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순서도 있어야 합니다. 찬송과 헌금 축도의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중에 어떤 순서들은 형편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형식은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예배 형식입니다. 이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자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배에서 자유가 아무리 강조되어도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배를 몇 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형식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에는 분명히 일정한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과 전통,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용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이 너무 긴 것도, 너무 짧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배 속에서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아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찬송 순서에도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할 때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우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예배 중 찬송 시간이 다소 길어질 수도 있고 설교가 빨리 끝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자들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서의 참된 자유는 찬송에서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임하신 은혜 때문에 그런 파격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없이 하나님을 찬송해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 없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감격이 사라지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찬송을 드리고 설교를 듣고 주일 예배를 마치니 하늘의 별이 총총하더라는 간증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가도 유행가도 모두 노래이지만, 찬송 부르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출애굽기 15장 1절
요즘은 소위 CCM이라고 해서 멜로디만 가지고는 세상의 노래인지 교회 음악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노래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헤비메탈 음악에 복음적인 가사를 실어서 연주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시편만을 가사로 삼은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칼빈 시대에 사용한 제네바 찬송가만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극단적인 현상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갈피를 잡아야 할까요?
저는 현대 음악을 따라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해 좀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 시대의 가락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송을 부르는 마음과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세속의 음악을 즐기는 것과 같이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가락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찬송의 곡조는 최대한 가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멜로디여야 합니다. 그러한 찬송이 예배자로 하여금 은혜를 갈망하며 찬양하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가운데 찬송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숙제가 남습니다. 무엇일까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예배자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 온몸을 감싸는 것 같은 포근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경험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대규모 성가대와 악기, 음향 장비가 신령한 은혜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시길 이끌어 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기대와 믿음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예배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때 멜로디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같은 찬송을 반복해서 마음을 다해 부르는 것이 유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배자가 찬송에 가사를 암송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시선을 다른 데 빼앗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묵상하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송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외우고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눈을 감고도 찬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연주자들은 악보 없이 연주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가사를 묵상하며 찬송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온전한 헌신에 정서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암송하는 것도 좋지만 찬송과 가사를 암송하는 것도 매우 유익합니다.
오래도록 늘 불러서 마음에 있고 그 가사가 마음을 적시는 찬송은 거룩한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정서를 통해 마음이 열려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기도와 마찬가지로 현재적인 은혜를 경험할 때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예배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와 찬송의 은혜를 간직하며 살다가 온 사람들은 이미 예배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별도의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할 때 마음 깊은 샘에서 기도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함께 찬양합시다라고 할 때 영혼의 울림과 함께 찬양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배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들 때까지는 마음의 각질을 걷어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배가 한없이 길어져서도 안 되지만, 시간에 쫓겨서도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릴 적 장터에 가면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대장간입니다. 살같이 검게 탄 근육질의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풍구를 돌립니다. 강력한 바람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서 역청탄이 소리를 내며 시뻘겋게 타오릅니다. 그 불 속에 철판을 자른 조각들을 넣습니다.
화로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집게로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습니다. 크지 않은 망치를 가지고 아주 빠르게 두들깁니다. 불과 몇 초 만에 원하는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몇 차례 더 화로와 모루 사이를 오가면서 두드립니다. 예리하게 날이 섭니다. 이런 식으로 낮이나 칼, 호미 같은 것을 만듭니다. 쇳덩어리가 불에 달궈지지 않고는 그런 기구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은혜의 정서로 따뜻해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어 보십시오. 고함치는 설교가 아니라 속삭이는 설교로도 커다란 회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올해와 같은 설교를 통해서만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을 열리게 합니다. 세속적 정서를 버리게 하고 마음을 은혜의 정서와 일치시킵니다. 하나님을 높이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 다듬어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찬송의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찬송함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찬송함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이 질문은 주님이 찬송 받으시는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창조하심과 선택하심, 구원하심과 은혜 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찬송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창조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 중요한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해와 달아 그를 찬송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에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심으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편 148편 3-5절)
온 천하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만물 중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약화된 것이 창조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험, 거룩한 영광과 능력을 알 때 우리는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피조물일 뿐임을 깨달을 때 찬송하게 됩니다.
고백적인 찬송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합니다. 찬송할 때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주목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찬송은 인간의 참된 위치를 생각나게 합니다. 겸손해지게 합니다.
이런 찬송이 예배 앞부분에 위치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인간 사회에 함께 섞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주님으로 찬송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저 높고 푸른 하늘과 수많은 빛난 별들을
지으신 이는 창조주. 그 솜씨 크고 크셔라.
날마다 뜨는 저 태양 하나님 크신 권능을
만 백성 모두 보라고 만방에 두루 비치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이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고백이 찬송에 담겨야 합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니 살아있는 동안 그분을 찬송함이 본분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땅만 바라보며 살던 인간들이 예배를 통해 하늘을 보게 되어야 합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으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물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존재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찬송의 이유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에 있음은 창조주께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 땅의 것들은 작아 보이고 하늘의 것들이 커 보이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찬송함.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찬송함.
둘째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편 135편 3-4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기에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들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것을 찬송해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도록 부름 받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찬송도 이러한 일을 위해 있고 이런 예배 목표에 기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송함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송함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죄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택받은 죄인들을 향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속받은 자녀로서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경배해야 합니다. 선택하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구속하신 주님을 찬송하며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칩니다.
이렇게 울려 퍼지는 찬송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보다 더 큰 자랑거리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 찬송의 고백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은혜에 대한 찬송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립니다.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찬송 제목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이 동반될 때 더욱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 십자가 그늘 밑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의 반복입니다. 차갑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마다 피 묻은 복음이 사라진 강단이 있었습니다. 냉담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면 예배는 회복됩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찬양할 때 얻는 유익이 또 있습니다. 영적 생활의 순발력입니다. 침체에 빠진 영혼을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미끄러지는 자를 즉각적으로 붙들어 줍니다.
언젠가 부산의 한 교회에서 주최하는 전도 집회에 설교자로 초빙받았습니다. 불신자 1만 명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큰 집회였습니다.
공항으로 가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전날 밤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온몸에 피곤함이 몰려왔습니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기도도 해보고 마음도 다스려 보았지만 복음에 대한 감격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항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잠시 후 중요한 집회에서 설교해야 할 텐데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이제 2시간 후면 불신자들 앞에 서야 하는데 말입니다.
비행기는 이륙했고 밀려오는 피로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한 곡조의 찬송가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큰 소리를 울리며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에 보답하리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 고맙고도 크도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찬송했습니다. 마음속에서 나 같은 죄인 를 살리신 은혜가 샘물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들이 메마른 마음을 적셨습니다.
순식간에 마음속에 수많은 구원의 언어들이 샘솟았습니다. 신기하게 육체의 피로도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설교자로 세워주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잠시 후 저는 그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후회가 없는 설교였습니다. 찬송의 힘을 새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함.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함.
넷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위기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거대한 성가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은혜였습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유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애굽기 14장 30-31절).
먼저 예배자들이 일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간증을 찬송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은혜의 간증이 있다면 예배자들은 진심으로 찬송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찬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는 노래하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충고하였습니다.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닙니다. 생각해야 할 때이고, 설교해야 할 때이며, 죄를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악을 향한 그분의 진노와 우리의 어리석은 모든 죄악들을 외쳐야 할 때입니다. 노래할 때는 나중에 찾아올 것입니다. 위대한 부흥이 임하고 하늘의 창이 열리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그때가 노래할 때입니다.
맺음말
맺음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또한 예배에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예배하는 성도들이 없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마음으로 은혜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그날을 바라보며 예배드려야 합니다.
찬송 속에 영혼의 진실한 고백이 스며들도록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모든 예배자들이 온 마음을 다해 찬송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거룩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예배당은 감격에 찬 찬송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찬송은 불꽃처럼 들려져야 합니다.
스터디 교재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으며(출 15:1), 이것을 통해 찬양과 관련하여 알 수 있는 영적인 원리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찬양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찬양을 통해서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여 과도한 악기를 사용한다든지 심리적인 기법을 응용하는 시도들이 지니고 있는 오류는 무엇입니까?
예배 가운데 찬양을 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또한 저자는 성가대 운영에 대해 어떤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까?
찬송이 일반 노래와 가장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이것과 관련하여 찬송가 가락은 어떤 곡조여야 합니까?
말씀을 듣기 전에 찬양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줍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이유로 크게 세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찬양 제목들은 무엇인지 성경 구절을 찾아보십시오.
시편 148:3-5
시편 135:3-4
출애굽기 14:30-31
찬양과 관련하여 우리가 조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