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중요한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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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을 바꾸는 중요한 결단
저는 아침마다 작은 고민을 합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바지와 티셔츠 색깔은 잘 어울릴까?
한두번 갈아입어 보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그런 흔적이 잘 안 보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때로는 마을버스를 탈까 그냥 걸어갈까?
식사로 된장국 먹을까 아니면 제육볶음먹을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녁에 TV를 볼까 말까 고민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이 제 인생의 큰 의미를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까지 하나님께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결정들이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을 결정할때, 인생의 배우자를 선택할때, 자녀들의 진로를 결정할 때 등등.
이런 선택들은 한번 결정을 내리면 쉽게 돌이킬수 없는 큰 무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순간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에휴 목사님, 오늘도 뻔한 말씀하시네요.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라는거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말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과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 르호보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중요한 결단을 할 때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1]
먼저 1-4절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지만 그 후 점점 타락했습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수많은 건축을 단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고, 무거운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달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는 무시하고 젊은 신하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백성들을 더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결국 백성들이 반기를 들었고,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분노한 르호보암은 군대를 일으켜 북이스라엘을 치려 했습니다.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으니,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전쟁하러 가던 발걸음을 멈춥니다.
무엇이 그의 분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일까요?
예언자 스마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절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들과 싸우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로보암을 치러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놀랍게도 르호보암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군사를 돌려 보냅니다.
가다가 중간에 군사를 돌리는 건 정말 정말 체면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체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원래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 솔로몬의 잘못을 깨닫지 못할만큼 우둔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다릅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전쟁에 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 지파를 거느린 북이스라엘을 유다의 두 지파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형제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이를 틈타 외세가 침략하여 이스라엘은 더 빨리 무너졌을지 모릅니다.
선택 하나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의 결단은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자존심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자존심때문에 자녀의 선택을 강요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존심때문에 배우자와 큰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택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게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멈출 수 있어야 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세상에서 왕만큼 자존심이 센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용기있는 사람, 믿음있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 목사님, 저도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대놓고 알려주시면 순종하죠. 현실은 그게 아니니까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중요한 순간마다 성경책 펼쳐놓고 임의로 한구절을 뽑아 하나님 뜻이라고 우길수도 없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날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순종의 삶이 지속될 때,
중요한 순간이 오면 내 감정이나 자존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론2]
물론 순종은 현실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며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거니까 지켜주시겠지”하면서 나는 손 놓고 있는게 믿음은 아닙니다.
5-12절을 보십시오.
르호보암은 주로 남쪽과 서쪽 경계에 요새 성읍들을 세웁니다.
특히 요새를 북이스라엘이 있는 북쪽이 아닌 남쪽과 서쪽에 짓습니다.
형제와 싸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도 다른 외세의 침략을 대비한 것입니다.
순종한다고 해서 삶의 현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도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가령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루 12시간 기도만 하고 공부는 게을리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게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게 아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설득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르호보암이 어느 순간 각성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도 왕으로서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을 즉시 르호보암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의 순종함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역대기만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열왕기서에는 5-23절의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서를 읽으면 르호보암은 정말 형편없는 왕입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한 순간 하나님은 회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 회복의 증거가 13절부터 17절에 나타납니다.
북이스라엘의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자신의 고향인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로 넘어옵니다.
자신들의 목장과 소유지를 버리면서까지 왜 유다로 넘어온 것일까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제사장들을 자기 마음대로 세워 우상숭배를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말씀에 따르면 레위인과 제사장은 혈통에 따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은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운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마음을 굳힌 백성들도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따라 함께 유다로 이주합니다.
자신들의 집과 땅,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본론3]
그러자 하나님이 어떤 복을 주시나요?
17절입니다.
3년 동안 유다 나라를 강하게 하시고, 르호보암의 왕권을 확고히 세워주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다윗과 솔로몬이 걸었던 주님의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삶의 중요한 선택 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존심이 아닌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둘째는 기득권이 아닌 신앙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존심보다 기득권을 내려놓는게 더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저는 대형교회를 다니시면서 불만이 많으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들어보니 그 불만의 내용들은 타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쉽게 다른 교회로 옮기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쌓아온 관계, 익숙함, 편리함같은 ‘기득권’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을 찾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과 땅, 소유를 버리고 남유다로 내려왔습니다.
삶의 안정과 기득권을 버리고 신앙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결단이 유다를 강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반면, 여로보암은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뽑아 우상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겉으로는 나라를 지키려는 선택같이 보이지만,
결국 그 결정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아닌 자기 욕망을 기준으로 한 선택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르호보암은 달랐습니다.
그가 말씀을 붙잡자,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신앙을 찾는 백성들이 그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할 때, 하나님은 잃었던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목표가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도 던져 줍니다.
르호보암의 경우 그의 순종과 복은 겨우 3년 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그는 다시 교만해진 것입니다.
18-23절입니다.
르호보암은 아내 18명과 첩 70명을 두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 욕망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처럼 외교적 결혼을 통해 나라를 굳건히 세우려는 시도였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 솔로몬을 보십시오.
외교적 전략상 아내를 많이 얻었다가 결국 우상숭배의 길을 갔습니다.
그럼 아버지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어야 하는데 그는 다시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욕망과 계산을 따라간 것입니다.
인간에게 교만은 쉽고 겸손은 힘든 것입니다.
더 갖고, 더 높아지고, 더 성공하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교만해지고 맙니다.
날마다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교만은 가까워지고 겸손은 멀어지게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아침 옷이나 음식처럼 사소한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무거운 결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두 가지 기준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첫째, 자존심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관계 속에서 자존심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번 주에 한 번만이라도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 한 걸음의 결단이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득권이 아니라 신앙을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집과 땅, 기득권을 버리고 신앙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신앙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손해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의 삶에서 ‘내 편리함, 내 이익’을 내려놓고 말씀을 따라 결단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자리에 더 큰 강함과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지혜가 우리를 지켜주는 요새가 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만이 무너지지 않는 요새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참된 피난처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르호보암은 3년 동안만 순종하다가 다시 교만으로 무너졌습니다.
오늘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도 내일은 또다시 교만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내 자존심이 아니라 말씀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내 기득권이 아니라 신앙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성으로 의지하겠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참된 결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