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봇, 영광이 떠나다 2025 0928 삼상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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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스토리텔링 설교>
# Scene 1. 성전의 두 얼굴
# Scene 1. 성전의 두 얼굴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편안하고 차분한 톤으로 시작)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영적 중심지였던 '실로'라는 곳에 와 있습니다. 그곳엔 하나님의 집, 성막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거룩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상상했을 겁니다. 바람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로운 연기,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 소리... 하지만 오늘 우리가 찾아간 실로의 성전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톤을 살짝 바꾸어, 현실감 있게)
성전 뜰에 들어서자마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거룩한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로운 냄새가 아닙니다. 마치 기름기 많은 고기를 굽는, 시끄러운 고깃집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입니다.
저쪽을 보니,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봐! 그거 말고, 기름 많은 좋은 부위로 가져와!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맛을 봐야겠어!"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가장 거룩해야 할 제물을 마치 자기들 맘대로 쓸 수 있는 전리품처럼 다룹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맞을까요? 제사를 드리는 경건함은 사라지고, 자기 배를 채우려는 탐욕만 남았습니다. 심지어 성전 입구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러 온 여인들과 부끄러운 짓을 벌이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이곳이 바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관리하던 성전의 '낮의 얼굴'이었습니다. 시끄럽고, 탐욕스럽고, 위선으로 가득 찬 곳.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모였지만, 사실 그곳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잠시 멈춤. 조용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전환)
자, 이제 시간이 흘러 시끄럽던 낮은 지나가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탐욕스러운 외침도 멈췄습니다. 성전의 또 다른 얼굴, '밤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성전 한가운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앞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움직입니다.
아주 어린 소년입니다. 아직 잠옷 같은 세마포 에봇을 입은 아이. 바로 소년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이 조용한 시간에 자기 일을 합니다. 어질러진 성전을 정리하고, 내일 아침을 위해 성전 문을 열 준비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그는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시끄럽고 역한 냄새가 진동하던 낮의 성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이 고요한 밤의 성전에는 소년 사무엘의 조용한 순종과 신실함만이 빛나고 있습니다.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듯)
여러분, 똑같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나 다른 두 개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려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무엘의 모습.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며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세상과 똑같은 욕심의 냄새입니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순종의 향기입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공간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 두 얼굴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깊고 어두운 밤에 말씀하기로 결심하십니다. 하지만 시끄럽던 낮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고요한 밤의 어린 소년에게 말입니다.
# Scene 2. 어둠 속의 속삭임
# Scene 2. 어둠 속의 속삭임
(차분하게 다음 장면으로 연결하며)
자, 이렇게 성전의 두 얼굴, 시끄러운 낮과 고요한 밤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의 얼굴, 즉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에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원래 다 저런 거지 뭐.' 영적인 무기력함이 이스라엘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시대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사무엘상 3장 1절, 그리고 3절에서 4절, 마지막으로 1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첫 말씀이 어떻게 임하는지 귀 기울여 보십시오.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다시 청중과 눈을 맞추며, 조용하고 집중된 톤으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성경은 지금이 영적인 침묵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시대. 얼마나 절망적인 시대입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3절 말씀이 우리에게 작은 빛을 던져줍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희망의 불씨 하나를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꺼지지 않은 등불 곁에, 누가 누워있었죠? 바로 소년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습니다. 지친 몸을 뉘인 사무엘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고요한 성전의 적막을 깨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엘아."
소년은 잠결에 눈을 뜹니다. '엘리 제사장님이 부르시나 보다.' 그는 곧장 일어나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하죠. "아니다. 가서 다시 누워라."
사무엘은 다시 돌아와 눕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엘아."
그는 다시 일어나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부르셨지요? 제가 여기 왔습니다." 엘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아들아, 나는 부르지 않았다. 가서 누워라."
세 번째.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아."
소년은 이제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분명히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그제야 늙은 제사장 엘리는 깨닫습니다. 아, 이 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구나. 이 어둡고 침묵하던 시대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구나!
엘리는 사무엘에게 방법을 알려줍니다. "만약 또 부르시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눕습니다. 이제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채, 다시 그 음성이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
마침내,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가깝게. "사무엘아, 사무엘아."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가 가르쳐 준 대로 온 마음을 다해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잠시 멈춤. 청중에게 적용하며)
여러분, 이 장면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없는 시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누구에게 찾아오셨습니까? 가장 유력한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들을 준비가 된 한 사람,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려는 순수한 영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유튜브,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세상은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우리 귀를 채우고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공간이 없습니다.
사무엘의 위대함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의 **'자세'**였습니다. "주님, 제가 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열린 마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 너무 피곤해요. 나중에요." 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무엘처럼, "주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바로 이 대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Scene 3. 가짜 믿음의 함성
# Scene 3. 가짜 믿음의 함성
(분위기를 전환하며, 조금 더 긴박한 톤으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낡고 무너진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에 큰 위기가 닥칩니다. 숙적이었던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무엘상 4장 2절에서 3절, 그리고 5절 말씀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대책을 내놓는지 한번 보십시오.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2 언약궤를 빼앗기다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청중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패배합니다. 4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충격에 빠진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우리가 왜 졌을까?"
여러분, 이 질문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패배의 원인을 찾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깨달아야 했을까요? '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구나.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을 내버려 둔 우리의 죄가 크구나.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회개로 나아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아하! 우리가 왜 졌는지 알았다! 우리에게 '그것'이 없어서 그래!" 그들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이었죠?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였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마치 행운의 부적이나 게임의 '필살기 아이템'처럼 생각했습니다.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우리 편이 되어주실 거라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실로에 사람을 보냅니다. 타락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군대 진영에 도착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5절 말씀처럼, 이스라엘 온 군대가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와아아아! 이제 이겼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블레셋 놈들 다 죽었어!"
그들의 함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진짜 믿음의 함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외침이 아니라, '언약궤'라는 물건을 향한 미신의 함성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그들의 요란한 함성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2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1차전보다 훨씬 더 크게 패배합니다. 3만 명이 죽어 나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이방 민족인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잠시 멈춤. 청중에게 적용하며)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나에게도 이런 '언약궤'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상징에 내 신앙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나요? '내가 주일 성수 했으니까.' '내가 십일조 드렸으니까.' '내가 교회에서 봉사하니까.' '내가 매일 큐티하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내 삶을 무조건 책임져 주셔야 한다는 생각.
물론, 이 모든 행위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위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삶의 순종과 분리될 때, 그것은 한순간에 내가 의지하는 '언약궤'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미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란한 함성, 종교적인 열심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함성이, 가장 큰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이제 이 끔찍한 패배의 소식이, 실로에 있는 늙은 대제사장 엘리에게로 전해집니다.
# Scene 4. 이가봇, 영광이 떠나다
# Scene 4. 이가봇, 영광이 떠나다
(앞 장면의 긴장감을 이어, 비장하고 엄숙한 톤으로)
이스라엘의 함성은 처절한 비명이 되었습니다. 전쟁터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이 끔찍한 소식이 실로를 향해 달려옵니다. 사무엘상 4장 16절에서 18절, 그리고 21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날의 기록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청중을 응시하며,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실로 성문 곁, 길가의 의자에 아흔여덟 살의 늙은 제사장 엘리가 앉아 있습니다. 그의 눈은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전쟁터에 나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쓴 한 병사가 비틀거리며 성 안으로 뛰어 들어옵니다. 비보를 직감한 온 성읍이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엘리는 소리쳐 묻습니다. "내 아들아, 도대체 무슨 일이냐!"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가장 끔찍한 소식을 차례대로 전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여 도망쳤습니다." 둘째, "수많은 백성이 죽었습니다." 셋째, "제사장님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는... 어떻게 되었느냐?"
병사가 마지막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아들의 죽음 소식보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그를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시각,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이 소식을 듣습니다. 그녀는 죽어가며,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름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처절한 비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אִיכָבוֹד)"이라고 지었습니다.
(핵심 메시지, 원어 설명에 집중)
여러분, 이 '이가봇'이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뜻하는 단어는 '카보드(כָּבוֹד)'입니다. 이 '카보드'의 원래 뜻은 '무겁다', '육중하다', '실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가볍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실제적인 무게감으로, 실체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카보드' 앞에 '없다'를 의미하는 부정 접두사 '이(אִי)'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이가봇'이 된 것입니다. 뜻은 이것입니다. "영광이 없다."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무겁다'는 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무게감이 사라졌다.""실체가 떠나버렸다."
겉모습은 그대로입니다. 성전도 있고, 제사도 드리고, 사람들도 모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가장 중요한 '무게', 즉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인 '카보드'가 사라져 버린 상태. 그저 껍데기만 남은 종교. 이것이 바로 '이가봇'의 비극입니다.
죽어가는 어미는 두 번이나 절규합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결론 및 적용
결론 및 적용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편의 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던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에서 시작하여, 그 죄를 알면서도 방치했던 엘리의 무기력함을 거쳐, 회개 대신 언약궤라는 부적을 의지했던 백성들의 미신적인 함성을 지나, 마침내 '이가봇'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착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3천 년 전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가봇'의 비극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 그리고 바로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봉사는 어떻습니까? 혹시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음악, 열정적인 함성은 가득한데... 그 안에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 그 거룩한 무게감인 '카보드'는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없는 종교 활동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열심은 결국 "영광이 떠났다"는 '이가봇'이라는 이름표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이 캄캄한 '이가봇'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남겨두셨습니다. 누구였습니까? 바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했던 소년 사무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카보드'는 우리의 요란한 함성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소리를 끄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잠잠히 엎드려 '듣는' 한 사람을 통해 다시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시끄러운 함성 속에 살다가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고요한 골방에서 "주님, 듣겠습니다"라고 응답하여, 이 땅에 다시 하나님의 '카보드'가 임하는 통로가 되시겠습니까?
우리 청년부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이가봇'의 비극을 넘어 사무엘의 희망을 선택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