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마르다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6 views
Notes
Transcript

I. 본문 해설

온 세상에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임하고 운명하실 시간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섯 번째 말씀을 남기셨다.
그것은 특별한 말씀이 아니었다. 남기신 말씀이 육체의 고통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탄식이었다.
“내가 목마르다” 그 말씀 자체로만 보자면 그것은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매달리신 고통과 함께 찾아온 육체의 갈증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행동들은 우리의 신앙과 관련하여 깊고 무게 있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II. 내가 목마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마디의 말씀 곧 가상 칠언 중에서 제5언의 말씀은 예수 자신의 육신의 고통에 대한 호소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네 번째 말씀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도 개인적인 기도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의 인성에서 박탈당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탄식하신 것이다.
이와는 달리 가상 제5언의 말씀은 한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고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A.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포도주를 거절하셨다.
세 번의 음료 제공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때까지 모두 세 번의 음료가 제공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음료가 제공된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이었다(마 27:34, 막 15:23).
그리고 세 번째로 음료가 제공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기 직전이었다(요 19: 30).
첫 번째와 두 번째 포도주에는 모두 몰약과 쓸개 등이 첨가된 포도주였다.
그리고 세 번째 제공된 것은 신 포도주였다(요19:29).
음료 제공의 유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자들에게 진통의 효과가 있는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자비의 습관으로 여겨졌다.
그 근거는 "왕의 어머니의 훈계”로 알려진 잠언에서 나오는데, 그 자비의 대상은 “죽게 된 자와 근심 있는 자들” 이었다.
잠언 31:6–7 NKRV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잠언의 교훈을 따른 이 자비로운 행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행해졌다.
마태복음(마 27:34)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가 제공되었고, 마가복음(막 15:23)에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가 제공되었다고 보도된다.
예수께서는 쓸개 탄 포도주는 맛보시고는 마시기를 거절하셨고, 몰약을 탄 포도주는 아예 처음부터 받지 아니하셨다.
십자가 형벌의 육체적 고통 두 가지
죄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고 나면 많은 출혈이 뒤따른다.
이는 대개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맥과 같은 핏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신체에는 두 가지 특별한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이고, 또 하나는 목이 타들어가는 것과 같은 갈증이다.
당시 로마 사람들이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던 것은 그 형벌의 잔혹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형수가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겪게 하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옥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두통 때문에 죄수들은 혼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였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과 같은 갈증은 고통에 또 다른 고통을 더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고통스러운 현상을 다 겪으셨다.
얼핏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제공되는 포도주를 마시면 머리와 온몸의 통증도 잊게 되고, 목마름도 해갈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이었다.

1) 예수 자신의 서원

첫째로는 예수 자신의 서원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나실인 서원 적용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
이것은 예수의 자의적이고 단순한 서원이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은 특별히 하나님께 목적을 가지고 헌신하기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자발적인 서약이었다(민 6:1-21).
이것을 안 읽으면 이 문제는 안 풀리는 거예요. 그래서 연관된 구절들을 성경에서 다 찾아야 되는 거야. 물론 이제 주석 같은 거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일단은 성경을 찾아야 되는 거.
원래 나실인이란 히브리어 나지르의 음력인데, 이는 “분리하다, 구별하다 헌신하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나자르의 수동 명사형으로 “분리된 자, 구별된 자, 바쳐진 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나실인의 세 가지 규례
구약에서 자신을 나실인으로서 서약한 자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규례가 제시되어 있었다.
첫 번째로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실인이 서약한 기간 중 포도나무에서 나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민 6:3).
이런 조항이 포함된 이유가 있다.
당시 문맥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을 의미했는데, 나실인은 자신을 이미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그런 기쁨 누리기를 거절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머리털을 깎지 않는 것이다.
이는 나실인으로서 구별된 외관상의 모습으로서 깎지 않고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민 6:5).
세 번째로는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정결을 뜻하였다.
이는 나실인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결격이 없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부모나 형제, 혹은 자매가 죽었을지라도 그들의 시체로 인해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되었다(민 6:6-7).
이 모든 규례는 나실인이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완전히 바쳐진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실인 서원이 필요치 않으신 분이 하신 이유
예수께서는 한순간도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바치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는 연약한 인간들이 행하는 나실인의 서원 같은 것을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예수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으나 율법보다 더 큰 이이시며 오히려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 아니었던가(마 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실인의 서원으로 묶으신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구약에 익숙한 제자들에게 이 서원 이후에 자신이 이루실 구속 사역이 당신 자신 전부를 바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생각은 당신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전 과정에 적용되었다.
나실인 서원의 의미와 적용
이는 당신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희생임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많아도 그 은혜가 부여한 소명을 따라 사는 자는 얼마나 소수인가.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임을 쉽게 믿는다.
그리고 그런 특징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승훈 선생 예화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서 그루터기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그중 한 사람은 남강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일 것이다.
그는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애국 정신을 고취하고, 1919년에는 3.1 독립 선언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고종 황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당시 "외부 협판”직을 제의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무부 차관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그 높은 관직을 고사하였다.
선생은 그때의 일을 자신의 책 「고백록」에서 고종 황제에게 답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 전부 다 바쳐진 사람이기에 더 이상 다른 일에 바칠 제 자신이 남아 있지 않사옵나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막상 종처럼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오기를 부리는 목회자들을 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좋아하지만, 그분의 제자가 마땅히 가야 할 길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하는 교인들을 만난다.
그들 모두가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2)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심

둘째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시기 위함이었다.
진통제 역할하는 포도주들(쓸개, 몰약)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제공된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보신 후 거절하셨다.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 27:33-34).
여기에서 쓸개는 어떤 동물의 쓸개를 의미할 수도 있으나, 또한 은유적으로 매우 쓰고 불쾌한 맛을 가진 어떤 물질의 성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때의 육체의 심한 통증을 진정시키는 독성 물질이나 약재 등을 섞은 포도주가 예수께 제공되었을 것이다.
포도주에 섞여 있던 몰약 역시 감람 과 미르나무 속 목재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수지다.
이게 나무 기름이라는 뜻이에요. 송진 같은 걸 얘기하는 거예요.
수지로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통증을 완화시키는 진통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부적합한 십자가형
예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죄인들을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몸소 십자가의 죽음으로 희생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마 26:2, 눅 24:7).
놀라운 것은 당신이 사형을 당하실 것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 미리 알고 계셨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으로서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계셨다.
당시 웬만하면 웬만한 죄목으로는 십자가 처형을 받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 안 받았다.
더욱이 예수께는 그러한 형벌에 처하도록 고소 당하실 죄목이 없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분께서 무슨 나쁜 일을 행하셨던가?
그분이 하신 일이라고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인 자를 먹이시고 무지한 자들을 진리로 가르치시는 것뿐 아니었는가.
누가 예측하더라도 확률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당하실 가능성은 낮았다.
예수님의 부당한 십자가형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아셨고, 또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마 20:19, 마 26:2).
이는 당신의 처형과 관련하여 악한 자들의 음모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악한 의도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이미 그 마각을 드러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은 예수를 그냥 사형시키라고 요구하는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를 향해 외쳤다.
"...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22-23).
백성들은 예수를 그냥 죽이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음모
이렇게 하도록 사주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에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함으로써 죽으신 후에라도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사실의 쐐기를 박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을, 당시 유대인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신명기의 교훈, 곧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1-23)라는 말씀과 연관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일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소문이 들려도 유대인들이 신앙적으로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여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하신 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리를 따르는 자의 생각은 투명하고 명료하며 단순하다.
그러나 거짓을 따르는 자의 생각은 혼탁하고 불분명하고 복잡하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포적 대신의 중보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구원받을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다.
내포적 대신의 중보자로서 하시는 일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의 제물이고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마땅한 형벌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히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선지자들이 당신 자신에 대해 예언한 숙명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 예언의 실현이 결국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뒤집어쓰시는 죽음 임도 잘 알고 계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따라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실 때 고통을 받으시는 것은 그분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진통제로 경감될 수 없는 죄의 무게
당신이 구원하셔야 할 인류의 죄가 무한히 컸기 때문에 당신의 인성으로 당하는 고통 또한 무한히 큰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진통제의 도움으로 경감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당신 홀로 오롯이 모두 겪으셔야만 하는 고통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인류의 속죄를 위한 고통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경륜을 이루시는 것임을 잘 알고 계셨다.
이러한 명백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체의 통증을 줄이는 약물 사용하기를 거부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육체와 정신이 모두 살아 있어서 뚜렷한 의식 속에서 마땅한 고통을 남김없이 받으면서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진통제 예화
제2차 세계대전 때만 하더라도 선진국들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와 스트레스를 잊게 하려고 럼이나 브랜디와 같은 독한 술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포도주나 와인 같은 주류를 전투병들에게 보급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피로도를 줄이고 집중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 하에 약물을 투여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패러디팀,) 벤제드린, 댁세드린과 같은 암페타민 류의 향정신성 의약품들을 공공연하게 투여하였다.
심지어 월남전에서는 미군 병사들 사이에 헤로인과 같은 마약이 광범위하게 공공연히 사용되었다고 하니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진통제가 필요한 세상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끔찍한 육신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당신 자신의 목에 주어진 고통을 다 감당하기를 원하셨다.
사람들이 최초로 마약을 복용하거나 투여하는 동기는 육체적 고통이나 호기심 때문이지만, 그다음부터는 현실을 마주할 정신의 힘이 없어서 그리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마약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포폴이나 미다졸람과 같은 향정신성 신경 안정제를 하루에도 여러 병원을 돌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며 10여 차례씩 투약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동기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맑은 정신으로 마주해야 할 현실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런 약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보아도 "인생은 끝없는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
그리고 특별 은총의 차원에서 보아도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그들의 삶은 "전투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영적 전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여기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마귀에게 딸린 졸개 귀신들의 종류나 등급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가 마귀를 비롯한 이 모든 종류와 계급의 악한 영들의 세력을 무장 해제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혈의 피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서 구원을 얻은 자, 구원을 얻은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그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바쳐진 삶을 살고 있는가?
대의가 분명하고 주의 뜻임이 명백한데도,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대신(골 1:24), 세상의 쾌락이나 오락으로 진통제를 삼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고통을 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가 할퀸 손톱 자국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은 모두가 동일하다.
쾌락과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고통과 아픔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거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 고통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난 어떤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집요하게 그 의미를 따져 묻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그 의미를 부여하는 기준과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믿음은 그 뜻을 가장 앞세우며 받아들인다.
적용_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진 그리스도인
우리의 구원의 기초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의 새로운 삶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우리는 그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어떻게 그 크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그 길은 이것이다.
이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래서 종교개혁자 쟝 깔뱅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체적인 삶의 기초이자 경건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쟝 깔뱅은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 제3권 8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다양한 고통들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우리가 단지 자기를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한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B. 신 포도주를 받으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 그리고 마시셨다.
예수께서 받으신 신 포도주의 정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통제로 제공된 두 번의 십자가는 거절하셨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으시기 직전에 제공된 신 포도주는 받아 마시셨다.
"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29-30).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면 그것은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 포도주와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결코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자신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가?"
앞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우리말 번역에 “신 포도주”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옥소스”인데, 이것은 신맛을 가진 포도주가 아니라 “식초”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사상 정확한 번역으로 가장 권위 있는 영국 흠정역 킹 제임스 버전에서도 이 단어를 식초, vinegar(비네거)라고 번역하였다.
“예수께서 받으셨다”라고 보도되고 있는 신 포도주는 엄밀히 말하면 포도주가 아니라 완전히 발효된 식초였다.
식초와 포도주의 구별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볼 때도 또 언어학적으로도 “식초”와 “포도주”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어 단어인 “비네거”는 프랑스어 “뱅 에그 허”에서 유래했으며, “뱅 에그 허”의 문자적 의미도 신 포도주(sour wine)를 의미한다.
또한 두 단어가 합쳐진 프랑스어 명사는 “비네르허”로서 식초 “비네거”를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와 식초는 서로 다른 물질이다.
포도주는 포도즙의 당분이 효모에 의해 알코올로 발효되어 만들어진다.
이에 반해 식초는 포도주나 다른 알코올 음료가 공기 중의 아세트산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알코올이 아세트산으로 산화하면서 매우 신맛이 나는 액체 곧 식초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화학적으로 식초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과발효되거나 산화된 포도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미 포도주로서의 성질이 사라지고 식초가 된 것을 의미한다.
식초로 목을 축이신 예수님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진통제가 섞인 포도주는 거절하시고 또 다른 음료인 신포도주, 엄밀히 말하면 식초는 받아서 드셨던 이유다(요 19:30).
당시의 식초는 목마른 자가 해갈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용도의 음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드린 나실인의 서약을 어기심이 없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한 모금의 식초로 마른 목을 축이시고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배타적 헌신
일찍이 서원하신 바와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분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헌신되었다.
그렇게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지신 가운데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십자가에서 그분의 온몸은 지옥의 유황 불에 튀겨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몸과 마음은 어떤 불순물도 섞임이 없이 순수하게 완전하게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쳐졌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생애의 마침표였다.
예수님의 섬김에 대한 묵상
숨을 거두시기 직전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식초로 입술을 적시시는 예수를 뵈오며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었음을 묵상하게 된다.
마치 자기를 모두 분쇄하여 다 같이 싫어하는 것처럼 휴식도 없이 사셨던 예수의 공생애의 섬김을 생각해 보라.
사실은 그 모든 섬김이 이렇게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분의 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임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지극히 육신을 아끼며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역겹지 아니한가?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여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당신의 몸을 바치시기까지 어떻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셨는지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적용_예수님의 헌신적 삶을 본받음
그렇게 우리의 육체를 지나치게 아끼려는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허술하게 섬긴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멘이요 충성된 종이셨던 예수의 모습에 내 모습을 포개어 본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도 그 아들을 통해 구원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저 남의 말을 하듯이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니까”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예리한 창끝처럼 찌르는 양심의 가책 우리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당신 자신을 위해 언제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신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당신의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시며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한 인간으로 사시며 섬기셨다(빌 2:7).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예수께서는 일평생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셨다(마 8:20).
남은 우리의 생애, 아니 그 많은 세월 중 단 한 해,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불살라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을까.
생각 없이 게으름 속에서 태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자.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격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모퉁이로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함과 부지런함으로 섬기며 살아가자.

C. 예언을 응하게 하심.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셨다.
구약 예언 시편의 성취
예수께서 다섯 번째 말씀을 남기신 것과 이에 따르는 그분의 모든 행동은 구약에서 기록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구약의 예언 중 가장 직접적인 성취는 시편 69편에서 제시된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면 목마를 때에 초로 마시게 하셨사오니" (시 69:21).
또한 십자가에서 겪게 되신 예수의 극심한 고통과 갈증에 대해서도 예언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예언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응하도록 자신을 다 바치셨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사오니 주께서 나를 사망의 흙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5).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극심한 고통과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짊어 지심
온 세상이 당신의 것인데, 한 모금의 물을 주는 이가 없어서 칼로 목젖을 후벼파는 것과 같은 목마름의 고통을 감당하고 계셨으니, 이는 당신이 스스로를 바쳐 우리의 많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가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극한의 고통과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셨던 충직하신 그 모습도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며 목이 마르면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이처럼 예수의 생애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분을 가리켜 예언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응하게 하신 생애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늘 말씀하셨다.
“...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하는 말이 이것이라....” (눅 24:44).
적용_주를 위해 참는 고통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사는 것은 이제껏 살아온 삶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당신의 몫을 감당하셨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골 1:24)

III. 적용과 결론

적용_세상의 진통제를 거부하라.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실제로 그분이 육신을 타는 듯한 목마름의 고통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목마르지 않다.
우리는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았고, 흐르는 피에 온몸이 적셔지지도 않았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우리 육신이 마른 풀과 같이 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를 갈망해야 한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고통을 잊기 위해 마귀와 세상이 던져주는 진통제는 단호히 거절하라.
적용_영적 목마름을 추구하라.
예수께서 일생 동안 섬기면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호수의 밑바닥이 하늘의 단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온 땅을 비로 적실 거룩한 은혜의 생수를 갈망하라.
우리는 창조될 때부터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그분을 만나서 그분의 품에 안길 때까지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 없는 삶의 허무함과 무목적함에 자신을 던져버리고, 흐르는 시간에 강물에 떠밀리듯 살아가는 삶의 피곤함에 우리의 영혼은 더욱 파리해진다.
눈을 들어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히 채우자.
그리하여 그분이 흐느끼셨던 자리에서 우리도 흐느끼고 그분이 통곡하셨던 자리에서 우리도 눈물을 쏟자.
그분이 피 흘리신 그 자리에서 우리도 우리의 피를 쏟자.
이 땅에 메마른 산하에 구속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를 때까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