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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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5:3-6(신약 121쪽)
설교제목 : 존재의 가치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1983년도에 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제목의 영화인데요. 영화는 대략 1800년대 일본의 한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마을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풍습이 있었는데요. 70세가 넘어서 앞니가 빠진 노인을 산에 버리고 오는 것입니다. 왜 앞니가 빠진 노인을 산에 내어버리냐면요. 그가 이제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니가 있을 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앞니로 실을 끊는 일이었는데요. 앞니가 빠졌다는 것은 그마져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밥만 축내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 이와 같이 슬픈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70대의 어머니는 더이상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자식들 몰래 앞니를 상하게 해서, 산에 갈 날을 준비합니다. 부모로써 자녀의 앞날을 걱정하며 불우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아들의 지게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며 나이든 어미는 자신이 가족에게 버려지는 것보다 아들이 자신을 짊어지고 고생하는 것이 더 걱정입니다. 아들은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고 불우한 전통을 따라야 하는 처지가 못 마땅해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묵묵히 어머니를 모시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영화는 그저 화면을 통해서만 이야기하고 아들은 나이든 어미를 산에 홀로 내려두고 큰 슬픔에 잠겨 산을 내려오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가치에 관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가치는 무엇에서 비롯될까요?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가정에 생계유지에 기여를 해야만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이 생산을 할 수 없게 되고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하면, 그 쓸모는 다하고 인간의 가치는 소멸하는 것일까요?
2016년 일본의 한 장애인 시절에서는 벌어진 일입니다. 새벽 2시 10분경 한 남성이 망치로 창문을 깨고 침입하여 일하던 직원들을 묶고 열쇠를 빼앗은 후에 그 시간 잠들어 있던 장애인들을 칼로 찔러서 무려 19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는데요. 이 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동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그 장애인 시설에 근무하던 직원이었는데요. 그가 그곳에서 일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들은 안락사를 시켜야하고 이런 장애인을 돌보는 것은 돈과 시간의 낭비’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장애인들의 고통을 해결해 준 것이니 ‘장애인을 도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무섭고도 끔찍한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이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것이 ‘트롤리 딜레마’라는 생각실험을 통해 밝혀집니다. 이런 거예요.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기차를 멈출 수는 없고 둘 중에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한쪽에는 5명의 사람들이 있고요. 다른 한 쪽에는 1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차가 가는 길에 따라서 5명이든 1명이든 무조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무조건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많은 경우에는 그래도 5명보다 1명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서 1명을 희생시키는 방향의 선택을 합니다. 왜냐하면, 어짜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건강한 사람 하나를 희생시켜서 5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면, 그 건강한 사람의 심장이나, 각막과 같은 이식이 가능한 장기를 떼어줘서 5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것은 흔쾌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보면 다시 말해 계산만 놓고 보면, 하나를 잃어서 여럿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그 1명의 목숨값이 다른 여러 사람의 목숨값보다 작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가치 또는 생명의 가치라는 것이 값을 매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가치 또는 생명의 가치라는 것은요.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쓸모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도 이것을 이야기해주는데요. 누가복음 15장 3~6절을 같이 읽습니다,
누가복음 15:3-6(신약 121쪽)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잘 아시는 ‘잃은 양의 비유’인데요. 100마리의 양을 돌보는 목자는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찾아서 떠나고 그 양을 찾게 되었을 때, 매우 큰 기쁨을 누리게 됨을 이야기하는데요.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익숙해서 그렇지 이 이야기는 매우 이상한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 중에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라고요. 만약에 99마리의 안전이 확보가 되고 그 양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나 누군가가 있다면 이해가 돼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당연할 수 있죠. 그런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일 수 있어요. 한 마리 되 찾으려다가 아흔 아홉마리를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요. 사실 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요. 양으로 비유되는 한 생명 또는 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그 한 영혼을 하나님은 관심하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뜻하는데요. 앞서 말한 것처럼요. 그러한 한 영혼 또는 한 생명의 가치가 아흔 아홉마리의 가치보다 절대 모자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가치의 특별함을 이야기해주는데요.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함을 지닌 것을 말해요. 그러니 생명은 우열을 따질 수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 더 존귀한 생명이 있고 덜 존귀한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 생명의 가치를 나누지요. 쓸모에 따라서 그가 가진 지위와 능력에 따라서 가치의 크기를 나눠요. 이런 거죠. 병원에서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위급한 환자가 아니라 부자이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목숨의 경각에 달린 것보다 그가 가진 힘과 능력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더 올라가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의사들도 생명 존중에 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음을 믿는데요. 우리의 현실은 실상은 그 생명의 가치가 모두에게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거에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요.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나 한 마리의 양이나 그 생명의 가치에 있어서 모두가 같다고 이야기해주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요. 인간을 쓸모에 따라서 가치 매기는 사람은 아닌 것이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어보이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 생명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 그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우리가 신앙가운데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이지요. 바라건대,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삶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쓸모와 능력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존중하고 귀히 여김으로 주께서 가르쳐주신 생명의 가치를 늘 기억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