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6.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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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느헤미야 7장 4~7절(구약 735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6. 느헤미야
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6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7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느헤미야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구약시대의 역사를 놓고 보면, 느헤미야는 말라기 예언자와 더불어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일전에 살펴보았던 다니엘부터 지난 주 에스더 그리고 오늘 살펴볼 느헤미야의 역사는 이러한데요.
성경책의 배열순서와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간 인물이 다니엘이고요. 그 후에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의 최전성기 시절 아하수에로의 왕비가된 인물이 에스더입니다. 그리고 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시대 왕의 술 관원으로 일했던 이가 느헤미야이지요.
또한, 느헤미야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른바 ‘포로귀환의 마지막 3차 시기’를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한데요. 포로귀환이라는 것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일찍이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의 명령에서 시작된 1차 포로귀환이 약 100년에 걸쳐서 3차까지 이어졌는데요.
1차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538년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라는 이스라엘 왕족 출신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후에 2차는 458년에 에스라라는 대제사장이자 율법학자 출신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3차는 445년에 오늘 함께 나눌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예루살렘 성전주위를 넓게 감싸는 성벽재건을 하였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내용이 느헤미야라는 인물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에 좀 필수적인 것이라서요. 다시 정리해서 말씀을 드릴게요.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일했던 유대인인데요. 그의 조국은 오래전에 멸망하였고요. 약 100년 전부터 다시 고향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어요.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일은 점차 퇴색되어가고 힘을 잃어갔어요. 그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앞선 선배들처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보수하고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힘을 쏟게 돼요. 이를 위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요. 이는 단지 건물을 짓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요. 과연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고 또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일했습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당시 왕의 신임을 받으며 상당한 고위직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생각에는 술 맡은 관원이 조선시대 ‘기미상궁’과 같았을 거라 여기질도 모르는데요. 조선시대에 왕의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왕의 식사를 먹어보고 점검하던 역할을 하던 사람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고대에 술 맡은 관원은 그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기본적인 역할은 왕의 독살을 막는 것이었는데요. 이러한 역할은 아무에나 부여하지 않는 것이죠. 아마도 철저하게 신상 조사를 했을 것이고요.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이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다보니 왕의 최츤극이기도 했고요. 이는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높은 신분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한, 이를 통해 느헤미야라는 인물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도 있는데요. 그가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이방 나라의 고위직에 올랐다는 것은요. 그가 왕의 최측근이 될 만큼 흠이 없었던 사람이고요. 또한, 이방나라 그것도 식민지의 백성임이도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요.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을 것이고요. 그가 앞으로 보여줄 행보를 보아서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고 남달랐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같은 고향 사람인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에 탔으며 그곳에 사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여러 날 슬퍼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에스더를 통해서 금식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금식은 내 생명을 내걸면서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라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실수까지 해요. 왕에게 술을 따르면서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것이지요. 독살의 위험이 있는 시대에 왕 앞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 자처하는 일이지요. 왕의 입장에서는 불안해서 어떻게 그것을 마실 수 있겠어요. 달리 보자면,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애틋한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지요. 그의 근심이 하나님의 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훼손된 것에서 나오니까요.
그래도 느헤미야가 왕의 신뢰를 받고 또는 왕이 아끼는 신하임이 드러나는데요. 느헤미야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왕은 도리어 느헤미야를 걱정하고요.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을 보수하고 싶다는 청을 허락해줘요. 그뿐만 아니라, 그 작업에 필요한 건축재료까지 지원하고요. 그가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호위병들까지 보내줍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에 담임목사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어요. 아마 들어보신 얘기일 거예요. 담임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하기 전에 버스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요. 당시는 주일이라고 무조건 쉬거나 그러지 못했다고 해요. 주일이라도 일을 하곤 했는데요. 그러다보니 주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 사실은 어려운 환경이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곳에서 일하면서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요.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보다 배 이상의 야간에 당직을 섰고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더 손해보는 것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주변 동료들이 주일에 예배가라고 부추기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사실은 주일에 예배를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얻기 위해 조금 더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이 될 때요. 세상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얼마나 특별하게 볼까요. 어쩌면 그것이 세상과 다른 신앙의 매력적인 삶일 수 있는데요.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가치와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쉽게 말해서 이득이 되는 것에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 가서 예배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 없이 남들과 똑같이 사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기 시작할 때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발견하게 되고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한편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 왕의 지원과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했어요. 느헤미야는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것이며, 그로 인해서 페르시아 왕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재료를 제공한 것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간증합니다. 그러면서 한마음으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러한 움직임이 주변 민족들이나 그곳에 거주하던 이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삼발랏, 도비야, 게셈’이라는 인물이 주축이 되어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훼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삼발랏, 도비야, 게셈’을 주축으로 해서 주변 민족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불쾌감을 주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그곳에 정착하여 살던 이들과 주변 민족들의 기득권 때문인데요.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 당한 후에 오랜 세월 그곳은 버려진 땅이었고요. 그곳에 남아서 새로운 터전을 가꾸었던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력들이 이권을 다투며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포로귀한자들이요. 옛 땅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등장하니 결코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곳은 엄밀히 말하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 놓인 곳이었지만요. 그러나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동안 그곳에서 오랜 기간 형성된 세력이 나름대로 자치적인 세력을 이뤄온 것이지요.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느헤미야라는 돌이 판을 뒤흔들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과 그곳에 오래 전부터 자리를 잡고 세력을 형성한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느헤미야를 훼방합니다. 그러면서 페르시아 제국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고발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페르시아 왕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치권을 형성해서 독립하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총감독인 느헤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적들에 위협에 대비해서 무장하고 성벽재건하는 일을 진행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요. 방해세력이 있고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무려 52일만에 성벽을 완공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이로부터 깨닫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일을 행한다고 할지라도요.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거나 무조건 만사형통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 그 과정은 험난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요. 여러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죠.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할 때, 광야로 가셔서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되었고요.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고 말씀하시지요. 게다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을 짊어져야 했어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뤄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느헤미야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요. 방해가 있고 심지어 살해 위협이 있었는데도요. 오히려 52일만에 빠르게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일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라는 고발도 있었잖아요. 이는 공사를 중단시키기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러한 고발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에 따른 것인데요. 느헤미야 당시의 페르시아 왕인 아닥사스다는요. 선대 왕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이 암살 당해서 죽고서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에서 반란 사건이 일어났어요. 페르시아 제국의 이들을 감시할 전초기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또한, 이를 견제할 세력도 필요했고요. 그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힘을 실어주면서요.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허락했어요. 이렇게 신기하게도 예루살렘 성벽재건은 느헤미야의 종교적인 목적과 아닥사스다의 정치적인 목적이 맞아떨어져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요. 완벽한 타이밍에 반드시 이뤄져요.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이집트로 가서 노예로 살다가 누명을 쓰고요. 그보다 더 비천해져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고요.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돼요. 이 과정에서 요셉은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지요. 앞서 오늘 느헤미야가 술 맡은 관원이었다고 했지요. 또한, 고대에 술맡은 관원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인지 이야기 했지요. 그래서 요셉은 내심 자신의 도움으로 복직된 술 맡은 관리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술맡은 관원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죠. 그러다가 2년 후에 이집트 왕이 꾼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석할 자가 없자. 요셉을 떠올리게 되요. 그 과정에서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잘 아시는 것처럼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 곧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이 돼죠.
예전에 이러한 해설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이 왜 요셉에게 그토록 시련을 주셨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해설을 듣고 나서요. 요셉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당시 이집트의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30세여야 했어요. 요셉이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얘기하고 2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요셉은 30살이 되었지요. 달리 말하면, 요셉에게 그 2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요셉은 감옥을 나왔을지는 몰라도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할 수는 없었던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때를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세요.
또 이것으로부터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요. 하나님은 역사의 참 주인이시다는 거에요. 오늘 느헤미야에게 일어난 사건이 그저 우연이 아니면, 느헤미야의 실력만으로 이뤄진 것 같으신가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죠. 오히려 이 모든 것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셨음을 깨달을 수 있는데요. 사실 포로귀환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느헤미야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기까지 무려 약 100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이렇게 적지 않은 시간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요.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에초에 하나님이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면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건축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물론 이 과정에서도 느헤미야의 경우에서처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의 계획이 어느 정도는 성공해서 무려 15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성전은 완공되었고요. 그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약 100년 시간을 통과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완성되었어요.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지요. 앞서 살펴본 다니엘과 에스더를 비롯한 여러 성경의 인물이 험악한 포로기를 살면서요. 하나님의 영향력보다 그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영향력이 컸던 그때에도 하나님 역사의 물줄기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것을 보게 돼죠. 이렇게 하나님은 역사의 참 주인으로 계셔서 반드시 그분의 뜻을 적확한 시간에 이루시는 분이세요. 우리가 그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갈 수 있고요. 그것이 당장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 것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오늘 성경말씀에 주목하게 돼요. 느헤미야 7장 4~7절의 말씀인데요. 다시금 같이 읽습니다.
느헤미야 7장 4~7절(구약 735쪽)
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6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7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요. 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어요. 사실은 66절까지 읽어야 하지만, 전체 내용을 읽을 수가 없어서 명단을 소개하는 앞부분 읽었는데요. 처음에 이 명단을 보고서 이상했어요. 우선 이렇게 사람의 이름을 쭉 나열해 놓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 명단이 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이라는 사실에 알고서 왜 하필이면 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또 이 명단은 에스라서에도 기록이 되는데요.
처음에 포로귀환이 약 100년에 걸쳐서 세 차례 일어났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에 해당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에스라는 2차 포로귀환에 해당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1차 포로귀환자 명단이 기록된 에스라와 느헤미야 모두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2차 포로귀환인 에스라와 그것도 모자라 3차 포로귀환인 느헤미야까지 이 명단을 기록한 이유에 관해서 궁금했는데요.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이 명단은 포로귀환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말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1차에서 3차에 이르기까 끊어지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또 이 명단은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해줘요. 그들은 성경에 이름을 남기긴 했지만요. 자세한 그들의 삶은 대부분 알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거나 보통의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이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요.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고 계시지요.
이렇게 말해볼게요. 오늘 성경에 나온 그 명단은 우리의 이름과도 같아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지만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뤄가시는 것이죠. 오늘 이곳에 앉아 있는 내 옆 사람을 보세요. 신황등교회의 역사가 내 곁에 있는 이들을 통해 흘러가고 있고요. 앞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역사를 일궈가실 거에요.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