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와 자비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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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20:17-35절

찬 150장 갈보리 산 위에

수요예배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불러 주님의 전으로 인도하시고, 수요예배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높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며 마음이 분주하고 지쳐 있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시간 주님의 임재 안에 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안식처요 소망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와 연약함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일상 속에서는 여전히 내 뜻과 내 감정에 따라 살았습니다. 주의 말씀보다 세상의 기준을 따랐고, 기도보다 내 지혜를 의지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앞에 숨길 수 없는 우리의 교만과 게으름을 회개하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하시고,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시간 드려지는 예배 위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찬양 가운데 하늘 문을 여시고, 기도 가운데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며,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해 낙심한 자는 소망을 얻고, 지친 자는 힘을 얻으며, 아픈 자는 치유함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 시간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를 주의 손에 올려드립니다. 세우신 목사님께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더하시고, 말씀 사역과 목양의 자리에서 늘 강건케 하옵소서.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한 마음을 주셔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서로를 정죄하는 교회가 아니라, 품고 세워 주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다가오는 추석 명절 가운데 흩어져 만나는 모든 가정 위에도 주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가족 간의 화해와 사랑이 회복되게 하시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또 11월에 있을 새생명축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준비하는 모든 손길 위에 지혜를 주시고, 초청된 영혼들의 마음을 미리 열어 주셔서, 그날 구원의 은혜가 풍성히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민족과 열방을 위해 기도합니다. 혼란과 분열 가운데 있는 세상에 주의 평강을 부어 주시고, 특별히 이 땅의 교회들이 먼저 하나 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녀 세대 위에 믿음을 심어 주시고, 다음세대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이 시간의 처음과 끝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우리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올려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요 우리를 포기하실까요 안하실까요? 정말로 안하신다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가기 싫어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병원입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에 병원에 안간다는 말이 아니라, 제가 아픈 경우에 저는 병원을 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사를 맞는 것도 그렇구요. 제가 왜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할까. 곰곰히 몇가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는 우리 몸은 자연히 회복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무언가 약이나 인공적인 처치가 정말로 우리 몸에 좋을까?라는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 주사가 무서워서 그러냐 하는데, 뭐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게 이유가 될만큼 무섭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는 일단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게 두려운거죠. 그것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더 큰 걱정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더 큰 비용과 어려움을 겪어야 될 것이 걱정되기에 가기 꺼려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저 때문에 말고, 아이들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애들도 그래요, 병원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의사 선생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진찰실에 들어가면 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검사하고 진찰하고, 약을 먹는게, 아이들에게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뭐 간단한 질병이야 이렇지만, 더 큰 중병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일 아닌 것 같아서, 병원에 갔는데,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보시더니, 수술을 해야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수술을 하는 이유는 그렇죠. 그 아픈 부위를 빨리 손쓰지 않으면, 수술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찾아오기 때문에 수술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겁니다. 수술이란느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픈 부분을 건들여야 하구요, 필요하다면 몸을 절개하기도 해야 되구요, 회복하는 과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의사는요 괜히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칼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술을 안하는게 의사 자신에게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술을 선택하는 이유는, 오히려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지요, 수술은 순간적으로는 아프질 모르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 살 수 있고, 더 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이와 비슷하게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픈 부분, 숨기고 싶은 부분, 죄로 곪아 있는 부분을 드러내시는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곪아 있고, 잘못된 부분을 안고 이대로 살면 괜찮겠지 하는거에요, 그래서 덮어두고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때로는 그 죄가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 것을 아시기에 그것을 그냥 두시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 깨우시는 거죠. 징계가 필요하다면 징계를 하실 수 도 있고요, 그 아픈 부분을 찌르시고 도려내려고 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우리는 살리시는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거에요.
이런 인생의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혹시 이중에 계십니까? 여러분 그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 징계와 고통과 아픔의 터널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나를 버렸다라는 쪽으로 가시진 마시기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어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 한가지 믿음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조건과 환경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때로는 자식이 엉망진창으로 살아도요, 외적으로는 사랑할만한 조건이 없을지는 몰라도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 관계가 부모 자식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생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순간에도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세요. 내가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길로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오늘 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이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제 사사기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20장입니다. 지난 주의 줄거리를 다시 떠올려보면요, 한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죠. 첩은 간음을 저지르고 그 남편을 떠나게 되고요, 남편이 그 첩을 찾아 떠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브아라는 베냐민 지파 성읍에 묵게 됩니다. 레위 사람이 그곳에 머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 성이 이스라엘 지파 소속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이었기에 믿고 그곳에 묵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레위 사람의 기대와 반대로, 밤에 자신들에게 불량배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첩이 불량배들에게 죽게 되는 끔찍한 일을 겪고 말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요, 그 첩의 시체를 12개로 조각내어 온 이스라엘 지파에게 보내게 되는 내용이 지난 시간까지의 줄거리였습니다.
오늘 20장의 내용을 보면요, 하나님께서 이 죄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다루시고 심판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펼쳐져요,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 안에 어떠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일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요, 시체 조각을 받아보았습니다. 것을 받아본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베냐민 지파, 기브아 성읍, 자신의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온 이스라엘은 분노하게 됩니다. 이 죄는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 지파는 전쟁을 위해 모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전쟁은요, 이방 민족과의 전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들의 형제 지파인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들을 모집한거에요. 오늘 본문에는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2절에 보면요, 칼을 빼는 보병은 40만명이었다 기록합니다. 반면에 베냐민 지파는 몇명이었을까요? 15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에 칼을 빼는 사람은 2만 6천명이었다. 물매를 던지는 사람이 700명이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요,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파간의 어떤 욕심과 이익을 위한 다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전쟁의 발단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브아라는 성읍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죄악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밤새 집단적으로 능욕을 당하고 결국 새벽에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런 말도 안되는 죄악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뭐였냐면요,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요, 그래도 이 일의 원인과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듣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게 요구해요. 13절에 보면, 그 기브아 사람들, 이런 끔찍한 일을 일으킨 불량배들이 누구냐고 말이에요. 우리가 그들을 처단해야 겠다. 그들을 제거해서 이스라엘에서 악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자 하니깐 베냐민 지파가 그 불량배들을 넘겨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감싸고 도는거에요. 이스라엘 지파들의 말을 듣지 않는거죠. 뭐 나름대로 베냐민 지파의 상황도 이해가 되죠. 도대체 이렇게 까지 할만한 상황이냐는거에요. 그러면서 그 불량배들의 죄악을 덮고 지켜주려 했다는거죠.
여러분 불량배들은 어떻게 보면 베냐민 지파의 전체에 비하면 소수일지 몰라요, 그런데 그 개인의 죄악이요, 공동체가 함께 동의하고 묵인하는 순간, 그 죄는 베냐민 지파 전체의 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스라엘의 지파들은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냐면요,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시냐하는거에요.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요 이 죄라는 것을 결코 덮어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드러나야 하고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그 죄가 그저 덮여져 있다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죄는 더 퍼져나가고 더 깊어지고 이제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되는거에요. 마치 작은 병균이 온몸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죄는 덮어져 있고 감추어져 있다면, 그 죄는 잠깐은 감춰져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됩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도 보면요, 우리가 보기에 저게 진짜 죽을만한 죄인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어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죄입니까? 솔직히 그 행위가 남들에게 피해를 준겁니까?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휘두른거에요? 아니잖아요. 그냥 열매 하나 잘못먹은거에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몰랐다고 잘못먹었다고 어떻게 손이라도 입에 넣어서 그 먹은거 뱉어내면 되는 일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그 인간의 죄악은, 우리 눈에는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세상에 모든 것을 일그러뜨리는, 끔찍한 영향을 낳는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이 죄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로 대하고 계십니까? 삶을 살면 살수록 그런것 같아요. 이해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면과 이유가 존재하기에, 무엇을 하나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어렵긴 합니다. 그럼에도 안일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분명히 중립과 죄의 경계에 있는 것인줄, 아니면 명확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합리화를 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리거나, 다른 사람들도 다 한다.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명목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기는거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죄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요, 그 죄는 반드시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 죄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지요. 바늘 도둑이 뭐가 되요? 소도둑이 되는거에요. 작은 거짓말이 신뢰를 무너뜨리는겁니다. 그 작은 탐심이 욕심이 가정을 깨뜨립니다. 그 작은 타협이 결국은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죄를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과 같이 고통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의 죄악, 교만을 꺾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이죠. 마치 의사가 암 덩어리를 두고 그냥 두지 않고 매스를 들이대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고통이 꼭 모두 죄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날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는 부모의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모두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은요, 대부분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가 심었던 죄악의 열매나, 개인적인 죄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악의 영향이 다수라는 것을 역시 우리는 기억애햐 합니다. 특별히 성도가 당하는 징계와 고통은요,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시려는 목적이 아니라, 회복의 길로 이끄심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어떠한 작은 죄라도, 용납될 수도, 덮고 숨길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거나, 부끄러운 일이라면, 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죄의 열매와 징계 때문에 어려움의 터널을 지날지라도요, 그것이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고, 오늘도 그 죄를 주 앞에 내려놓고, 회개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요, 인간 공의의 한계와 실패입니다. 이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베냐민 지파 말고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요, 공의를 행한다는 목적, 죄악을 우리 공동체에서 끊어내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그리고요 자신들에 행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쭙기 까지 합니다. 본문 사사기 20: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죠, 이 전쟁에 대해서요, 그러니깐 하나님이 뭐라그러세요?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 이건 전쟁을 하라는거에요 말라는거에요. 하라는거죠. 40만명대 2만 6천명 이거 사실 상대가 안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건 뭔지 아세요? 첫날 전투에서 21절에 보면요, 베냐민 지파가 2만 2천명을 무찔렀습니다. 베냐민 지파 전체 군인이 2만 6천명인데, 그 사람들이 40만명과 싸워서 2만 2천명을 무찔렀대요. 이스라엘 다른 지파가 패배를 한거에요.
이게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이스라엘이 이겨야 되는거 아니에요? 숫자로 봐도 그렇고요, 명분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1차전쟁에서 큰 패배를 겪습니다. 23절에보면요 이스라엘 지파가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다시 나가서 싸워야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올라가서 치라. 두번째 전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25절에 보세요.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1만 8천명이 죽어나갑니다. 합쳐서 몇만명? 4만명이 죽었어요.
도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겁니까?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지파에게 패배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이스라엘이 군사력이 부족해서요? 아니면 이스라엘이 싸움을 못했고 베냐민 지파가 잘해서요? 아닌거죠. 이 사사기의 배경이 사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거잖아요. 지금 불량배들을 싸고 도는 베냐민이나, 이 베냐민 지파에게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행하겠다 하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나, 사실 크게 다른게 아니라는거에요. 기브아 불량배들의 죄는요 공개적으로 드러났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죄악은 뭐에요. 드러나지 않은 것 뿐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요. 각기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니깐 사람이 참 간사해요. 다른 사람의 죄악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요, 나에 대해서는 한 없이 자비롭고 합리화하는게 죄인들의 모습이라는거에요. 그들은 의로운 명분을 가지고 이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는 뭐가 있을까요? 에라 저 끔찍한 놈들, 에라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실은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아니면서, 그러한 마음과 생각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두번의 전쟁에서 그들에게 패배를 주신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너네가 옳다고 생각하냐? 너네는 잘하고 있냐? 너네 공동체 안에는 저런 죄악이 없냐? 음란하고, 다른 이웃을 대접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지파 안에서는 순종의 모습들이 있냐는 것을 질문하는거죠.
이 두번의 패배를 겪은 후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해요? 26절에 보면요, 모든 백성이 벧엘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려요, 이 모습이 뭐에요? 이 모습은요,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안거에요.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다시 싸워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깐 28절 올라가라 내가 내일은 네 손에 넘겨주지라 말씀하시는거에요.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면요, 이 이스라엘의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고 정죄합니다. 물론 공동체 안에서, 죄악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고요, 때로는 공적인 차원에서 징계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요, 나 역시 온전한 심판자가 되지 못하지만, 나 역시 불완전한 죄인임을 잊어버리는 교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기브아의 죄악은요, 사실 베냐민 지파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 이러한 죄들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있었죠. 그게 공적으로 드러난게 기브아 사람들의 모습인거죠. 이스라엘이 취해야될 태도는 죄에 대한 분노감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애통함, 나는 심판하는 사람, 저 사람은 심판 받아야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과, 나 역시 그 비참한 죄의 영향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통회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러한 겸손한 마음이 늘 필요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늘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의 원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자유한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요, 늘 뭐만하면 배우자 탓을 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왜 당신이 그렇게 해서 애들이 저렇잖아. 아내 탓을 하는거죠. 아내는 누구탓을 해요? 남편 탓을 하는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다 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입장을 바꿔보세요. 나 때문에 저 사람은 안힘들까요? 실은 내 안의 죄야말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씨앗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있는 공동체는 그런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라 할지라도, 그 죄를 나의 죄로 품을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가 소망이 있는거에요.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그 죄가,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함께 우리 공동체를 품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사기 20장의 전쟁은요 단순히 한 지파를 심판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다루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자비로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베냐민 지파는요 결국 마지막 세번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2만 6천명중에 2만 5천명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600명의 사람만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 지파에서 이만큼 많은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요, 그 지파는 거의 전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이후에 보면 존속되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되 결코 멸망이 그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베냐민과 같은 죄인입니다. 또 우리는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 처럼 자기 의에 빠져 사는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로는요, 결코 이 땅에 참된 공의도, 참된 자비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공의와 자신의 참된 사랑을 이 땅에 실현시키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요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사랑이 성취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의 심판을 완전히 그분의 몸에 짊어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받아야 될 그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는, 완전한 사랑이 실현되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날마다 서야 합니다.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시금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인생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삶이 아니라, 내 의를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남은 한주간의 삶도, 십자가에서 공의와 자비를 완성하신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통성기도 인도 멘트

1)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게 하소서

오늘 말씀에서 기브아 성읍의 죄악은 단순히 한 사람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그 죄를 묵인하고 덮어버린 순간,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결코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덮어두면 반드시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드러내고 다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죄라고 합리화하거나, “다들 그렇게 사니 괜찮다”는 이유로 넘어가 버리면, 결국 그것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작은 거짓이 신뢰를 무너뜨리고, 작은 탐심이 가정을 깨뜨리며, 작은 타협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죄를 드러내시고, 때로는 징계와 아픔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숨긴 죄를 주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 욕심, 타협, 관계 속의 상처와 미움까지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내시고 회개할 용기를 주옵소서.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즉시 끊고 돌이키게 하옵소서.
징계와 아픔 속에서도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살리시려는 은혜임을 믿게 하옵소서.
다 함께 “주여, 제 죄를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소서!” 고백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2) 자기 의를 꺾고 참된 왕 앞에 무릎 꿇게 하소서

이스라엘은 옳은 명분을 가지고 전쟁에 나섰습니다. 기브아의 죄를 심판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자기 분노와 자기 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이나 그들을 패배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벧엘에 올라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면서, 나는 의로운 척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저 사람이 문제다”라는 말은 쉽게 하면서, 정작 내 안의 교만과 욕심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 나 역시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고, 참된 왕이신 예수 앞에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다시 세워 주십니다.
주님, 남을 정죄하면서 의로운 척 살았던 교만을 용서하옵소서.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남의 티만 보던 눈을 고치시고, 겸손히 내 죄를 먼저 회개하게 하옵소서.
내 삶의 왕좌에서 내려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된 왕으로 모시게 하옵소서.
함께 “주여, 제 삶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고백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3) 교회와 가정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와 다가올 사역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사기 20장의 결론처럼,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자비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회복과 부흥입니다.
우리 교회가 공의와 자비가 함께 흐르는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정죄보다 회개가, 분열보다 화해와 연합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10월 추석 명절에 가족을 만날 때, 불편한 관계가 화해로 바뀌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리게 하옵소서. 믿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11월 새생명축제 위에 성령의 역사를 더하셔서, 초청된 영혼들이 말씀과 간증을 통해 회개와 결신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준비하는 모든 손길 위에 지혜와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연약한 지체들, 질병 중에 있는 이들, 믿음이 흔들린 이들을 붙잡아 주시고, 다음 세대와 가정을 세워 주옵소서.
이제 다 함께 우리 교회와 가정, 나라와 민족,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품고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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