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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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가 312, 421장
오늘은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 에 대해서 다루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애도하는 방식부터 결혼까지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다루고 있을까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인, 연예인, 유명인에게는 평범한 사람보다 더 까다로운 도덕 기준이 적용되죠. 왜일까요? 그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더 나아서가 아니라, 영향력과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이크와 카메라에 가까이 선 사람의 한 마디, 한 행동이 훨씬 영향력있고, 멀리 파문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실수라도 공적 신뢰를 흔드는 무게가 다릅니다.
레위기 21장이 말하는 제사장이 바로 그런 자리예요. 제사장은 다른 백성보다 더 거룩한 ‘종족’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더 가까이 서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더 촘촘한 경계가 필요한 겁니다. 임재에 가까울수록 기준이 높아지는 것—제사장을 억압하거나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지키는 보호 장치예요. 그래서 제사장들만을 위한 규례를 주신 목적은 보호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가 구약의 말씀을 보지만, 사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르셨어요. 이미 저희가 그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오늘의 교회, 그리스도인으로서—우리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세상 한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희입니다. 그래서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신중한 말, 더 투명한 관계, 더 질서 있는 사랑이 저희에게도 요청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사장의 규례를 통해 거룩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추는 창(1–6, 10-12)
하나님의 이름을 비추는 창(1–6, 10-12)
말씀은 이렇게 시작해요. “제사장들은 죽은자로/시체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21:1).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 아래(창 3), 제단 섬김 직전에 그 부정의 기운을 임재 공간으로 들이지 않도록 경계를 세우신 거죠. 그래서 평소엔 시체 접촉을 금하지만, 가장 가까운 친족에 대해서만 애도의 예외를 허락하십니다(21:2–3). 그 경우에도 정결해질 때까지 성소에 가까이하지 않는 질서를 지켜야 했어요(민 19장 배경).
4절은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너는 백성의 우두머리이니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대표성 때문에 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5절의 애도 규정도 분명합니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머리를 훼손하거나, 수염 가장자리를 깎거나, 살을 베는 이방 종교에서 애도하는 행동을 금하십니다. 슬픔을 금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정의 진실과 예배의 정체성을함께 지키라는 요청입니다.
대제사장에게는 추가로 규례가 붙는데 10-12절보면 관유로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머리 풀거나 옷 찢는 애도 금하고, 어떠한 시체도 접촉 금지하는데 부모라도 예외 없었습니다. 더 나가서 성소에서 떠나지 말고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가족이 죽어서 애도하는 어찌보면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까지 말씀을 하셨나면
6절에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여기서 “욕되게 하다”(힐렐)는 거룩한 것을 속되게/세속화하다는 뜻이고, “이름”(쉠)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명예·평판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도 “자식은 부모의 얼굴”이라 하고, “부모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라고 하잖아요.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추는 창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도 그 영향력과 무게가 달라요. 하나님의 이름/얼굴에 먹칠하지 마라—21:6이 문장이 제사장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모습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이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할 때 내 삶은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비추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권을 맡겨 주신 분 앞에서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으로 서야합니다. 임재에 가까울수록 사랑은 더 질서 있게, 삶은 더 거룩하게 빚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혼인 규정, 그때와 지금 (7–9, 13–15)
혼인 규정, 그때와 지금 (7–9, 13–15)
먼저 본문을 짚어요 (주해)
먼저 본문을 짚어요 (주해)
그다음에는 제사장의 결혼에 대한 규정을 장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비추는 창이 되듯이 제사장의 결혼도 공적인 신뢰가 바탕이 되는 토대위에서 이뤄집니다.
7절은 제사장의 혼인 대상을 제한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제한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인데 제단에 대한 공적 신뢰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21:6, 8)이기 때문에, 관계에서도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질서가 요구받았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 “너는 그를 거룩히여기라x2”(21:8)는, 제사장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제사장을 거룩히 대우할 책임이 있음을 함께 말합니다.
이어지는 9절도 제사장의 딸이 행음할 때 “아버지를 속되게(욕되)” 한다고 진술도 같은 맥락에서 제사장 가정의 일탈이 곧 제단의 신뢰를 훼손한다는 인식입니다.
더 나가서 대제사장은 13–15에 혼인에서는“자기 백성 중 ‘처녀’(בְּתוּלָה, 베툴라)”랑만 결혼해야 하고, 과부·이혼녀·창녀 모두를 금지(21:13–14)합니다. 대제사장이 매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드나드는 직무(21:10–12)를 맡았기에 더 높은 경계가 주어지는데 15절에 “그의 자손이 속되게 하지 말라”(21:15)는 말이 혈통 우월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후대 제사 직무에 대한 공적 신뢰를 지키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실 대제사장은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전통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기름부음 받음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선지자 이신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이후에는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레위기에서 대제사장에 대한 높은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그때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그리고 좀더 당시 사회를 이해해 보자면 가문·혈통 중심이었고,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공적 동맹이었습니다. 개인의 일탈이 곧 가문의 명예와 직무 신뢰로 번지던 명예/수치 문화였지요. 또 당시 가나안 풍습에는 종교적 성행위가 얽힌 요소들이 있었기에, 위에서만 보더라도 애도가운데에서, 일상의 풍습가운데에서 이방종교의 모습을 버리고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경계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월하나 이런걸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백성이기 때문에 언약을 지키고, 말씀을 거룩하게 지켜나아갈 뚜렷한 선/경계선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들이 그 시대 방식으로 제사장직의 공적 신뢰를 보호하려는 제도적 울타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을까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을까
그래서 오늘 날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저희가 지금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번죄,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로 죄를 용서받지 않지만 형식은 복제하지는 않지만, 원리를 이어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 규례는 성취되었고(히 7–10장),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습니다(벧전 2:9).
임재에 가까울수록 사랑은 더 질서 있고, 관계는 더 투명하게 이뤄집니다.
거룩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권을 맡기신 분 앞에서 책임지는 공적인 신뢰를 가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있는 저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표상성과 포용, 그때와 지금 (레 21:16–24)
표상성과 포용, 그때와 지금 (레 21:16–24)
마지막으로 17절부터 아론 자손 중에“흠(מום, 몸)”이 있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러 가까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제단 봉사를 할 수 없는거죠.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등 의식상 결격 사유를 포괄합니다. 이것은 도덕 판단이 아니라 예식(의전)의 상징성을 보호하려는 제한입니다.
22절을 보면
레위기 21:22
그러나 그는 “지성물이든 성물이든 먹을지니라.”라고 하면서 신분과 생계는 그대로 보장됩니다. 직무 제한되지만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징성은 보호하지만 동시에 레위기는 사회적 안전망을 함께 둡니다. 흠 있는 제사장은 제사장 신분을 유지하고 성물로 양육받습니다(21:22). 대표 직무는 구분되지만 존엄과 돌봄은 동등하게 이줘집니다. 의식의 상징성 보호와 사람 보호를 함께 붙든 제도적 울타리가 오늘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23절에 다만 휘장(성소) 안과 제단에는 가까이하지 말라—“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라고 하시면서 모세가 이 규례를 아론과 아들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공포합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의 말과 선택, 우리의 관계와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비추고 있나?”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사람이라서 관계에도 신뢰의 질서가 필요했고, 대제사장은 임재에 가장 가까이 서는 자리라서 더 촘촘한 경계, 높은 수준의 거룩을 지켰지요. 그건 억압이나/너만 특별하나는 구별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을 살리는 보호장치였습니다.
또 하나님은 흠 있는 제사장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성물이든 성물이든 먹을지니라.” 직무는 구분되지만 존엄은 똑같다는 뜻이에요. 상징성은 지키고, 사람은 품는 것—이게 레위기의 방향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임재에 가까울수록 사랑은 더 질서 있게, 관계는 더 투명하게, 말과 습관은 더 거룩하게 나아가야니다. 오늘이 개천절 이지만 아마 추석명절을 지키려고 오늘 부터 분주하게 움직일텐데, 가족들 하고 모일떄 작은 선택 하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밝히는 창이다 생각하시면서 복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레위기가 거룩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처럼 , 이번 추석, 우리의 가정과 오가는 길과 식탁 위의 사랑이 거룩을 지키며 나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비춰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의 말과 습관으로 주의 이름을 흐리게 한 일들이 있다면 이시간 용성해주시고, 다시금 거룩한 하나님 앞에 촛점을 맞춰 나아가는 거룩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배 앞에서 분주함을 내려놓고 마음을 맞추게 하시며, 예배의 경계를 정직과 거룩으로 세우게 하옵소서.
곧 맞을 추석에 오고 가는 길을 지켜 주시고, 각 가정의 식탁 위에 화평을 허락하여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이 주님의 얼굴을 비추는 창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거룩함을 들어내는 시간되게 이끌어주옵소서.
가족들과 함께할 때에도 화목과 사랑, 거룩의 열매가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작은 성소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걸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거룩 가운데 이끌실 주님을 의지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