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팔지꼰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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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팔지꼰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본문: 역대하 18장 1-27절
[서론]
가끔 저는 아내와 함께 ‘결혼숙려캠프’라는 TV프로그램을 볼때가 있습니다.
결혼의 위기에 처한 부부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어 때로는 목회적으로 많은 통찰을 얻기도 합니다.
요즘 그 프로그램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장훈씨가 종종 사용하는 ‘지팔지꼰’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았다’는 의미입니다.
결혼 전에 이미 상대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여러 경고 신호들이 있었지만 스스로 무시하고 선택해 결국 파국을 맞게 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인들으로서 ‘팔자’라는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을 설명하기에 이처럼 적절한 표현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남유다의 선한왕 여호사밧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매우 보기 드문 신실하고 선한 왕입니다.
역대하 17장을 보면 그가 했던 일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우상의 제단들을 제거하고, 각 성읍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파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셔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심지어 수많은 이방나라들이 조공을 바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실하던 여호사밧이 믿음에서 넘어지는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아합이 함께하자는 전쟁에 참여하다가 거의 죽을 뻔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신실했던 그를 넘어지게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여호사밧의 실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지팔지꼰’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을까요?
[본론]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연한 만남도 있고, 때로는 이해관계로 얽힌 만남도 있습니다.
이해관계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선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국가간의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를 보십시오.
예전에는 서로의 우호관계를 기대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냉혹한 현실만 남아 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면 어떻게 될까요?
낭패를 보기 마련입니다.
얼마전 미국 이민국이 우리나라 근로자들을 체포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도, 자신들의 이해관계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해관계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다왕 여호사밧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사밧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큰 영예를 얻었다. 그는 아합가문과 혼인의 유대를 맺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대목이 있습니다.
두 문장이 서로 어색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두 문장 사이에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접속사가 존재합니다.
개역개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성경은 이 접속사를 ‘그리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든, ‘그러나’든 결과는 같습니다.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왕과 혼인관계를 맺습니다.
아합의 딸 아달랴와 자신의 아들을 혼인시킨 것입니다.
아합도 가장 악한 왕이지만 그의 아내 이세벨도 성경에서 가장 악녀입니다.
분명 딸도 마찬가지일텐데 여호사밧이 혼인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결국 1절은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받은 부와 영예가 어느 순간 그를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어 갔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가 왜 이런 잘못된 선택을 했을까요?
처음에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라가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합과의 동맹으로 다른 강력한 보험 하나를 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때문에 오히려 교만해져 그의 분별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미 사돈관계가 되었기에 여호사밧은 아합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3절입니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 전쟁에 함께 나가자고 하자, 여호사밧이 곧바로 동의해 버립니다.
동의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당신과 같고, 내 군대도 당신 군대와 같다”는 아부성 말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던 신앙의 원칙은 사라지고 동맹관계가 우선이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동의하기 전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께 묻던 왕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섣부른 답변을 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교만해지자 그의 분별력은 흐려졌고, 자신의 성공과 관계를 지키기 위해 신앙의 원칙을 타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질까봐, 손해 볼까봐 두려워 중요한 신앙의 원칙을 타협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매이야기입니다.
분명히 결혼 전에는 남편이 아내가 교회 다니는 거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남편이 주일날만 되면 같이 놀러가자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질까봐 몇 번 남편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일예배가 무너지고, 신앙도 점점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자매가 죽어도 주일날 교회는 가야한다고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면 어땠을까요?
그 당시에는 남편과 다투고 힘들었겠지만, 결국 남편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원칙이 쉽게 흔들리니, 결국 더 큰 손해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 본론]
그런데 여호사밧이 중대한 실수를 한 데에는 단순히 아합과의 동맹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돌이킬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일말의 신앙양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아합왕의 제안에 이미 동의를 했으면서도 조건을 하나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자는 것입니다.
이는 겉보기에는 신앙적인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정말로 알고자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결정을 내린 뒤에 마음 속에 남아있는 찝찝함을 덜어내려 한 것일까요?
우리도 이미 스스로 결정한 후에 단지 찝찝함을 없애려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여호사밧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아합왕은 곧장 예언자 400명을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전쟁에 나가면 무조건 승리한다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400명일까요?
아합은 압도적인 숫자로 여호사밧이 반박할수 없도록 그의 마음을 확실히 붙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400명이 하나같이 모두 거짓 예언자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직 아합왕이 듣고싶은 말만 할 뿐입니다.
여호사밧은 이쯤에서 멈출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던지 다른 예언자를 찾습니다.
그때 아합이 언급한 사람이 바로 미가야 예언자입니다.
아합은 그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늘 불편한 진실, 즉 왕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안 좋은 말만 했다는 것으로 볼때 아합왕이 얼마나 악한 왕인지 알수 있습니다.
동시에 미가야가 하나님의 참 예언자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사밧은 미가야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돌이킬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놀랍게도 미가야 역시 400명의 예언자들과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이 전쟁을 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만 말하는 미가야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미가야는 아합왕과 예언자들을 조롱하는 것이거나 자포자기한 것일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듣고 싶은 말이 이거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럼 나도 해줄께.”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아합왕의 반응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가야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진실을 말하라고 화를 내며 다그칩니다.
평소와 달리 왕에게 유리한 대답을 하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미가야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17절입니다.
전쟁에서 패해 아합왕은 죽고 백성들은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거짓말하면 거짓말한다고 뭐라하고, 참말 하면 참말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듣고싶은 말을 듣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에게서 원하는 게 이런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럼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여호사밧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는 아합왕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하는 선택을 합니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다수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400명 대 1명, 압도적인 비율이기에 자신의 결정을 그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단 한명의 소수의견이 진리일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면 진리를 깨달았지만 다수의 압력에 굴복한 것일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수의 목소리가 옳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괜찮다고 말하면, 우리도 쉽게 동조하고 따라가게 됩니다.
예전에 방송에서 본 실험이 있습니다.
6명의 연기자가 있는 방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한 사람을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한 개의 막대를 보여주며 그 막대 길이와 같은 막대를 세 개의 보기중에 고르게 합니다.
눈으로 비교하면 쉽게 알수 있어 유치원생도 풀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5명의 연기자들이 자꾸 틀린 답을 말합니다.
그러자 시간이 점점 갈수록 그 한 사람도 결국 틀린 답을 말합니다.
무려 7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동조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답을 알지만 다수의 압력에 휘둘려 잘못된 답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실험이 솔로몬 애쉬의 동조화 실험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수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온 세상이 한 목소리로 이 길이 옳다고 말할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우리는 용기있게 ‘아니요’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붙드는 용기있는 소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호사밧보다 더 나을까요?
우리도 관계가 틀어질까봐, 손해볼까봐 신앙의 원칙을 저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수의 함정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여호사밧보다 더 약하고 더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결말을 보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실수를 했지만 실패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의 잘못을 꾸짖으셨지만, 그가 부르짖자 그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 후 여호사밧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말씀으로 백성을 일으키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실수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실수로 죽을 뻔 했지만,
예순미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위기 속에서 부릊지자 하나님이 건져 주셨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으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은 버림받으셨습니다.
여호사밧이 자신의 잘못으로 ‘지팔지꼰’의 길을 걸었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꼬여버린 팔자를 십자가에서 풀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망가뜨린 길을 대신 걸으시고,
우리가 깨뜨린 관계를 대신 회복하시고,
우리가 망쳐버린 인생을 대신 바로 세워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넘어졌을 지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부르짖을때,
그 분은 여호사밧을 건지신 하나님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크신 은혜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혹시 넘어졌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다시 일어설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함께걷는 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