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한 맹세와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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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21:1-15
본문 : 사사기 21:1-15
제목 : 경솔한 맹세와 하나님의 은혜
제목 : 경솔한 맹세와 하나님의 은혜
찬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찬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오늘은 ‘경솔한 맹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예수님처럼 삽시다” 이제 10월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2025년 한 해도 3개월정도 남았는데, 남은 한 해도, 예수님을 닮아, 그분의 삶의 방식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요, “이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특별히 이 부분에 굉장히 강화되어있습니다. 아직도 어려서부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갑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 아이가 세상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애를 쓰며 교육을 합니다. 학창시절에는요, 공부를 잘하면 인정받습니다. 공부가 그 시절에는 강함이 되어집니다. 공부잘하면요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습니다. 선생님에게도 인정 받아요, 부모에게도 다른 학부모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어떤 인간의 됨됨이 보다는, 그 시절의 능력과 업적이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려는 모습이 강합니다. 일터를 나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성과나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 같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물론 사람 개개인의 노력의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참 많은 부분은 타고난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능력 때문에 어느 영역이든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 보여지는 영역 중 하나는 바로, 스포츠 분야입니다. 그곳은 말그대로 치열한 경쟁의 연속입니다. 축구계에서 누구나 다 손흥민처럼 업계 탑이 되고 싶지만, 현실과 그들이 마주하는 생태계는 아주 냉혹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재능, 그리고 그것을 받쳐줄 부모의 재력이나 인맥, 개개인이 가진 힘과 기술, 이것이 받쳐주는 사람만이 살아남고 약한 사람은 결국 밀려나고 도태되고 맙니다.
요즘 참 이 나라의 경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요, 경제가 어려워지면 누구부터 힘들어질까요? 가진자들은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 일용직 노동자들,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립니다. 이 사회의 시스템은 겉으로는 모두를 보호한다고 애를 쓰지만, 실제로는 힘 있는 사람, 목소리 낼 수 있는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세상의 방식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힘없는 약자들입니다. 경쟁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뒤쳐지고, 밀려난 사람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보호해 줄 배경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가장 먼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은, 무기를 든 군인이 아니라, 아무런 힘 없는 민간이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은 가장 쉽게 생명을 잃게 되고요, 가장 빨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과도한 경쟁구도의 사회와, 더 주목해야 될 인간 자체의 존엄성과,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과, 강자와 약자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과 태도가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어디에나 강자와 약자는 존재합니다. 높은 자와 낮은 자 역시 존재해요. 왜냐하면 이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가치는 세상의 방식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나라가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요,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다시금 점검하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저와 살펴볼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 들어섰습니다. 21장의 내용이죠. 지난 주 말씀의 간략한 내용을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한 레위 사람의 첩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 성에서 잔혹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레위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그 첩의 시체를 가져가, 지파의 수대로 사체를 분리 한 뒤 보냈죠. 이 소식을 받아든 각 지파들은 분노하여 모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날 수 있냐면서, 군사를 모아서, 베냐민 지파를 치게 됩니다. 결국 몇번의 전투 끝에, 베냐민 지파는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는 원래 2만 6천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600명의 사람들만 남게 되어집니다. 심지어 20장 48절에 보면요, 이스라엘 온 지파의 군사들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들어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모조리 다 칼날로 칩니다. 성읍들은 전부다 불살라 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면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남녀노소, 남자 여자, 어린 아이 노인 모두 다 죽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광야로 도망치게 되게 되었습니다.
21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이 일로 인하여 전쟁 때문에 미스바에서 함께 모였을 때에, 맹세한게 있었다는 거에요. 그건 뭐냐면, 어떤 지파라도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시집 보내지 말기로 맹세를 했대요. 그러니깐 전쟁을 준비하면서 서로 그런거죠, 우리가 완전히 베냐민 사람들을 없애버릴 건데, 그 이후에 생존자가 있더라도 절대로 그들에게 아내를 주지 말아라. 이 말은 완전히 멸절시키자라는 약속을 서로 했다는거에요. 그런데 어이없는건 뭐냐면, 자신들이 이미 거의 다 전멸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니깐, 모여서 그러는게요, 2절 3절 보면요, 막 서로 슬퍼하면서 웁니다. 3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사사기 21: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그들이 슬퍼한 이유가 뭐에요?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일을 계획했을 때는 몰랐을까요? 자기들이 없애자고 해놓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12지파가 이스라엘에서 갖는 의미는 누구보다 컸고, 그 사실이 이제 자신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거죠. 그들이 이 12지파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큰 자부심과,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라는 자신들만의 민족성이 있었는데, 베냐민 지파로 인하여 이것이 깨어질 위험에 놓였다는거죠. 그러니깐 미스바에서 모여서 한 그 맹세가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였는지 알게되는거에요.
또 한 가지 볼 수 있는 부분은요, 이 문제를 가지고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하소연 하고 있어요. 이 내용을 읽어보면요, 자신들이 하나님께 물어 맹세한 것도 아니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일이 생기게 했습니까, 그래서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냐면서요, 마치 하나님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이 말하고 있다는거에요. 그들은 이 문제의 원인을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들이 생각해 낸 대안이 뭐냐면 5절에 보면요, 또 한가지 전쟁을 치루기 전에 함께 미스바에 모여서 맹세한 게 있대요. 그게 뭐냐면, 지금 이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죄악을 끊어버리기 위해 모든 지파가 모였는데, 여기에 오지 않은 지파는 반드시 죽이겠다 서로 맹세를 했다는거에요. 그러니깐 어떤 지파는 뭘 베냐민 지파를 치기 위해 모이냐라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지파도 있었겠죠. 그런 지파를 반드시 죽이겠다 나머지 지파들이 약속을 했다는거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깐 미스바 총회 때 안온 지파가 있었던 거에요, 엄밀히 말하면 성읍인데요, 그 성읍이 바로 야베스 길르앗입니다. 그 쪽 성읍에서는 총회 때 한명도 대표로 참여하지 않았다는거에요. 그래서 지금 회의 중에 그런거에요. 거기에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읍을 쳐서 다 죽이라는거죠. 그리고 한 가지 단서를 답니다. 대신 처녀 즉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400명을 살려서 돌아옵니다. 이유는요? 베냐민 지파 600명의 사람들한테 아내로 주겠다는거에요. 그래서 그 성읍 사람들을 모조리 다 없앱니다. 이 처녀 400명만 빼고 말이지요. 그런데요 베냐민 사람들이 몇명이에요? 600명이죠, 그럼 몇명 부족해요 200명 부족하잖아요, 뒤에 내용에 보면요 19절부터 곧 명절이 오는데, 명절 때, 실로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을 강제로 납치해서 200명의 숫자를 채웁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건 무엇일까요? 이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아 보이는 대로 결정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한 맹세는 뭐에요? 뭐 도대체 누구좋으라고 한 맹세인지도 모르겠어요. 맹세도 지켜요 안지켜요? 안지키죠. 그리고 또 하나의 맹세는 지키는 것처럼 하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자신들의 베냐민 지파를 살리겠다는 명분 아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을 얼마나 자주 경험합니까?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말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린 선택 때문에 후회하며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보기엔 옳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길이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안타까운 열매들을 맛보게 되는 일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든지 일어나게 됨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어떨 때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있지 않을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너무나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져서요, 말씀 앞에 깨어있지 않으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무엇이 맞는지 그른지도 알지 못한채, 자기합리화의 유혹에 빠지고요, 마치 내 경험과 내 지혜에 근거 없는 확신을 얻고 행동하고 범죄하게 되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요, 끊임없이 의심하세요. 뭘 의심하냐 하나님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요. 나 자신을 의심하세요. 내가 결정한 그 뜻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어리석은 자기 합리화에 의한 결정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말씀으로 분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 어떻게 해요? 이 이스라엘의 모습처럼요,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는 결정을 해버리게 된다는거에요.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그 일을 무마 시키고 덮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양 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따르며,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 길로 향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이러한 삶이 아니길 바랍니다. 어떠한 결정이라도, 주님 말씀 앞에, 내어 놓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그것에 순종하여 이 땅에 비극을 낳는 인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들을 남기는 우리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부분은요, 20장부터 이어지는 이 끔찍한 죄악의 모습을 보면요, 전형적으로 희생자는 누구로 등장하냐면요,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레위 사람의 첩이 죽었을 때도 보면요, 물론 그 첩이 간음한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지만요, 그 여인의 비참한 희생을 통하여 이 비극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희생되요? 먼저는 베냐민 지파의 주민들이 희생됩니다. 뭐 자신들이 그 불량배들을 감추어주고자 모든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결정했을까요? 아니겠죠. 지도자들, 아니면 불량배들의 인맥이 고위층과 닿아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됐곤 소수의 결정으로 인하여, 약자들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들은, 이 베냐민 지파를 살릴려는 명목으로 인하여, 누구를 희생시켜요? 길르앗 야베스 성읍 사람들을 희생시키고요, 거기에 400명 처녀들을 베냐민 지파 남은 사람들의 아내로 주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누구를 더 동원시켜요? 실로에서 봉사하는 200명의 여인들을 납치해서 억지로 아내로 삼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만든 결국의 해결책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묻고 받은 지혜가 아니라요, 결국은 힘없는 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낸 거짓된 질서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약한 자가 희생양이 됩니다. 이 사사기 시대 때의 대표적인 약자는 바로 여성들입니다. 기득권, 즉 권력을 가진 자들이 결정한 결과는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떠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 누가 죽습니까? 그것을 결정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민간인이,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장병들이, 그리고 힘없는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이 가장 먼저 희생됩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누가 먼저 무너집니까? 가진 자가 아니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경제적 약자들이 먼저 쓰러집니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이 세상의 질서는 이처럼, 약한 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세워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문제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요 여전히 약자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모습이 있다면요, 그것이 세상의 방식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위해서 약한자와 낮은자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요, 우리는 그래요, 저 사람이 약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저 사람이 노력을 안해서다. 저 사람이 실패한 이유는 저 사람에게 있다. 정말로 그럴까요? 과연 그럴까요? 과연 정말로 그게 하나님 나라의 방식일까요? 물론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또 이것과, 약자들이 자신들이 대접받아야 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무리한 요구를 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끊임없는 이런 질문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를 위한 약자의 희생이 당연시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강자이면서 약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자와 약한자는 대부분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로 나이로만 예를 들어보아도요, 아직도 장유유서가 중요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요, 나보다 동생이 있고, 나보다 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입니다. 가정에서의 위치, 교회에서의 위치, 사회에서의 위치,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위치는 다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는거에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세워줘야 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줘야되고요, 약한 부분을 채워줘야 하는거에요. 우리 중에 완전히 강한 자가 있습니까? 인간이라는게 그래요, 내가 강한 부분이 있지만, 어떤 부분은 약해요, 어떤 사람은요, 약한 사람인 것 같지만요, 어떤 부분에서 강한거에요.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고 보완해주는 사람들이지, 내가 강하다고,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깔보거나 무시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 되고 싶은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아래에 두고 그 권세를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의 목적은 그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요구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 아들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그러니깐, 예수님이 그래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 말이 뭐에요? 너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하는데. 그에 따른 책임을 너희가 질 수 있냐 질문하시는거에요. 예수님은 그 높은 자리에 대해 언급할 때, 무엇을 먼저 꺼내냐면요, 높은 자리가 누릴 권세, 높은 자리가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 자랑할만한 것, 그것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그 높은 자리에서 해야 될 책임, 즉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줘야 되고, 더 많이 권세를 누릴 수록,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하는 책임먼저 이야기하시는거죠.
여러분 강한 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저는 되도록 우리 교회에 강한 사람이 많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강한 자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더 많이 주시고, 나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강한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식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상의 이해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늘 그것을 기대했어요. 예수님이 세상에 가장 강한 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게 예수님 밑에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 예수님을 섬기고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아래에 두는 강한 사람이 되겠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 가장 권세 있는 자였는데, 그분이 이 땅에서 취할 영광은 사실 없으세요.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약한 자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그 사랑, 그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다 내어주면, 난 끝나는게 아닐까? 내가 강한 자인데 내가 섬기면 오히려 내가 무시받고 받는 사람이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건 아닐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그 방식을 택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희생과 사랑을 몰라줘도요, 그것을 받는 사람은 그 은혜를 때로는 몰라버리고 당연시 하더라도요 하나님은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사기 마지막 구절은 여지없이 이렇게 끝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저와 여러분들은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에 모시어, 예수님 뜻대로, 약자를 희생양 삼는 인생이 아니라, 약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장 큰 사람, 가장 으뜸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첫 번째 기도 – 경솔한 맹세와 자기 소견대로 행한 죄를 돌아보며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맹세하고,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모순과 죄악을 낳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희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 뜻대로 결정하고,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후회와 눈물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교만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게 하시고, 어떤 작은 결정이라도 말씀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 이 제목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 두 번째 기도 –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세상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2. 두 번째 기도 –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세상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주님, 이스라엘이 문제를 해결한다며 결국 길르앗 야베스의 여인들과 실로의 여인들을 희생시킨 모습을 보았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늘 희생되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도 약자를 무시하거나 희생양 삼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임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강한 부분으로 약한 자를 세워주고 도와주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가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본받아 살아가게 하옵소서.”
→ 이 제목으로 기도하겠습니다.
3. 세 번째 기도 – 나라와 교회, 명절과 새생명 축제를 위하여
3. 세 번째 기도 – 나라와 교회, 명절과 새생명 축제를 위하여
“하나님,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대한민국이 자기 소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들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말씀의 가치 위에 서게 하시고, 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우리의 가정마다 화목과 믿음의 대화가 넘치게 하시고, 흩어진 가족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옵소서.
또한 준비되는 새생명 축제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 이 제목으로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