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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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길 그의 영광스러운 전능함으로 모든 견딤과 기다림을 기쁨으로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길 그의 영광스러운 전능함으로 모든 견딤과 기다림을 기쁨으로
주님의 영광의 전능함을 힘입어 모든 능력으로 강해지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기다림을 힘입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영광의 전능함을 힘입어 모든 능력으로 강해지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기다림을 힘입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임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계획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의 삶은, 즉 거룩히 구별된 성도의 삶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이 아닙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혼자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주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힘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를 겪는 이유가 이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성령님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성령님의 힘과 능력이 나의 삶을 완전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 주님께서 너는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니? 하고 물어보시면,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답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현실 속에 살고 있었지만, 성령님께서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끝까지 견디고 기다릴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힘을 두가지 단어로 분리했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힘은 두나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힘은 크라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두나미스는 폭발적인 힘을 의미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잠재적인 능력입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그 가능성에 완전히 다다르지 않았거나 측정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크라토스는 지배력입니다. 통치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속에 임하여 각각 능력이 온전히 발휘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내 삶에 임하여 그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을 움직이게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피곤하고 어려운 이유는 내가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며 여러분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시는 빛 안에서 성도들의 유산을 상속할
아버지께 감사하며 여러분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시는 빛 안에서 성도들의 유산을 상속할
빛 안에서 성도들에게 예비된 풍성함을 여러분들께도 허락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빛 안에서 성도들에게 예비된 풍성함을 여러분들께도 허락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어렵고 삶은 힘들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이 세상을 근근히 살아가라고 잘 버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을 수 있는 풍성함을 경험하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풍성함도 있지만, 지금 살면서도 누릴 수 있는 풍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사용한 클리로스라는 단어는 유언장에 기록된 특정한 상속분을 말합니다. 내가 받을 몫이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그것을 줄 당사자가 죽어야 효력이 발휘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죽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왜 이런 단어와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요? 이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죽어야 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이유입니다. 그 비밀이 성경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약속되고 예비된 풍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도 우리는 모르고 그것을 받을 시기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성경 안에 그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사람만이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외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는 우리를 어둠의 지배에서 구원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어둠의 지배에서 구원하시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우리가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었던 곳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지배권에서 빼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의 지배권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어둠의 세력을 무너뜨리시고 우리를 빛의 영역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위대하고 십자가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요즘 비슷한 상황을 현실에서도 봅니다. 제가 미국으로 올 때 비자를 받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미국으로 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문이 닫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의 왕국은 결코 갈 수 없는 문이 닫힌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 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하십니다. 그 왕국으로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왕국으로 들어왔고 이제 빛의 영역에서 그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만, 천국은 죽어서 가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완전한 이주는 우리가 육신을 벗을 때입니다만, 지금도 우리는 분명히 그분의 나라와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그 백성으로 누려야할 특권과 풍성함을 찾아야 합니다. 그 비밀이 성경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누리고 모르는 사람은 못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죄를 사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죄를 사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인 아폴리트로시스는 대가를 지불하고 완전하게 자유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첫째는 값이 매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값을 정한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사단이나 마귀가 그 값을 정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정하셨습니다. 창세기를 보시면 아담은 그 값을 정한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행동을 했고 그래서 그 값이 온전히 인류에게 유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값을 지불하실 분은 온전히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하신 것입니다. 그 값을 매길 때부터 그럴 위험성이 있고 그 대가를 당신이 지불하셔야 할 것도 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잘못도 아닌데 그리고 그 위험성을 다 알고 계신 분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루신 것인데,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하냐고, 우리는 피해자일 뿐인데 라고 말입니다. 자 그러면 말입니다. 난 아무 잘못이 없는데 부모의 죄 때문에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에게 유죄를 때린 법관이 내 대신 감옥살이를 할테니 나를 풀어주라고 했다면 나는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요? 그 법관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법에 의해 나를 가두었고 그래서 내 대신 옥살이를 자청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일까요? 그런데 문제는 옥살이가 아닌 내 목숨이 그 댓가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매겨진 값은 생명이었습니다. 억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해야 하는데, 그것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물론 병주고 약주고 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제 다시 아담이 선택하는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몫은 내게 있습니다.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값을 치루신 것이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그분의 나라의 풍성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내 억울함과 속박을 풀어주시는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를 원래 아담의 위치로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원래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풍성함을 누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의 선택 때문에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값이 내 목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내 선택으로 나와 내 후손에게 그 값이 매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핑계를 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상황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함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