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도 수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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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도 수리가 필요합니다
[서론]
제가 외국에 있을때 보면 정말 오래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100년, 200년 이상 된 건물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너무 깔끔하고 견고해서 여전히 멀쩡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살고, 장사도 하고 모임도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물들은 어떻습니까?
20-30년만 지나도 건물이 너무 낡아서 사용하기 힘들어 집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건물도 30년이 채 안됐습니다.
그런데 많이 낡았잖아요.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차이중 하나는 바로 ‘관리’와 ‘보수’입니다.
외국은 건물관리를 정말 철저하게 합니다.
깨졌을때 고치는게 아니라, 망가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손을 봅니다.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엄청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갈때도 ‘원상복구’라는 기준이 있어서, 집을 처음 모습처럼 복원해야 합니다.
아내가 스위스에서 돌아올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귀국하기 전 아내가 살던 집을 이전 그대로 원상복구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때와 오염을 몇날 며칠걸려 다 제거하고 모두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벌금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만큼 관리와 보수에 철저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게 건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었다고 또는 주님을 만났다고 끝이 아닙니다.
건물처럼 우리의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 금이 가고, 약해지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은 다 무너져 있는 속빈 신앙이 있습니다.
또는 처음에는 뜨겁고 열정이 있었지만, 점검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 시골의 축 늘어져 있는 늙은 개처럼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견고히 세워지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살펴보며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다시 수리하고 보수해야 할지 살펴보려 합니다.
[본론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신앙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회사에 가면 대부분의 동료들과 상사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나면 대화 주제가 늘 부동산, 주식, 정치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상사 뒷담화나 거친 말들이 오갑니다.
그 속에서 신앙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학교는 어떻습니까?
함께 점심을 먹고 과제 팀플을 할때도 서로 이해해주고 세워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경쟁하고, 부딪히고, 신앙을 이해해주지 않는 관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였던 유다가 아합 가문과의 혼인 동맹으로 인해 우상숭배로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여호사밧이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혼인시킨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알 신전이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모든 다윗 왕조의 자손들을 죽이려 합니다.
이러다가는 다윗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도 깨질 판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이 여호야다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아내 여호세바와 함께 어린 요아스를 성전에 숨깁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아달랴를 폐위시키고 개혁을 단행합니다.
16절부터 21절입니다.
그는 자신과 왕과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언약을 맺습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따르는 바알 신전과 제단을 헐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말씀에 따라 재정비 합니다.
성전 문에는 문지기를 세워 어떤 부정한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의 개혁은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단호하고 철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이 무너지는 이유는 갑작스러운 위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타협의 문이 열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다들 이렇게 사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작은 타협이 신앙의 기둥에 균열을 만들어 결국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의 신앙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섞이지 않기 위해 경계선을 분명히 세워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려는 부정한 것들을 문 밖에서 차단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묵상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과감히 절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든, 미디어든, 습과이든 과감히 잘라낼 수 있는 영적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성전 문지기를 세우듯, 내 마음에도 문지기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단은 절대 혼자의 힘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단호한 마음은 개인의 결심에서 시작되지만, 공동체가 함께 지지해줄때 오래 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을 세워가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신앙의 수리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론2]
요즘 가나안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거꾸로 하면 ‘안나가’ 입니다.
즉, 교회는 안 나가지만,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분도 최근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이제는 가나안 성도가 되었습니다.
잘 들어보니 결국 이유는 교회 가는게 너무 귀찮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들 눈치도 봐야 하지, 뭔가 일 시킬 것 같지,,,
그러니까 세상 마음 편한 온라인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에서 상처를 입어 어쩔수 없이 떠난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정죄보다는 이해와 위로가 먼저여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공동체 없는 신앙은 언제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혼자 예배드리는 행위’로 정의될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용어 안에는 이미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14절을 보면 개혁을 대제사장 여호야다 혼자 이룬게 아닙니다.
요아스 왕도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백성들과 레위인, 서기관, 기술자들까지 모두 각자의 자리를 책임지며 성전 수리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성전세를 모금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세금이 강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지도자들과 백성이 모두 기꺼이 돈을 가지고 와서 궤에 돈을 넣었습니다.
성전 보수에 대한 왕과 백성들의 열망이 같았던 것입니다.
이후 성전 보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너무나 질서있고 아름답습니다.
먼저 백성들이 헌금하면 레위인들이 왕실 관리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이 함께 금액을 확인합니다.
그 후 그 돈은 성전 보수를 담당하는 감독관에게 전달되어 성전 수리 공사하는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 결과 13절을 보시면 성전은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힘입니다.
왕, 제사장, 레위인, 백성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함께 참여했을때, 성전은 견고히 세워졌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마음의 결단을 할수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 붙잡아 주는 손길,
흔들릴 때 함께 기도해줄 수 있는 손길,
잘못 가고 있을때 사랑으로 책망해줄 손길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물론, 공동체는 때때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동시에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들, 지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동역자들,
서로를 살피고 세워주는 교회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동체는 신앙을 ‘세워주는 곳’이지, 대신 ‘살아주는 곳’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을때 비로소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을 수리하는 마지막 단계인 자립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론3]
한국교회는 나라의 발전과 함께 역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세계 선교에도 앞장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급성장때문에 일어난 폐해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 중요한 폐해 중 하나가 교회 구조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나 목회자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구조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 판단과 결정에 너무 의존합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스스로 묻고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목회자에게 의존하는게 익숙해집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진짜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를 위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다보니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신앙도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은영 박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은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자립’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계속 붙잡고 살 수 없습니다.
결국은 혼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양육의 목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의 신앙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번이나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24장 2절과 14절입니다.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라는 구절이 반복됩니다.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요아스 왕이 주님의 길을 따랐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는 신앙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신앙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상숭배에 빠지고 나라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는 심지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요아스 왕의 신앙이 스스로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여호야다의 신앙 위에 세워졌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위에 세워진 게 아닌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타인의 믿음을 빌려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관계가 반드시 세워져야 합니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기도에만 의존하는 신앙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립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열쇠는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훈련입니다.
스스로 묵상하는 능력이 생길 때 우리의 신앙은 자립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회자와 상관없이 자립적인 신앙을 갖는 삶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도 성경을 펼쳐 말씀을 묵상하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저는 가끔 완전히 폐허같은 집을 새롭게 개조하는 영상을 보곤 합니다.
벽에는 금이 가 있고, 천장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고, 대들보는 썩어 곧 무너질 것 같은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번의 수리를 거쳐 전혀 다른 집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면 뭔지 모를 기쁨을 느낍니다.
비포와 애프터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영혼의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상 가치관에 물들어 “다들 이렇게 사는 데 뭐~”이런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단했던 믿음, 순수했던 열정, 뜨거웠던 내 영혼이 어느 순간부터 금이 가고, 곰팡이가 피고, 거미줄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때 필요한 게 신앙을 수리하고 보수 공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수리하기 위해 필요한 세가지 태도를 배웠습니다.
먼저, 신앙에는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선을 그어야 합니다.
절대 타협할수 없는 영역을 두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하고 예배할때 우리의 믿음은 다시 정비되고 힘을 얻습니다.
함께 교회로서 세워져가게 됩니다.
셋째, 자립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려는 마음은 결코 나를 성장시킬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나의 신앙을 자립하기 위해 말씀묵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 상태입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에는 금이 가고, 거미줄이 생기고, 곰팡이가 피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이 내 영혼의 점검과 수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 성전을 수리하여 다시 세우지 않겠느냐?”
“내가 거할 네 영혼의 집을 수리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 내 영혼의 집을 다시 보수할 때입니다.
무너졌던 내 마음의 성전을 회복하여 말씀과 기도, 찬양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놀라실만한 비포와 애프터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내가 할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시원한 가을날 아침에 세수하고 조용한 책상에 앉아 말씀 묵상 단 10분이라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수리작업에 힘과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