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05 창조절 다섯째 주일 (행 20:13~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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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3–21:40 NKSV
13 우리는 배에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바울을 배에 태울 작정이었다. 바울이 앗소까지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14 우리는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를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갔다. 15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떠나서, 이튿날 기오 맞은편에 이르고, 다음날 사모에 들렀다가,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렀다. 16 이런 행로를 취한 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베소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18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19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또,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내게 덮친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20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를 믿을 것을, 엄숙히 증언하였습니다.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27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32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 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36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그들은 배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1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곧장 항해해서 고스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로도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바다라로 갔다. 2 우리는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만나서, 그것을 타고 떠났다. 3 키프로스 섬이 시야에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섬을 왼쪽에 두고 시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 닿았다. 그 배는 거기서 짐을 풀기로 되어 있었다. 4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5 그러나 머물 날이 다 찼을 때에, 우리는 그 곳을 떠나 여행 길에 올랐다. 모든 제자가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성 밖에까지 배웅하였다.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6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에 올랐고,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7 우리는 두로에서 출항하여, 항해를 끝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신도들에게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지냈다. 8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떠나서,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9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다. 10 우리가 여러 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12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14 바울이 우리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15 이렇게 거기서 며칠을 지낸 뒤에, 우리는 행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16 가이사랴에 있는 제자 몇 사람도 우리와 함께 갔다. 그들은 우리가 묵어야 할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나손이라는 사람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는 키프로스 사람으로 오래 전에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17 우리가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18 이튿날 바울은 우리와 함께 야고보를 찾아갔는데, 장로들이 다 거기에 있었다. 19 바울은 그들에게 인사한 뒤에, 자기의 봉사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하신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20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에게 말하였다. “형제여, 당신이 보는 대로, 유대 사람 가운데는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소문으로 듣기로는, 당신이 이방 사람 가운데서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유대 사람의 풍속도 지키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를 배척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22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당신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맹세한 사람이 넷 있습니다. 24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고, 그들이 머리를 깎게 하고, 그 비용을 대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소문이 전혀 사실이 아니며, 도리어 당신이 율법을 지키며 바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5 신도가 된 이방 사람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결정해서 써 보냈습니다.” 26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날 그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한 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다. 27 그 이레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군중을 충동해서, 바울을 붙잡아 놓고, 28 소리 쳤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합세하여 주십시오. 이 자는 어디에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이 곳을 거슬러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더욱이 이 자는 그리스 사람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29 이는 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전에 보았으므로,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30 그래서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백성들이 몰려들어서 바울을 잡아 성전 바깥으로 끌어내니, 성전 문이 곧 닫혔다. 31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소요에 휘말려 있다는 보고가 천부장에게 올라갔다. 32 그는 곧 병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그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은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33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하들에게 쇠사슬 둘로 바울을 결박하라고 명령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며, 또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물었다. 34 그러나 무리 가운데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질렀다. 천부장은 소란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었으므로,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35 바울이 층계에 이르렀을 때에는 군중이 하도 난폭하게 굴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그를 둘러메고 가야 하였다. 36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 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외쳤다. 37 바울이 병영 안으로 끌려 들어갈 즈음에, 그는 천부장에게 “한 말씀 드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천부장이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38 그러면 당신은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키고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의 유대 사람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천부장이 허락하니, 바울은 층계에 서서, 무리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을 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복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그 분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이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일 때문에 고난을 겪고,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 이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소식이었고,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구원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참 생명과 만물의 구원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진부해져서, 그 가치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만,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줄 길이며, 우리가 제대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그런 좋은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매진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에도 그랬을 겁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모두가 눈이 아니고, 모두가 손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각 지체로서 해야할 일이 다르고, 그렇게 한 몸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복음을 살아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와 “우리 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제자들의 고백을 살아내는 것이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일 겁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라고 하는 도전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선포는 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에서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목소리와는 다른 하나님의 목소리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듣습니다. 세상에 매몰되어 살아가서는 그 말씀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 복음을 위해서 때로는 과감한 결단도 내려보시길 권면합니다. 기꺼이 내 것을 내어주는 일, 돈이 아닌 생명을 택하는 일, 약자의 편에 서는 일, 우리끼리가 아닌 전체의 정의와 평등을 위하는 일들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다르지 않아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리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일로 그 소명을 다 하실 수 있기를 권합니다.
읽으면서 나는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나에게 복음은 목숨을 걸만한 무언가인가? 우리에게 복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그것의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목숨을 걸고 외치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아는 삶과 알지 못하는 삶은 무엇이 그렇게 다르기에 목숨까지 내놓는단 말인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 그들이 믿은 것은 임박한 종말이었나?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것은 지연된 것이었나?
문맥 상 복음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회개를 요청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돌이킬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곧 종말이 임하였다. 즉, 심판과 구원이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는 화를 입을 것이고, 믿는 자들을 구원을 입을 것이다.
심판과 구원. 그것은 이미 임했고,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좌절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복음의 주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도덕과 전통에 대해 취하는 태도다. 기존의 도덕과 전통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다. 그것은 곧 “~해야 한다”는 모든 의무로부터의 해방이다.
복음의 두번째 주요한 핵심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졌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기존에 우리에게 당연시 되어왔던 모든 도덕과 전통에서부터 자유해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 도덕, 전통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얽매는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내부적 정체성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왜 하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인가? 왜 하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인가? 왜 우리는 그런 삶을 택하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정의’의 충돌의 지점에 있다. 그 동안의 방법은 ‘율법’을 통해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정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새로운 ‘의’가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 그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정의’와 ‘사랑’, ‘선’을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면, 예수님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진정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해야 한다. 무엇에 죽을 것인가?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의 전통과 도덕, 그리고 잘못 형성된 욕망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임 당했다. 그것은 전통과 도덕,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욕망에 맞게 사용하려고 했던 권력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죽음에 동참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 다시 말한다면, 선한 일과 그런 세상을 욕망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와 또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
우리는 삶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세상이 형성한 욕망인가? 하나님을 향한 욕망인가? 나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세상에 유익한가? 그런 사람은 분명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욕망은 많은 부분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렇게 욕망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많은 경우 실패한다. 우리가 공부해야 하지만, 운동해야 하지만, 묵상해야 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의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무의식’과 ‘감각’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욕망을 형성시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곳은 ‘마케팅’이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프리드리히 2세, 감자
금기는 욕망을 형성한다. -> 율법은 죄를 만든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의 균열.
좋은 성적을 원하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지만, 칭찬과 격려가 아닌 꾸중을 듣게될 때 아이는 혼란에 빠진다.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바로 부모의 욕망을 부정하는 방법이다.
욕망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충만한 힘이다.
몰입 -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대상과 연결된 상태
새로움 - 창조와 생성
또는 에서 ‘그리고’로 연결되어 새로운 무언가가 되는 것 = 생성 = 욕망
나와 연결된 관계가 억압되거나 몰입이 깨지는 순간 욕망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욕망의 좌절로 인해 형성된다.
자연스럽게 다른 것과의 연결 관계로 이행하도록 내버려두면, 욕망은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욕망,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을 도모하려는 순수한 힘에 상태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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