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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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46 NKRV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I. 본문 해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번째 말씀은 마지막으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에 따른 순종과 관련된 가장 의미심장한 기도이다.

II.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 기쁘게 순종하신 마지막 행보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을 때부터 다시 품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에 죽음 이후 부활의 뜻을 이루실 것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는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현재적으로 경험되게 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인생을 마치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죽음이 끝이 아닌 완성을 향해 가는 중간 여정임을 알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의지하고 예수님과 같은 부활을 소망하게 하기 위함이다.

A. 예수님의 영혼(중보자 예수님)

예수님은 신인 양성이시다.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다(칼케톤 신경).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장을 하셨습니다(구약의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하신 것과 동일한 선언으로 나는 ...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여러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며, 바다 위를 걸으시고, 나사로를 살리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심.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이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온전하게 계시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줄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영혼이라는 표현은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마리에게서 나심으로 다른 인간과 동일한 과정을 밟으셨습니다.
예수은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육체의 한계를 가지셨습니다(배고픔, 목마름, 피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셨습니다(기쁨, 슬픔, 사랑, 연민, 놀람, 분노 등).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셔야만 하는 이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담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죄의 형벌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어야만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의 모델이 될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어야만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고, 고통과 연약함 속에 있는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죽으셨다. ESV 요한복음 활용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 했던 말의 의미.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은 인성적 죽음입니다.
인성 안에 영혼과 육체가 있는데 육체는 남고 영혼이 하나님께 가는 사건입니다.
# ESV 요한복음
영혼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간 영혼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도록 자발적으로 그 몸에서 영혼을 놓아주셨다.
예수님의 영혼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실 때 그 몸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하늘에서 성부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요20:17의 내가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으로 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이후 예수님의 육체적 승천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적용
우리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마칠 때 죽음을 경험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인성적 죽음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성적 죽음이 우리의 죽음에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하고 영원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인간의 대표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의 형벌로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죽음은 유족과의 헤어짐으로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로 가서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다시 만나는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의 첫열매가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의 부활로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B. 예수님의 죽음

숨지시니라. 떠나가시니라. 자발적 희생을 강조, 이사야 53장 활용
이사야 53:12 NKRV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숨지시니라. 떠나가시니라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의 자발적 성격을 강조하는 말로서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죽음에 대한 묘사를 상기시킨다.
가현설 일축(요한일서)
가현설(Docetism)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교리적 입장 중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였으며, 그의 육체와 고난은 겉모습에 불과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가현설을 주장한 주요 인물 및 그룹:
가현설은 특정 한 개인이 창시했다기보다는 다양한 초기 기독교 그룹과 사상가들 사이에서 발전하고 주장된 관념입니다. 주로 2세기부터 4세기경에 걸쳐 활동했던 영지주의(Gnosticism) 그룹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하고 영적인 세계를 선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완전하고 순수한 신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물질인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영적인 존재였고, 육체는 단지 환영(phantom)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키온(Marcion): 비록 엄밀한 의미의 영지주의자는 아니지만, 마르키온은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분리하고,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신이 창조한 물질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예수가 진정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그의 추종자들: 발렌티누스 영지주의는 예수의 육체가 하늘로부터 온 영적인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보거나, 혹은 단지 환상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가현설적 견해를 내포했습니다.
그 외 초기 영지주의 종파들: 카르포크라테스파(Carpocratians), 바실리데스파(Basilideans) 등 여러 영지주의 종파들이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2. 기절설 vs 죽음(인성 안에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남, 육체는 무덤에 남고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 지옥강하설 일축
예수님의 죽음을 '기절설(Swoon Theory)'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일부 비판적 신학자나 합리주의자, 또는 예수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이며, 무덤에서 깨어나 사람들에게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절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
기절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짧은 십자가 처형 시간: 예수님이 다른 사형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약 6시간) 만에 십자가에서 내려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로마 십자가형은 보통 며칠씩 고통스럽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옴: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곧 피와 물이 나왔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절설 지지자들은 이것이 심장이 멈춘 시체에서 나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심막액(물)과 피가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당시 의학 지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 현대 의학적으로는 심장 주위의 염증 등으로 인해 심막액이 고여 있다가 터지거나, 피가 응고되기 전의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향품과 아마포: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정성껏 아마포로 싸고 많은 향품(약 30kg)을 발랐다는 기록(요한복음 19:38-40)을 들어, 이러한 처치가 일종의 응급처치나 보온 효과를 가져와 예수님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부활 후의 모습: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상처 자국을 보여주셨고, 심지어 음식을 드셨다는 기록을 들어, 이는 죽은 시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회복된 상태였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기절설에 대한 반박:
주류 기독교 신학은 기절설을 강력히 반박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제적으로 사망했음을 강조합니다.
로마 병사의 전문가적 확인: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 처형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수가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은 이미 죽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9:32-33).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행위는 죽음을 최종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의학적 불가능성: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심한 고뇌, 채찍질, 가시 면류관, 십자가를 메고 가는 과정, 그리고 못 박힘이라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심한 출혈과 탈진, 심장 파열 등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모든 것을 겪고 '기절'만 했다는 것은 현대 의학적으로 매우 희박한 가정입니다. 특히 심한 채찍질은 이미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물과 피가 나온 것을 현대 의학적으로 세 가지 원인을 말합니다. 1.심낭상출 또는 심장 파열로 인해 심낭에 피가 고였다가 창으로 찔러 분리되어 나왔을 경우, 2. 흉막상출로 인해 폐가 눌린 상태에서 호흡곤란으로 인해 흉막액이 고였다가 창으로 찔러 나왔을 경우, 3.혈액 응고 전에 혈장과 적혈구의 분리에 의한 것이다.
환경적 요인: 예수님이 무덤에 갇힌 상황(크고 무거운 돌로 막힘), 시신을 덮은 아마포와 향품의 양, 그리고 차가운 무덤의 환경에서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스스로 깨어나 돌을 치우고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부활의 의미 퇴색: 만약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핵심 교리입니다. 기절설은 이러한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 완전히 훼손합니다.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 극심한 절망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단순히 '살아 돌아온' 것이라면, 그들의 반응은 '기쁨'과 '경이로움'보다는 '놀라움'과 '안도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완전히 변화되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용기를 얻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당국과 유대 당국의 입장: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마 당국과 유대 당국은 시신이 도난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시신을 찾고 이 사실을 공개하여 '부활' 소문을 잠재우려 했을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기절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시도에서 비롯된 주장이지만, 복음서의 기록과 당시의 역사적, 의학적 맥락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부족하며,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부활의 의미를 왜곡한다는 반박을 받습니다.
3.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리 스트로벨의 특종 믿음 사건이나 예수는 역사다 영화를 참조
BC AD역사적 구분
게르트 뤼데만-예수님의 처형 사건, 무신론자, 객관적 자료
바트 어만-무신론자, 예수 존재 인정
신은 죽지 않았다 2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재판 과정 참조
J. 월러스, 강력계 형사, 미제 사건 해결, 목격자 증언 분석을 통해, DNA로는 안됨, 로마인에게 죽은 예수의 사건을 조사함, 조작은 숫자가 적을 수록 유리하나 성경은 그렇지 않음, 증인들이 치르는 혹독한 댓가를 볼 때 조작 불가능, 상호 보완 기록으로 작용
증거가 있는 진실이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다.
J. 워너 월러스 형사 (J. Warner Wallace)는 예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심층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변증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무신론자이자 냉철한 회의주의자였던 베테랑 살인 사건 수사관이었습니다. 그의 전문 분야는 범죄 현장 증거 분석, 증언 평가, 그리고 사건 재구성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전문적인 수사 기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마치 미제 살인 사건을 해결하듯이 조사했습니다.
그의 주요 저서인 **『콜드 케이스 크리스마스』 (Cold-Case Christianity)**와 『예수님은 콜드 케이스였다』 () 등을 통해 자신의 조사 결과를 공유했습니다.
J. 워너스 형사의 접근 방식 및 주요 주장:
콜드 케이스(Cold Case) 수사 기법 적용:
그는 수십 년 된 미제 사건(콜드 케이스)을 다루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기록과 역사적 증거들을 분석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법정에서 사용되는 증거 평가 기준을 고대 문헌과 증언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증인들의 증언의 일관성, 신뢰성, 상호 보완성, 그리고 외부 증거와의 부합 여부 등을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성경을 "증인 진술서"로 평가:
워너스 형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의 성경 기록을 마치 사건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의 진술서처럼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 진술서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핵심적인 사실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사실 관계에서 놀라운 일치성을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작은 차이점들은 오히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조직적인 조작이라면 완벽하게 일치시켰을 것이므로)
대안 가설(Alternative Hypotheses)에 대한 반박: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요 대안 가설들(예: 시체 도난설, 기절설, 환각설, 신화설 등)을 철저히 검토하고, 각각의 가설이 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는지를 논증합니다.
시체 도난설: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과 무거운 돌의 존재, 그리고 제자들의 변화된 삶을 볼 때,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기절설: 예수님이 십자가형의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견디고 무덤에서 혼자 깨어나 거대한 돌을 치우고, 로마 병사들을 피해 완전한 몸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환각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환각을 보았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신체적 접촉(상처 만져보기, 음식 먹는 모습)에 대한 기록과도 상충된다고 봅니다.
증인들의 변화된 삶: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사실을 중요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위해 죽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결론: J. 워너스 형사는 자신의 베테랑 수사관 경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무신론적 관점에서 예수 부활의 증거들을 가장 냉철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했을 때,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타당한 결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증거들이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고,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작업은 특히 현대인들에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 J. 워너스 형사가 콜드 케이스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님의 부활 증거를 분석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미지입니다.
# ESV 누가복음 활용
예수님 죽음의 실재.
예수님의 죽음이 혈과 육을 가진 피조물들에게 속죄적 의미를 가지려면, 그 죽음은 반드시 역사적이고 육체적인 실재여야만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이 단지 육체적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거나(가현설로 알려진 고대 이단), 그분이 단지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주장(기절설)을 거부한다.
누가복음 22-23장에 있는 다양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의 실재를 다음과 같은 면에서 단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언급하시고(22:19-20), 땀을 흘리시고(22:44), 두들겨 맞으시며(63-64), 그분은 또한 몸이 있어서 옷을 입을 수 있고(23:11), 옷 벗김을 당하고(34),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33), 장사를 위해 주의 깊게 준비가 되고 무덤에 안장되신다(53).
예수님의 죽음은 확실히 다른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 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죽음은 진짜로 일어난 사건이다.
적용
예수님께서 역사성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역사성은 사실로 드러났다.
2천년 전의 역사적 사실, 곧 예수의 육체와 죽음은 우리에게 속죄의 의미를 갖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고 부활을 기대할 수 없다.

C. 아버지께 부탁(기도)

아버지를 부르심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며 신뢰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독생자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셨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계신 예수님
요한복음 1:18 NKRV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 안에 계심을 드러내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들으심을 받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아들의 고난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에 있었다.
그 정점이 아버지의 뜻에 따른 죽음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 손에 의탁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순종하고 의지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일하는 방식이었고 목적이었다.
# 문병호 기독론
주님은 죽음조차도 “아버지 손”에 맡기신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다. 아들은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그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 안에 계심을 드러내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들으심을 받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아들의 고난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에 있었다. 그 정점이 아버지의 뜻에 따른 죽음-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는 죽음-이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심은 아들이 일하는 방식이 될 뿐 아니라 그 목적이 된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이끌어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심에 있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아버지의 자녀가 되므로 그와 함께 형제가 되고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소리를 우리가 듣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일곱 말씀으로 들려주셨다. 그 일곱 말씀은 자체로 사건이며, 사건에 대한 주님의 선포이며, 복음이다.
2. 부탁하심
NICNT 누가복음 7.6.3. 예수의 죽음(23:44–49)

만일 하나님의 임재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주로 언급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을 “아버지”(32–34절을 보라) 로 부른다.

기도하는 예수가 한 말은 시편 31편 5절에서 온 것이다.

이 본문에서 고난받는 의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긴다.

예수는 시편을 사용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나타낸다.

예수가 믿는 하나님은 원수들의 손에서 그를 구원할 것이다.

예수의 수난 예고에 죽음과 부활이 짝을 이룬 것처럼 (특히 9:22; 18:31–33), 우리는 예수의 기도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들을 수 있다.

시편 31:5 NKRV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 김정우 시편 주석
시인은 드디어 주님에 대한 확신을 천명하며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현재 그는 그물에 걸린 짐승과 같이 되었고, 원수는 그를 사로잡고 ‘너의 목숨은 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운명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주께서 건져주시며 보호하실 것을 확신한다.
내가 부탁합니다는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맡긴다’는 뜻이다. 즉 다른 사람으로 어떤 것을 ‘돌보도록 맡기고’ 그의 ‘손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주께 맡기고’ 있기 때문에 아주 독특하다. 아직 자신의 목숨을 잃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주님께 생명을 맡긴다. ‘내 영혼’은 ‘내 생명’ 혹은 ‘내 목숨’으로서 ‘나 자신’을 가리킨다.
‘진리의 하나님’은 뒤따라오는 6절의 ‘헛된 우상’과 대조된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 한번 나타나며 ‘진실하신 하나님’ 혹은 ‘성실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다. 즉 주님은 믿을 수 있는 성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절에서 맡긴다. 파카드와 속량하다. 파다 사이에는 음성학적인 유사성이 있으며, 이것을 통해 앞 뒤 소절 사이에 논리적인 연관성을 만들어 주고 있다. 즉, 자신이 주님께 ‘자신의 목숨’을 맡겼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구속하실 것’을 확신한다.
‘나를 구속하셨다’는 번역은 히브리어 완료 형태를 이미 ‘구속이 이루어진 상황’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회고적’인 것으로 이미 그가 구원 받은 후에 드리는 고백일 수도 있고 혹은 미래지향적인 고백으로 불 수 있다. ...즉 시인은 아직 구속함을 받지 못하였지만 구속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말하고 있다. ‘나를 건져주십시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에서 구속하다는 동사는 ‘제물이나 돈을 주고 속량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 ESV시편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음의 순간에 보이신 의뢰를 예표한다.
# ESV 누가복음
죄 없이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정당화로 의인의 부활을 예고합니다.
큰소리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나타냄.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속한 영혼은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되돌아갔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조차도 여전히 모든 상황을 제어하신다.
# 칼빈
첫번 절규를 언급하지 않은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생략하는 두번째 절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심한 시련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확고 불변한 그대로요, 패배하지 않은 채로라는 점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께서-모두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던-자신의 영혼에 대한 신실한 수호자시라는 점을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없이 자랑하는 것보다 더 명백한 승리의 선이 또 있을 수 없다.
...직접 하나님께 말씀하시면서 그의 확신에 대한 증거를 자신의 품에 위임하셨다. ...홀로 그의 유일한 증인이 되시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경건한 사람이 온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가운데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찾을 수 없을 때,
세상의 광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슬픔과 염려를 하나님의 무릎에 풀어 놓고 당신의 약속을 바라며 조용히 쉬는 것이야말로 신앙에 대한 더 없이 진지하고 확고한 입증이 아닐 수 없다.
이 기도 형식은 시편 31편 9절에서 취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여기에 사용하신 것은 위급한 상황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여 모든 입이 나는 멸망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으며 나의 영혼은 이리저리 끌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육신으로는 당신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나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며 당신의 선하심이 베푸는 숨은 보호를 받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하는 기도와 같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영혼이 자기가 죽은 후에도 안전하게 지내도록 기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위탁하면서 생과 사를 통한 당신의 보호로 평안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영혼의 수호자로 떠 받들면서 그는 자기 영혼이 온갖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실 경우에는 기꺼이 죽음을 불사하고 있는데 여호와만이 자신의 백성을 죽음에서 붙잡아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첫번째 결정, 곧 자신의 영혼을 이 지상 생명의 험한 길에서 아버지의 보호에 위임하는 것은 끝이 났으므로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이 세상 저편에서 보존되기를 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자신께 일임하게 하시는 주된 이유는 우리의 소망이 이 그림자 같은 존재를 초월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위탁한 것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모든 신실한 자들의 영혼을 한 무더기로 모아 자기 영혼과 함께 안전하게 보전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이다.
이 기도를 통해 그는 모든 영혼을 보전하는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그 결과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를 보시고 이 모두를 그의 관리 아래 두기로 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그에게 양도함으로써 이들을 보전하는 것을 그에게 위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임종시에 예수님과 같은 기도와 함께 자신의 영혼을 그의 손에 위임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을 때 자신의 영혼을 공중에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처럼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안전하게 보관하는 확실한 관리인에게 일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괴롭히는 많은 시험의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무척 애를 쓰다가 마침내 이 절규를 외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영혼이 죽음에서도 안전하고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처럼 크게 외치신 것은 우리도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무너져가는 육신의 오두막집을 빠져 나갈 때 발길을 가볍게 내딛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적용
# 문병호 인용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이끌어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심에 있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아버지의 자녀가 되므로 그와 함께 형제가 되고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소리를 우리가 듣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일곱 말씀으로 들려주셨다. 그 일곱 말씀은 자체로 사건이며, 사건에 대한 주님의 선포이며, 복음이다.
사도행전 7:59 NKRV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 집사 또한 숨을 거둘 때 동일한 말을 한다.
베드로전서 4:19 NKRV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하는 것이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된 모든 자들의 의탁하는 것과 연결된다.
# 바클레이
유대인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치는 첫 번째 기도이다.
무서운 어둠이 덮이기 전에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먼저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이 말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예수께서는 아버지 품에서 잠든 아기와 같이 죽으셨다.

III.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유일하고 참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이시며 실제로 태어나시고 죽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참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며 영혼을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믿고 의지합니까?
여러분이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것 같지만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인간 관계가 깨지거나 심지어 죽는 일이 다가올 때는 의심이 들게 마련입니다.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것 또한 부활 이전의 중간 상태로 옮겨 가는 것 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보존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부활을 준비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는 보류해 놓자.
곽기욱
여섯 번째 말씀의 다 이루었다는 창조 사역의 여섯 번째 날과 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완성, 구원-완성
일곱 번째 말씀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는 일곱 번째 날과 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 후 안식, 구원 사역 후 안식
토요일은 한 주간의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안식하는 것을 예표하는 듯 하다.
주일은 한 주간의 처음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빛을 선포하시고 빛 되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한다.
백금산
제팔일 안식일, 부활의 구약 예고
제칠일은 창조 기념일이고 제팔일은 구원 기념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말씀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연결하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고, 성경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탐구를 요하는 주제입니다. 직접적으로 성경에 명시된 연결고리는 없지만, 신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유형학적(Typological) 또는 상징적(Symbolic) 연결을 통해 성경 전체의 통일성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조명하곤 합니다.
1.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요한복음 19:30)와 창조 사역 제6일의 완성:
연관성 추정: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단순히 고난의 끝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모든 예언과 율법의 요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 제6일과의 연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6일째에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창조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완성: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구원 사역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셨다는 점에서 '완성'이라는 개념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셨고, 구원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절정: 창조의 절정이 인간 창조였듯이, 구원 사역의 절정은 죄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2.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와 창조 제7일의 안식:
연관성 추정: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자기 생명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 무덤에 묻히셨고, 유대인의 안식일(토요일)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창조 제7일 안식과의 연결: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것(창세기 2:2-3)**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죽으셔서 무덤에서 안식하신 것 사이에 상징적인 연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쉼과 안식: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쉬신 것처럼, 예수님도 구원 사역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쉼'은 나약함이나 실패가 아니라, 완벽한 사역 후에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안식입니다.
새로운 시작 전의 정지: 하나님의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을 넘어, 창조 세계가 안정되고 질서가 잡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안식 또한,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와 구원의 시작을 앞둔 '정지'이자 '대기'의 시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을 주장하는 성경신학자 및 글:
이러한 유형론적 또는 상징적 연결은 성경신학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신학 일반: 많은 성경신학자들은 구약의 창조, 언약, 제사 제도 등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패턴을 연구합니다.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은 구약의 모든 그림자(type)에 대한 실체(antitype)로 이해됩니다.
대표적인 학자 및 접근 방식:
오스카 쿨만 (Oscar Cullmann): 그의 책 "그리스도와 시간" (Christ and Time) 등에서 기독교적 시간 개념과 구속사의 진행을 다루며, 예수님의 사역이 시간과 역사를 완성하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 (Gerhard von Rad): 그의 "구약신학" (Old Testament Theology)은 구약의 역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창조와 구원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탐구합니다.
R.C. 스프롤 (R.C. Sproul): 개혁주의 신학자로, "예수님의 일곱 말씀" 등에서 십자가상 말씀을 깊이 있게 다루며, 구속사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아더 핑크 (Arthur W. Pink): 그의 "사복음서 강해"나 다른 주석서들에서 십자가상 말씀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룹니다.
접근 방식의 주의점:
이러한 연결은 직접적인 성경 구절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통일성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따라서 이를 '성경적 증거'로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성경신학적 추론' 또는 '유형론적 연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연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와 구원이 하나로 연결되는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여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는 모습과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조합하여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는 두 사건 사이의 신학적 연결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제팔일 안식일'이라는 표현은 주류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제정된 일곱째 날이며, 구약 시대에는 토요일(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로 지켜졌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첫째 날, 즉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제팔일 안식일'이라는 용어가 만약 어떤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 또는 부활의 날로서의 '첫째 날' (일요일):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간의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마태복음 28:1, 마가복음 16:2, 누가복음 24:1, 요한복음 20:1).
오순절 사건: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로, 안식일 다음 날(일요일)에서 시작하여 일곱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에 해당합니다(레위기 23:15-16).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강림 사건이 바로 이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의 모임: 사도행전 20장 7절에는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요일에 예배와 성찬식을 위해 모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됩니다.
주님의 날: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말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주의 날'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일요일로 해석합니다.
'제팔일'의 상징적 의미: 일곱째 날(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지만, 첫째 날(일요일)은 새로운 창조, 부활, 영원한 안식의 시작을 상징하는 '여덟째 날' 혹은 '제팔일'의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를 넘어, 영원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신학적 상징입니다. 율법의 안식일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을 지향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특정 교단의 교리:
만약 '제팔일 안식일'이라는 표현이 특정 교단이나 운동에서 사용된다면,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독자적인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는 성경적 안식일이 토요일이며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지만, '제팔일 안식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제팔일 안식일'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거나 명시적으로 제정된 날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적인 안식일 개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새로운 구원과 영원한 안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날로 이해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팔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 즉 부활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한 이미지로, '주간의 첫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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