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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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사랑

갈라디아서 5:1 NKRV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주의와 대조하여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율법(을 통한 구원)주의 VS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칭의)을 얻는다.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9–20 NKRV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6–7 NKRV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2.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갈라디아서 3:2 NKRV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5 NKRV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 율법은 율법 아래에 우리를 속박시키지만, 참된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갈라디아서 4:3–5 NKRV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린 시절 율법 아래에 종노릇,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
율법: 종노릇, VS 아들(의명분):자유
갈라디아서 4:7 NKRV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8 NKRV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하갈과 사라 (갈 4:21-31)
우리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다!!
이어지는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5:1 NKRV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화/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 자유. 율법의
존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
1-6절 두 종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 대조
7-12절 두 종교를 설교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대조
거짓신자와 참 신자(1-6)
a. 주장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인이 되도록 자유케 하셨다.
-이전에 처했던 상황은 종살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자, 회심은 노예 해방의 행위,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으로 묘사된다.
-이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시면서 행하신 일은 우리의 의지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한다기보다, 양심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율법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발버둥으로부터의 자유다.
->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유다.
b. 명령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고, 자유롭게 하려 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안에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용서에 의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영광스러운 양심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우리의 순종에 의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소가 무거운 멍에로 인해 몸이 휘어진 모습과 같다.(레 26:13)
레위기 26:13 NKRV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도 한때 율법의 멍에 아래에 있으면서 우리가 충족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와 불순종으로 인해 두려운 정죄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를 충족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순종으로 죽으셨고, 우리가 당해야 할 정죄를 대신 당하심.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우리의 멍에를 풀어주셔서 자유케 되어 똑바로 설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런데, 어찌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 그 잔인한 멍에에 복종하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1절 일반적인 문제
2-4절에서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1 할례의 문제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할례는 교리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육체적 수술, 의식상의 행위가 아니라, 신학적인 상징을 담고 있다.
할례는, 특정한 유형의 종교, 즉 율법에 순종하여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를 의미함.
거짓 교사들의 표어는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행 15:1
사도행전 15:1 NKRV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사도행전 15:5 NKRV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기에 불충분하다고 단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모세가 마무리하게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 종교”의 입장은
“할례를 받고”(2,3)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들(3)
할례가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만든다. = 그들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다!
ㄴ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실패했다.
바울은 직설적으로 말한다.
갈라디아서 5:2 NKRV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의 심각한 결과를 세 문장으로 경고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라디아서 5:4 NKRV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2.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3. 은혜에서 멀어진 자로다.
=> 할례를 더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잃는 것, 율법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는 것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나서, 할례를 받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에 할례(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더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만으로 구원에 충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어떤 것을 더하면,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167. 상
갈라디아서 5:5–6 NKRV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전까지 “너희”라는 대명사로 글을 이어가던 바울이 “우리”ㄹ로 바꾸었다.
바울은 지금까지 수신자들에게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이제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참된 신자, 복음주의적 신자, 은혜의 복음 안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 묘사한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며 두 가지를 말한다.
우리는 믿음을 따라 기다린다(5)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의의 소망” 우리의 칭의가 가져다주는 미래에 대한 기대, 즉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의 구원을 기다린다.
우리는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 애쓰거나 선행에 의해 그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일어날 최종적 영화는, 우리가 처음에 받은 칭의처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우리는 그것을 기다린다.
2. 그리스도 안에서는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6)
다시 한 번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부인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다른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 할례도, 무할례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를 더 향상시켜줄 수 없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뿐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완벽한 믿음의 삶이어서 선행과 율법에 대한 순종은 전혀 상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음
갈라디아서 5:5 NKRV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삶일 뿐이 아니라, 성령안에서의 삶이며,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사랑의 선행을 하게 하신다. (이후에 22,23절에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5:6 NKRV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6) -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근거로서 믿음에 사랑의 행위를 추가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 사랑을 발하는 믿음이라는 의미다.
2 거짓교사와 참교사(7-12)
1-6절 “너희” 와 “우리”대명사 대조,
믿음에 할례를 더하려는 거짓 신자들인 너희,
오직 그리스도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만족하는 참된 신자인 우리
이제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10절b 거짓 교사인 ‘그’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도 바울인 ‘나’가 대조됨
갈라디아서 5:7 NKRV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에서 달음질 하는 것에 비유하기를 좋아함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달음질을 잘하는 것이 그저 진리를 믿는 것(기독교가 단지 정통 신앙인 것처럼), 그저 행동만 잘하는 것(단지 도덕적 고결함인 것처럼)도 아니고 믿음을 행동에 적용하면서 ‘진리를 순종하는 것’임을 주목하라.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만이 통합된 그리스도인이다.
그가 믿는 것과 행동하는 방식은 시종 일관된다.
그,의 신조는 그의 행동에서 표현된다. 행동은 그의 신조에서 유래한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달음질을 잘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자유케 하셨다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을 방해했다.
그들을 주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장애물을 하나 던졌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이 처음에 믿은 진리를 반박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렸으며, 은혜에서 멀어졌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의 전 과정, 그 기원, 그ㅜ 결과와 종말을 추적해 나간다.
a. 그 기원
갈라디아서 5:8 NKRV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버리도록 설득했다.
이런 설득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로 부르신 반면 (갈 1:6) 거짓 교사들은 공로의 교리를 선전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6 NKRV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논증이다.
-거짓 교사들의 메시지는 갈라디아 인들의 부르심과 일관되지 않는다.
b. 그 결과
우리는 이교가 갈라디아인들을 ‘막았다’(7절)는 것을 이미 보았다.
후에 바울은 그것이 그들을 ‘요동하게’하고(10절)
갈라디아서 5:10 NKRV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어지럽게 했다고
갈라디아서 5:12 NKRV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말한다.
하지만 이제 바울은 흔히 알려진 속담을 사용해서 갈 5:9
갈라디아서 5:9 NKRV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라고 말한다.
즉 거짓 교사들의 오류가, 기독교 공동체에 퍼져 나가 마침내 교회 전체가 오염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6 에서도 같은 속담을 사용했다.
고린도전서 5:6 NKRV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거기서는 그 속담을 기독교 공동체 내의 죄에 적용하며, 여기서는 거짓 가르침에 적용한다.,
악과 오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둘다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짓 가르침의 인과관계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퍼져나가기 때문에, 바울은 그 거짓 가르침에 저항하기로 했다.
C 그 종말
갈라디아서 5:10 NKRV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바울은 오류가 승리하지 않을 것이며, 갈라디아인들은 더 나은 생각을 갖게 되고, 거짓 교사들은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단단히 확신한다. 실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끼치는 해악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심지어 소아시아 이교도의 여신 퀴벨레의 사제들처럼 그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12) 혹은 “스스로 고자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한다.
이 생각은 상스럽고 악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난폭한 기질 때문도, 복수에 대한 갈망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역시 거짓 교사들이 땅에서 끊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갈라디아서 5:11 NKRV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우리말 성경에는 But if I… ‘하지만’ 이 없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에게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 교사인 바울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린다.
이 교사들은 심지어 바울이 그들의 견해를 옹호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도 할례를 전하고 옹호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사도는 그것을 단호히 부인하며, 이어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11절.
이처럼 바울은, 자신과 거짓 교사들을 분명하게 대조한다.
그들은 할례를 전했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했다.
할례를 전하는 것은 죄인들에게 그들의 자신의 선행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할례의 메시지는 비위를 맞추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 않고 상당히 인기가 많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자만심을 상하게 하며 인기가 없다.
그래서 할례를 전하는 것은 핍박을 피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핍박을 불러들인다.
사람들은 자신이 십자가 아래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며, 그렇게 말하는 설교자를 반대한다.
그런데 바울은 핍박을 받으므로, 자신이 할례를 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핍박을 피하기 위해,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은 거짓 교사들이었다(6:12)
핍박이나 반대는, 참된 그리스도인 설교자를 나타내는 표지다.
갈라디아서 4:29 NKRV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의 이삭들은 언제나 이스마엘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같은 사람들… 신약의 사도들
수십세기에 걸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독교 교회에서 은혜의 복음을 왜곡하거나 희석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은 그들의 신실함으로 인해 고난을 받아야 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은 여전히 ‘거치는 것(걸림돌)’으로 인간의 교만에 심각하게 거슬린다.
그 소식은, 인간은 죄인이고 반역자며,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아래 있다고, 자신을 구원하거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조롱과 반대를 받을 것이다.
‘할례를 전해야만’ 인간의 공로와 충족성을 전할 때만 핍박을 면하고 인기를 끌 수 있다.
결론.
현 시대는 관용의 시대다.
사람들은 양쪽 세계 모두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기를 좋아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 없으며, 문제를 너무 명백하게 해명하든가 너무 빈틈없이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신약의 종교는 이러한 정신적 견해와 대단히 다르다.
기독교는 양다리를 걸치거나 안개같은 모호함 속에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명확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라고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와 할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할례’는 인간적 성취의 종교, 자신의 선행에 의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종교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신적 성취의 종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을 통해 하신 일의 종교를 나타낸다.
‘할례’는 율법, 행위, 속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 믿음, 자유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한다.
한가지 불가능한 것은 갈라디아 인들이 시도하던 일, 그리스도에 할례를 더해 둘 다를 갖는 일이다.
그것은 안된다. 할례와 그리스도는 상호 배타적이다.
게다가 이 선택은 교회의 성도들이나 목사들이나, 다 종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나 전하는 사람들이나 다 해야 한다. 사람들이 받는 것은, 그리스도든가, 할례든가 둘중 하나며, 목사가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든가 할례든가 둘중 하나다. 원칙적으로 세번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선택의 배후에는 동기가 잠복해 있다.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경향이 있을 때는 할례를 택한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는 자신을 낮춰야 한다.
제 15장
기독교 자유의 본질
갈 5:13-15
자유는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처음 선한 유명한 네가지 자유가 있다.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양심의 자유다.
복음에 따르면,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의 짐을 벗겨주시기까지는 참으로 자유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들이 이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우리의 결단과 함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과 함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아직 반역과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은혜를 베푸셨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죄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돌아설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사 우리를 자유로 부르셨다.
바울은 경험을 통해 이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다(갈 1:15)
갈라디아인들도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았다.
바울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을 “부르신” 이를 그렇게 속히 떠나는 것에 대해 불평했기 때문이다.
(갈 1:6)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도 그것을 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어떤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자유로 부르심 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며, 보통 사람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가진 일반적인 이미지는 전혀 자유가 아니라, 잔인하고 제한된 속박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속박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 부르는 은혜의 부르심이다.
또한, 그것은 몇몇 신자만 누리는 예외적인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차별 없이 공통적으로 유업으로 받는 것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 한명 한명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받으며 자유로 부르심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함축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억제와 제한으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되는가?
기독교의 자유는 무질서의 또 다른 말인가?
바울 자신은 그런 무질서를 가르친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비방자들은 쉽게 그를 그렇게 조롱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서 즉시 우리가 부름받은 자유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그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며, 그것을 무책임한 남용에서 보호하려고 애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공덕을 얻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다.
그것은 모든 통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에 탐닉하는 자유가 아니다(13)
갈라디아서 5:13 NKRV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육체”라는 말은 우리 몸의 뼈대가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을 말한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자기중심성으로 뒤틀려 있기 때문에 죄를 짓기 쉽다.
우리는 우리가 갖게 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 육체에 탐닉하기 위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기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군사적으로는 공격이 개시도히는 장소, 작전 기지에 대해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유리한 위치, 따라서 기회나 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유가 방종의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의 자유(freedom to sin)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sin)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기심에 탐닉하는 무제한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무제한적 자유다. NEB 는 그것을 잘 표현한다. ‘너희는… 자유인이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 다만 너희의 자유를 너희의 저급한 본성을 위한 방종으로 바꾸지만 말라’
실로 그런 자유, 아무런 구속 없는 방종은 전혀 참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그리고 더 지독한 형태의 속박,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욕구에 종노릇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라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회심 이전의 우리 상태를 “여러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딛 3:3)라고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그런 종들이 많다.
그들은 큰 소리로 자신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과 자유로운 삶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고삐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자신들의 욕구에 매인 종이다. 그들이 그것을 제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대단히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에 탐닉할 자유를 갖기는 커녕,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갈 5:24)
즉 우리의 저급한 본성의 주장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 바울은 예수님께 빌려 온 생생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가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행하려 애써야 하며,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는 약속이 있다. 대신 성령께서는 우리 삶에서 절제로 마무리되는 자신의 열매가 익어가게 하실 것이다(23절)->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웃을 착취할 자유가 아니다. (13b, 15절)
갈라디아서 5:13 NKRV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에 탐닉하고 자신이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이웃의 유익과 상관 없이 자신이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 없이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자유다.
실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방치하거나 학대할 자유를 갖고 있기는 커녕, 그들을 사랑하고 사랑을 통해 그들을 섬기라고 명령받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섬기는 물건인 것처럼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의 ‘종’이 되기까지 한다.
“많은 종을 둔 한 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많은 주인을 둔 한 명의 비천한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기심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것은 놀랄만한 역설이다. 한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일종의 종노릇-우리 육신에 종이 되는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자유롭다. 하지만 서로와 관련해서는 종이다.
이것이 사랑의 의미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서로 섬긴다면, 악의적인 말과 행동으로 “서로 물고 먹지” 않을 것이다.(15) 물고 먹는 것은 파괴적인 것으로, “그리스도 안의 형제가 아니라 들짐승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인 반면, 사랑은 건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섬긴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사랑의 몇가지 표지를 말한다.
갈라디아서 5:22 N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등이다.
사랑은 우리를 괴롭히고 성나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래 참는다.
사랑은 친절한 생각을 하며 선한 행동을 한다.
사랑은 충성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확실하다.
게다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짐을 서로 질 것”이다.(갈 6:2)
갈라디아서 6:2 NKRV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사랑은 절대 탐욕스럽지 않고 움켜쥐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내어주며, 절대 소유적이지 않다.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 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그를 섬기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다 (14절)
우리는 바울이 쓰는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일부 ‘신도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에 대한 관심 때문에 율법을 어겨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율법을 성취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명령에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인가? 소위 ‘신도덕’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어느정도 절박하게 강요한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했다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종의 멍에’ 곧 율법에 다시 복종하지 말아야 하다고(1절)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해 보아야 한다.
그가 강조하는 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했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의미며, 율법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는 없지만, 일단 받아들여지면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성령을 주신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 신약 용어로 하면,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달려 있지만, 성화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에 있다(롬 8:3-4)
로마서 8:3–4 NKRV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게다가 우리가 하나님 뿐 아니라 서로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온 율법- 적어도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루는 율법의 두번째 판-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이 한 명령에서 성취되며, 살인, 간음, 도적질, 탐심, 거짓증거는 모두 이 사랑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은 6:2에서 같은 말을 한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결론.
이 단락은 현대의 세상과 교회 상황, 특히 유행하는 ‘신도덕’ 및 현대의 권위 거부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 적절히 말한다. 이 단락은, 자유, 방종, 율법,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처음에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 자유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양심의 가책을 깨끗하게 하는 것, 죄사함, 용납, 다가감, 아들됨의 말할 수 없는 기쁨, 공로 없이 자비를 경험하는 것 등이다.
이 단락은 이어서 어떻게 공로 체계로부터의 이러한 자유가 우리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서 표현되는지 말한다. 그것은 육체에 탐닉하는 자유가 아니라, 육체를 통제하는 자유다.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는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참으로 자유케 된 사람들은 이같은 세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를 표현한다. 먼저는 절제에서, 그 다음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에서, 셋째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에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1절) 자유 그리고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13절) 자유다. 우리는 그 안에 굳건하게 서야 하며, 한편으로는 종노릇에 다시 빠지지도, 다른 한편으로는 방종에 빠지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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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C강해주석 갈라디아서(두란노)
4 실제적 논증: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변증(5:1-6:10)
사도권과 이신칭의의 교리를 변증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변증하기 시작한다.
사도의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무법자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경건한 무리로 만들게 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과 방종을 떠나 성령을 좇는 봉사의 삶으로 묘사된다.
율법을 떠난 삶(5:1-12)
1 율법주의는 은혜를 파괴한다.(5:1-2)
1절: 이 구절은 속박과 자유를 주제로 하고 있는 4장을 요약하면서 5장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유를 주신 위대한 해방자이심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 자유 안에 굳건하게 서라고 호소한다.(고전 16:13, 빌 1:27, 4:1, 살전 3:8, 살후 2:15)
이는 이방종교의 멍에에서 벗어난 갈라디아 교인들이 모세 율법의 종노릇에 휩싸일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절: 그러한 위험의 본보기인 할례를 거론하면서, 바울은 할례 의식을 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하게 경고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 의식을 통해 행위에 의한 의를 구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바울은 선언한 것이다.
바울이 할례 자체를 정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젊은 디모데의 사역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갈라디아에서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1-3)
사도행전 16:1–3 NKRV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러나 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는 유대주의 신학에는 강력히 반발했다.
할례를 받은 자는 믿음에 행위를 첨가한 자이며,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 율법주의는 채무자를 만든다.(5:3)
3절: 율법주의는 은혜를 망칠 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부채를 만들어낸다.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사람이 칭의를 위해 율법의 어느 한 부분 아래 놓이게 되면, 그는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의 ‘채무자’가 된다.(참조 3:10; 약 2:10)
3 율법주의는 은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5:4-6)
4절: 율법으로 돌아서고 그 공로로서 할례를 행하는 일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고려해야 할 또 다른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데’(카테르게테테), 이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향권 안에서 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흠정역은 ‘그리스도게써 너희에게 아무 효과도 없어진다’라고 번역했다.
바울은 또한 그들이 은혜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서의 쟁점은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있지 않다.
여기서는 은혜가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의 수단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2:21 참조 율법의 길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유효한 길이 아닌 것으로 지적한다.)
만일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필수적 요건으로서 할례를 시행했다면,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위해 은혜의 울타리에서 떠나는 것이 된다. 오늘날에도 신자가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는 교회를 떠나서, 구원이 회개와 고백, 믿음, 침례 그리고 등록 교인이 되는 일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참여할 때 동일한 잘못이 재현되는 것이다.
5절: 율법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믿음(행위가 아닌)을 좇는 참된 신자는 구원의 완성(참조, 롬 8:18-25)을 간절히 ‘기다린다’(아페크데코메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단어로 7번 사용됐다. (참조, 롬 8:19, 23, 25; 고전 1:7; 갈 55:5; 빌 3:20; 히 9:28)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키게 될 것이다. 칭의의 순간에 시작된 내적이며 법정적인 의는 믿는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때에 외적인 의로 변화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이 그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실 것이다.
6절: 구원의 진정한 영역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참조 3:28; 6:15) 문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참조 5:13). 비록 구원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진정한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참조 엡 2:10; 약 2:14-18)
4. 율법주의는 신자의 진보를 방해한다(5:7-10)
7절: 즐겨사용하는 비유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을 ‘달음질’로 묘사했다. (참조 고전 9:24-26; 딤후 4:7). 그들은 경주에 잘 참여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들을 막아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만들었다. 많은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단수 대명사(‘누가’)는 여기서 특별히 유대주의자들의 지도자를 지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방해의 결과로 신자들은 더 이상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고 경주를 믿음이 아닌 율법주의적인 자기 노력으로 마무리짓고자 하는 것이다.
8-10절: 갈라디아 교인들이 따르기 시작한 그러한 거짓된 가르침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참조 1:6) 하나님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은혜로써 은혜 안에 거하도록 부르셨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음성들에 현혹되어 거짓 복음을 따르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문제를 너무 과장하고 있다는 판단을 배제하기 위해 격언 하나를 인용했다. 9절. 거짓된 교훈이란 마치 누룩처럼 퍼지며 스며든다고 경고한 것이다. 거짓 교훈으로 돌아선 자들이 많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신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이 온 교회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계해야만 했다. 바울은 진리에서의 조그만 이탈이 온 체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면, 은혜의 모든 체계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결과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의 교훈을 따를 것이며 신분을 알 수 없는 거짓 교사들의 지도자가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 확신했다.
5. 율법주의는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한다(5:11-12)
11절: 바울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 사람으로 공격을 받아온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는 회심 전에 할례와 율법을 열심히 선포했었고, 그의 태도가 할례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 받기도 쉬웠다. 바울은 이러한 오해에 질문의 수사법으로 반박했다. 그가 유대주의자들이 전파한 것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라며 되물은 것이다.
만일 바울이 할례를 전했다면 그의 사역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스칸달론:거침돌)고전 1:23이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구원에 대해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을 선포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여전히 살마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따라서 십자가는 율법체제를 종식시켰고, 할례와 모세 율법의 준수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12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바울은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바울은 할례에 그토록 열광적인 유대주의자들이 차라리 스스로 거세하기를 원했다. 마치 소아시아의 키벨레(프리지아의 여신) 의식을 집행하던 이교제사장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로 인한 육체적 불구는 그들이 새로운 개종자를 생산해 내지 못하기를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반영한 듯하다. 할례가 한때는 이스라엘 안에서 언약의 증표였지만, 이제는 옛날 이교도들이 시행한 종교의식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B. 방종을 떠난 삶(5:13-15)
13-14절: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 종노릇하는 상태로 돌아갈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언급하면서 방종으로 빠지는 것을 경고했다. 특별히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의 자유를 죄가 발붙일 수 있는 교두보로 사용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자유가 정욕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자유의 참된 목표는 사랑이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이나 죄악된 품성(육체)에 종노릇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해야 했다. 여기서 육체(싸르크스)는 죄악된 품성이란 의미로 갈라디아서에 7번 나온다
짐스럽고 끔찍한 두 종류의 종노릇을 경고한 바울은 또 다른 형태의 유익한 종노릇을 권면했다. 서로 사랑하는 종노릇을 보장하기 위해, 바울은 레위기 19:18을 인용하면서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함축되었다고 말했다. 예수님도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셨다(마 22:39; 눅 10:25-28)
누가복음 10:25–28 NKRV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2:39 NKRV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율법의 ‘성취’ 혹은 ‘완수’임을 알리기 원했다. 그는 이 논의를 로마서 13:8-10 에서 발전시켰다.
로마서 13:8–10 NKRV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5절: 서로 사랑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상호간에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구절에 명시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의 침투로 교회는 분열되고 쓰라린 분쟁에 말려들었다. 율법주의의 추종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서로 물고 뜯었다. 이것은 사랑의 유대감 속에 공존해야 하는 신자들의 성경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교회의 파멸, 즉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신앙고백을 잃어버릴 위험을 내포했다.
(7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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