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속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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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흔들림 속의 고백
제목: 흔들림 속의 고백
본문: 요한복음 11장 17-27절
본문: 요한복음 11장 17-27절
찬송: 543장
찬송: 543장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믿음이 흔들릴 때 두렵습니다. 기도해도 평안이 오지 않고, 말씀을 읽어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있다면 이렇게 흔들리면 안되는데”라며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르다를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실 때마다 그녀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예수님도 분명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이때 마르다의 믿음이 흔들렸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오빠는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께 간절히 알렸지만,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흔들려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진실한 고백을 붙드는 것입니다.
외면하지 않는 믿음
외면하지 않는 믿음
나사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로 왔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분주하게 장례를 치르는 중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집에 가만히 있는데 마르다만 일어나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빠를 잃은 슬픔과 예수님께 대한 실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아쉬움과 섭섭함 있음에도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b절에서 아쉬움을 담아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주님이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지금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뢰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을 이어갑니다.
“이제라도” 이 한마디 말에 마르다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날입니다. 2주 전 오후 설교 때 말씀을 드렸듯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흘까지는 무덤 주변을 맴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흘 째가 되면 천사가 그 영혼을 데려간다고 믿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마르다는 “이제라도”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늦었지만, 그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해주실지는 몰라도, 여전히 주님께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한 일이 풀리지 않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실망스러우면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어려운 일이 계속 되면 교회 나오기가 힘들어 집니다. 말씀을 읽어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성경책을 덮기도 합니다. 실망이 우리와 주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달랐습니다. 실망했어도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섭섭했어도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응답의 속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뜻대로 되지 않아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흔들렸지만 주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믿음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리라”(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르다도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지금 이 순간의 마르다를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빠의 죽음은 현실이었고 부활은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졌습니다.
우리도 천국을 소망으로 품고 살지만 때론 현실의 고통은 여전합니다. 부활을 고백하지만 지금의 슬픔은 가시지 않습니다. 믿음은 진리를 분명 알게 해주지만 우리의 현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부활 그 자체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활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어떤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이 사건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부활 그 자체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위로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교리도 아니며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나사로도 우리도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체의 죽음을 통과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갑니다.
이제 예수님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나사로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 그 자체로 믿고 받아드리냐를 물으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붙들어야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응답을 구하고 기적을 갈망하고 변화를 꿈꿉니다. 이같은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부활이며 생명이십니다. 부활과 생명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백
우리의 고백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는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아멘!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마르다는 긴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부활은 믿었지만 지금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기력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고백에 이르렀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같은 고백이 마르다의 입을 통해 나왔습니다. 슬픔과 흔들림 가운데 있던 마르다가 이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마르다의 고백은 진실했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여정을 걷습니다. 슬프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다가 붙들어야 할 것은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슬퍼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주님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흔들려도 괘찮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진실히다면 조금 이해하지 못해도 문제 없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게 필요한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입니다.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도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붙들며 살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 마르다의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는 연약합니다. 기도해도 평안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씀을 읽어도 위로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망하며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흔들려도 괜찮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을 붙드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몸이 아픈 분들이 계십니다. 마음이 힘든 분들이 계십니다. 가족 때문에 염려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업과 농사로 근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실망했어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시며 생명이심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마르다처럼 우리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진실하게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 입술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슬퍼할 때도, 흔들릴 때도, 이해되지 않을 때도, 이 고백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