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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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과 떡
기름과 떡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람나무 열매, 다른 말로는 올리브의 기름을 사용해서 성막 안에 있는 등잔불을 항상 켜놓으라는 말씀과, 또한 성막 안의 진설상 위에 놓인 떡을 안식일마다 교체해서 항상 진설해놓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때부터 레위기에서도 아마 몇번 등장했고, 저도 몇 번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올리브 기름으로 항상 켜놓는 등잔대는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심과 또한 제사장들이 영원히 하나님께 봉사드린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구요. 그래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이야기를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특히 진설상 위에 놓인 떡은 여섯개씩 두 그릇, 총 12개의 떡을 놓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구요, 또한 아론과 그의 자손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교체하고 나온 떡을 먹고,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치다가 먹은 적도 있고, 이걸 예수님께서 인용하셔서 “다윗도 안식일에 제사장이 먹는 빵을 먹지 않았냐? 나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 주워먹는게 뭐가 문제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성막의 기구, 등잔대와 진설상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굳이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삶 가운데 저희가 항상 믿음으로 느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기고 예배드리는 것도 저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삶 가운데서도 항상 예배드림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보시면, 3절에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8절에 보시면,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항상 진설하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등잔불과 진설상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바로 항상 켜져있는 등잔불과, 항상 진설된 떡 열두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제사장들의 섬김은 “항상 보이는 것”입니다. 매일 매시간 매순간마다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라
항상 ~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잘 아실텐데요, 이 말씀은 안 읽고도 바로 나올 수 있어야합니다. 한번 외워보실까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네 맞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 라는 말슴을 사도바울이 전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담임목사님이 언젠가 한 번 말씀 전하실때에 그 이후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구절도 있다고 소개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사실 이 “항상 기뻐하라” 이후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죽죽 내려가보면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길 원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영과 혼과 몸이 보전되기를 원한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이 한 구절만 똑 떼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말씀들과 함께 읽으면요,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전될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쉬고, 감사를 범사에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온전히 거룩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흠없이 영과 혼과 몸이 보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성
하나님의 편재성
오늘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다시 3절과 8절 말씀을 보시면,
“항상”이라는 단어 앞에 꼭 “여호와 앞에”라고 하는 단어가 붙습니다. 이것은 항상 등잔불을 켜둘 때에만, 항상 떡을 진설할 때 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실 수 있지만, 아무곳에나 계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이 계신 곳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구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찬송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항상 임재하십니다.
오늘 함께 새벽에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찾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등잔불을 켜고 떡을 진설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항상 하나님을 찾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경험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신성모독 재판
신성모독 재판
두번째로 등장하는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사람을 재판하는 내용입니다.
10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어머니가 이스라엘 사람, 아버지가 애굽 사람인, 혼혈이죠?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잡족들과 함께 나왔다, 다른 여러 민족들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나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애굽사람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물과 만나를 먹었고, 수많은 표적들을 봐온 사람입니다. 그냥 외국인이 아닌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니까 사람들이 모세에게 끌고가서 12절에 보시면 가둬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다고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4절부터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 저주한 말을 한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게 하라, 안수하라는 말씀인데, 그 하나님을 저주한 말을 듣고 느끼는 죄책감, 그 죄악된 말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온 회중이 돌로 그 사람을 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이건 사실 히브리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 하나님의 ‘야훼’라고 하는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서 저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을 저주하기 위해서 저주하는, 그냥 대충 “신”을 저주하는게 아니라 정확히 야훼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은, 16절에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반드시 죽일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모독하는 것
하나님을 “알고” 모독하는 것
저희가 흔히 하나님을 무한정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만 착각할 때가 많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풀네임을 정확하게 부르면서 모독하는 것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저희가 살면서 듣는 많은 간증들, “제가 예전에는 하나님을 비방하고 싫어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바뀌었습니다”하는 간증들을 듣습니다. 이건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알고” 비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그 수많은 역사, 애굽에 내리시는 재앙과 만나와 메추라기, 홍해를 가르시는 그 많은 표적을 보고, 또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문제인겁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냥 느껴지는 분도 아니십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성령을 알고 느끼고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고 비방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하면 “배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욕하는 말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고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해서 “사막잡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제가 봤는데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행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서도 “배교”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을 찾을 것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을 찾을 것
그래서 여러분 저희가 살면서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을 비방하고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을 도리어 찾으며 구하는 태도가 저희들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믿고, 큰 어려움이 닥치고 시험 당할 때에 우리에게 능히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면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지막으로 본문말씀 17절부터는 라틴어로는 Lex Talionis라고 불리는 동해형법, 복수법,이라고 불리는 법에 대한 내용인데요, 20절 말씀이 유명하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상처를 입히면 상처로 갚고,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으로 갚고,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으로 갚으라는 말슴을 하십니다.
복수가 아니라 공평
복수가 아니라 공평
이것은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복수”에 초점이 맞춰진게 아닙니다. 22절 말씀을 보시면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적용하라, 라고 말슴하십니다. 다른말로 하면 이방사람이라고 해서 때리면 그 때린 사람이 대제사장이어도 맞아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복수보다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말씀에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시니까 한 율법사가 “그럼 제 이웃이 누군데요?”라고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 고르고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인데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왔을 때에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성벽과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인데도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간호해준 그 사람이 바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어느 누구에게 치우치고 차등을 두시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게 하셔서 공평함을 보여주신 하나님과 같이, 사랑을 또한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누구에게나 전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