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끝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Notes
Transcript
사도신경
사도신경
찬송
찬송
486장 /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기도
기도
성경봉독
성경봉독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7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서론
서론
사무엘상 31장 = 사울의 죽음 이야기
사무엘상 9장부터 시작된 사울의 이야기
총 23장에 걸친 이야기
드디어 끝을 맺는다.
처음은 큰 기대로 시작하였으나
마지막은 큰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죽음, 인생의 마지막을 마주하게 된다.
어제 우리는 주일 설교를 통해 안식일에 대해 배웠다.
안식 = 쉬다
= 중단하다, 끝나다, 멈추다
안식일, 안식년 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끝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하루에도 끝이 있다.
일주일에도 끝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도 끝나는 날이 있음을 배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할 때가 온다.
물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 영생을 가졌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믿는가?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원한다.
분명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육체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운명이다.
물론 그 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육체의 죽음을 맞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달리 질문하자면
어떻게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 싶은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웰빙 =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웰다잉 =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 받는 시간 되길 축복한다.
본론
본론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길보아 산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28장부터 시작된다.
28장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블레셋은 수넴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길보아에 진을 쳤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두려운 나머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묻기도 했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고 만다.
그뿐 아니다.
사울 왕의 세 아들인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도 죽임을 당하고 만다.
요나단이 누구인가?
다윗과 뜨거운 우정을 나눌 뿐 아니라
과거 믹마스 전투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고 외치며
용맹스럽게 블레셋 진영에 뛰어 들어가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요나단도 이 길보아 전투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리고 이제 사울 왕의 차례가 되었다.
전세가 사울에게 불리하게 기울게 되었고
블레셋의 활 쏘는 군사들이 쏜 화살을 맞고
사울은 큰 부상을 입고 만다.
사울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곁에 있는 부하에게 이야기한다.
4-5절이다. 같이 읽어보자.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화살로 큰 부상을 입은 사울은
자신이 곧 블레셋 적군들에게 붙잡힐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울은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적의 손에, 그것도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손에 죽임 당하는 것을
큰 수치이자 모욕이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 곁에 있던 부하에게
그가 들고 있던 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명령한다.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부하는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아니 그 일 행하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아무리 상황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는 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죽인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사울의 일생이 이렇게 끝이 나고 만다.
그 모습을 본 그의 부하도 사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성경은 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한다.
6절이다.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이 전투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이 지역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보고
자신이 살던 성읍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 땅은 블레셋 사람들 손에 들어가고 만다.
사울의 죽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전투가 끝난 후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전장에서 노획물과 전리품을 취하던 중에
죽은 사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겨
블레셋 땅 사방으로 보내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길보아 산 근처에 있던 벧산 성벽에 못 박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했다.
이 소식을 요단 강 건너편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과거 자신들이 암몬 사람들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자신들을 구해 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야베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밤 길을 달려
벧산 성벽에 못 박혀 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시체를 거두어 야베스까지 갖고 왔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화장하고
뼈를 모아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일주일 간 금식하며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이 난다.
참으로 슬프로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죽음을 좀 더 묵상해 보고자 한다.
여러분은 사울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적들의 손에 붙잡혀 비참하게 죽기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모습이
어찌보면 사울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사울의 인생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연속이었다.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는 죄를 범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순종하고
아말렉 왕 아각과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겨 두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대신해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웠음을 알고도
다윗을 죽이고 계속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무슨 죄인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생명을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나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다.
그러함에도 사울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여겼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하나님께 대한 마지막 불순종이 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사울은 죽음을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황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자신이 추구하던 인생의 목적을 더 이상 이룰 수 없다고 느꼈기에
죽음으로 그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다.
사울은 추구하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받은 후에
점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권력을 좇아 살아갔다.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제사장들도 서슴없이 죽이고 말았다.
블레셋과의 전쟁도 그 승리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쌓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마음을 두었다.
사울의 인생의 목적은
높은 왕좌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울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모욕을 당하는 것은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수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결론
결론
어찌보면 사울은 나름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듯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어떠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어떠한 죽음이 명예로운 죽음일까?
육체가 상하지 않고 평안하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 웰다잉인가?
많은 이들이 이것을 바란다.
분명 은혜이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들과 우리 부모님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결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이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살아간 많은 선진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아벨, 에녹, 노아를 비롯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여러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
그러면서 35절 하반절부터 38절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35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들의 삶과 죽음이 명예로워 보이는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진정한 명예를 택한 것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해 보아라.
예수님이야 말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인 로마 군인들의 손에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라는 참혹한 형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죽이며 조롱하는 이들을 저주하기는 커녕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숨을 거두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이 명예롭게 보이는가?
예수님도 원하면 이러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모든 수치와 치욕을 기꺼이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울의 죽음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의 죽음이 하나님 없는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울을 떠나셨다. 버리셨다.
사울은 그 후 남은 인생을 하나님 없이 살다
하나님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죽음이 진정 비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가장 복된 줄 믿는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 싶은가?
이 시간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묻는 은혜가 있기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걸어가다
하나님 안에서 죽는 은혜가 있길 축복한다.
그러할 때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이 우리에게 있는 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