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2)
나의 자랑, 십자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8 viewsNotes
Transcript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네 마디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거의 한 번에 쏟아놓으셨다.
그것들 중 마지막 말씀이 가상 제 7언인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본문, 곧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다.
II.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II.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기도는 이제 당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드린다는 마지막 기도로 끝을 맺는다.
십자가에서 첫 번째 가상인 말씀인 가상 제1언에서도 마지막 말씀인 가상 7언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신 호칭은 “아버지”였다.
육신이 찢어지고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는 극한의 고통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를 누리시는 가운데서 찢어진 제자와 두고 가시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다.
A.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A.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첫째로, 이 말씀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도 역시 펄럭이는 큰 바람에 우연히 휘장이 찢어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 현상이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니라.” 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보도하는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영혼이 떠나신 후에 “이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라고 되어 있다(마 27:50-51). 또한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신 후 이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니라” 고 되어 있다(막 15:37-38).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것과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이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보도하고, 곧이어 예수의 죽으심을 보도한 것은 시간의 차이라기보다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으심과 성전휘장이 찢어진 두 사건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마태는 전자(죽으심)를 통해 후자(휘장의 찢어짐)를 해석하고 싶었고 마가와 누가는 후자(휘장의 찢어짐)를 통해 전자(죽으심)를 해석하고 싶었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건의 배열들 중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다.
다만 두 사건 곧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과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구속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게 한결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다음 두 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찢으심.
1. 하나님께서 찢으심.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종하실 그때의 휘장이 찢어졌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 “한 가운데”라고 함은 상하좌우의 한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좌우를 기준으로 “한 가운데”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이와 같이 성소의 휘장 좌우의 한 가운데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솔로몬 성전 시대이다. 가장 화려했던 성전이었으며 거기에 투입된 금만 약 272톤. 2025년 9월 현재 한국 시장 가격으로 환산할 때 약 50조 원어치였다. 이 성전은 주전 586년에 바벨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었다.
두 번째로는 스룹바벨 성전 시대다. 주전 538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그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 성전은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는데 이것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가 현저히 축소된 초라한 성전이었다.
세 번째로는 헤롯 성전 시대이다. 기원전 20년경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대규모로 확장하고 증축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성전을 매우 거대하고 아름답게 단장하였으니 예수 시대의 성전이 바로 이 해롯 성전이었다. 이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버렸다.
네 번째로는 현재의 성전시대이다. 헤롯성전 파괴 후 로마와 비잔틴 제국을 거쳐 7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자리는 7세기 후반에 지어진 황금돔 사원과 8세기 초 지어진 알아크사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슬람의 황금돔 사원은 이슬람 교도로의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바위 위에 세워졌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헤롯성전의 가장 중요한 공간은 역시 성소와 지성소였다. 성소와 지성소는 성전의 동쪽 입구로 들어와서 문을 통과하면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다. 성소는 동서 방향으로 약 200평방미터, 곧 약 60평이 되는 공간이었으며 거기는 금촛대 진설병과 분향단이 있었다.
거기서 반차당 수백에 이르는 24개 반차의 제사장들이 일주일씩 교대로 순번을 돌아가며 성전에서 섬겼다. 당번 제사장들이 기본적으로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와 개인들을 위해 제사를 담당해야 했다. 그 외에도 성소의 금촛대 관리, 매주 안식일을 올리는 진설병의 교체, 아침과 저녁에 올리는 분양과 각종 정결의식, 그리고 율법 교육 및 판결, 성전관리 및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지성소는 성소의 서쪽 끝에 위치한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파로켓”이라고 불리는 두꺼운 휘장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의미의 단어의 “휘장, 덮개, 가리개”등을 뜻하였다. 성소에서 “파로켓” 곧 휘장을 지나 들어가면 지성소가 나오는데 거기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오직 1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헤롯 성전의 지성소를 넓이는 약 100m²이고 곧 30평쯤 되는 공간이었다. 솔로몬 성전 시대에는 그곳에 언약개궤가 비치되어 있었으나 헤롯성전 시대에는 이미 그곳에 사라진 후에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다만 지성소에는 이전에 언약궤가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기초석이라는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청색실과 자색실과 홍색실과 베실로 천사인 그룹들의 형상을 화려하게 수놓아 만들어졌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얇은 천이 아니었다. 매우 두껍고 튼튼하게 직조된 직물이었다. 예수 그리스와 거의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의 유대 전쟁사 제5권 5장 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구조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휘장의 강도였다. 그것은 결코 찢어진 적이 없었으니 비록 두 쌍의 말들이 각 부분을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할지라도 그것을 찢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두꺼운 휘장이 태양 빛은 통과시킬 수 있도록 직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천사들의 형상을 수놓아 청색과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두껍게 직조되었으면서도 햇빛을 투과시킬 수 있었으니 아마도 지성소에서 성소의 등잔 불빛을 언뜻언뜻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파로켓”이 그렇게 신비하도록 아름다웠다고 한다.
휘장의 크기는 가로 길이가 약 10m 그리고 높이가 약 15m로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아 빈틈없이 완전히 구분하는 거대한 휘장이었다. 이것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헤롯성전과 성소 주변의 건축학적 구조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 헤롯 성전은 가장 멀리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거기에 낮은 돌 울타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곳을 넘어가는 이방인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를 것이라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소위 이방인의 뜰을 앞에 둔 돌담은 넘어서면 여인의 뜰이 있었는데, 유대인 남녀라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했다. 거기서 화려하게 장식된 구리로 만든 문을 지나면 이스라엘의 띠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직 의식법적으로 정결한 남성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으며 거기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다. 거기서 다시 금으로 장식된 웅장하고도 큰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성소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 더 들어가서 전방 20m 앞에 이르면 천정부터 바닥까지 건물 전체를 가로막는 듯한 휘장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그 “파로켓”, 곧 휘장을 지나면 바로 지성소에 이르게 된다.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사실을 의미한다.
첫 번째로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성소와 지성소 사이 구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마주하기 위해서 위하여 오직 대제사장들만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가도록 구분된 공간인 지성소에 이제는 제사장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들여 들이셔서 이루신 구속의 결과다.
두 번째로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는 모든 신자들을 제사장으로 불러주셨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장 9절). 이제 신약의 제사장들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어떠한 인간 중보자의 도움 없이도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소를 지나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의 중보도 없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뿌려진 핏기를 자기의 자기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서 찢어진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에 이를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별이 사라졌다. 또한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에 접붙여져 영적으로 한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결코 더 이상 인간중보자 곧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의 도움 없이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당신을 만나고자 찾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만나주신다.
2.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
2.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분을 없이 하였다. 그런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그 일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실행하신 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온 인류의 비극의 근원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생명적 교통의 단절이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영혼이 마땅히 받아 누림으로써 참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한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간이 겪게 된 가장 큰 비참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여기서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은 그리스 언어적으로 “미치지 못하다. 모자라다”를 의미한다.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에 다 다를 수 있어서 신적 생명 혹은 영원한 생명, 영적 생명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 영혼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고 그분과 사랑으로 교제하며 하늘에 신령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은 그 모든 좋은 특권들을 한 번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이었다.
예화
덫에 걸린 채 몸부림치다가 죽은 멧돼지의 상흔과 눈물, KBS 같은 데서 특집으로 촬영을 했는데 덫을 놓은 거야. 거기에 이제 멧돼지가 걸렸어. 그런데 이제 탁 채워지잖아. 그러니까 막 이렇게 이렇게 발을 집어놓으면 탁 날라와서 이렇게 양쪽을 이렇게 탁 채워버리는 것은 빠져나올라고 막 몸부림 치니까 이게 살갗이 다 찢어지고 마지막에는 피가 나고 뼈까지 드러나는 거야. 그런데 결국은 거기서 못 나오는 거지. 예를 들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쪼여 오니까 그래서 이제 죽은 건데 인간의 처지가 그랬었다 그 얘기예요.
인간의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태어났고 육체는 그러한 영혼과 동행하도록 태어났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대부분 인간이 절대자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선도권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다.
그래서 하나님(God) 당신께서 믿게 하시지 않고 믿게 된 자가 없으며 그분이 믿게 하신 자는 믿게 믿지 않게 되는 법이 없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 믿게 하지 않으셨기 믿지 않았다고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시지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믿지 않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있다. 잊지 말자.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일어난 일이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 대신 오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께만 찬성과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B.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함.
B.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함.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도 끝났고 세상에서 사랑하던 모친 마리아, 어여쁜 제자 요한과도 헤어지셔야 했다. 이제 숨을 거두시면서 보시는 광경은 그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몸으로는 마지막 보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것은 그분의 영혼뿐이었다. 인간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고 육체의 죽음은 영혼에게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 전자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해서 일어난 일이며 후자는 원하지 않음에도 발생한 일이다(어거스틴).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우리와 달리 죄 없이 육체를 버려야 했으니 이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비록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고 계셨으니 그 죽음의 끝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지옥으로 들어가던 단테와 같은 처지가 아님을 아셨다. 단테 알리기에르(1265-1321)는 자신의 책 신곡에서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음으로써 천국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끝에 자신의 영혼을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따스한 두 손에서 천국이 시작됨을 아셨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하여 잘 훈련된 산파의 자상하고 따뜻한 손길이 준비된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비록 인성으로 온 몸에 맹수의 이빨을 뜯기는 것 같은 고통을 겪으셨으나 신성으로는 아무 고통도 겪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죽음이 가까울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과 교제 속에서 행복을 누리셨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영혼을 기꺼이 신실하게 아버지께 부탁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영혼,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그 날에는 이제껏 살아서 누렸던 모든 사람들과의 교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이 세상에 두고 가야 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 육체와 함께 왔지만 죽을 때는 그 정든 육체마저도 두고 가야 한다.
단순한 진리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가? 우리는 어리석게도 죽으면 모두 두고 가야 할 것들을 영원히 가져가야 할 것처럼 사랑하고 저 세상까지 가져가야 할 유일한 사물인 영혼은 영원히 세상에 버리고 갈 것처럼 하찮게 버려두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가엾은 우리의 영혼이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우리의 영혼은 진리의 빛으로 그토록 자주 양식을 삼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집요한 세상 사랑에 눈 멀고 귀 먹어 무지한 마음은 찬란한 지혜의 광명으로 나아오기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런 의미심장한 기도 곧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를 드릴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신 이 마지막 기도에 대해 종교개혁자 쟝 깔뱅(1509-1564)은 자신의 책 누가복음 주석 제 288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한 진실로 그분은 여기서 우리에게 독특한 경건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어 가시는 동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보호에 맡기셨으니 삶으로써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신 그분께서 또한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가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지를 당신의 목소리로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사물,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인성의 그늘 아래 감추시고 평생 사셨다.
또한 인성으로서는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위로의 단절도 경험하셨지만, 신성으로는 한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져 본 적이 없으셨다. 지금을 앞둔 예수 그리스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섬기시던 이 세상은 타향과 같고, 천국은 고향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돌아가실 그 고향의 시작은 자기의 영혼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생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섬기신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다. 일체의 사사로운 쉼이 없이 자신의 육신에 온 힘을 모두 다하여 소진하신 생애였다. 그분의 생애는 토혈의 생애였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부활과 승천을 거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길이 열렸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영광과 쉼을 얻으실 것이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어떻게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신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모두 다 이루어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일평생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도 전파의 사도로 살았던 그리스도의 노예, 사도바울를 생각나게 한다. 그 또한 임박한 순교를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말씀을 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회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 4:7-8).
그러므로,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자. 육체를 위해 심는 삶을 살다가 거기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인생에 남은 날들을 온전히 성령을 위하여 심음으로써 거기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인가?(갈 6:8). 계속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시다가 마지막 남은 육체마저 옥합을 깨트리듯이 십자가에 못 박혀 깨뜨리셨다.
거기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써 임마누엘의 샘을 이루어 우리를 구원하고 죽으시면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하직할 터인데 그때 우리도 예수처럼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아버지께 부탁할 수 있을까? 그날에 주께 부끄러움 없도록 마음을 다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에 살아계심을 전하자.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는 동안에 우리의 입에 혀가 굳어지기 전에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여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C.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짐.
C.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짐.
셋째로,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 놀라운 사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주는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이는 예수가 인간이기 전에 창조주요, 구속주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와는 다르게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죽으심임을 보여준 것이다. 대지가 진동한 것은 그분의 죽음이 가져올 심판의 경고였고 바위가 터진 것은 그분의 죽음이 가져올 구원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무덤들이 열려 살아난 것은 사탄의 마지막 카드인 죽음이 무효가 된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덤에서 살아난 그들로 하여금 친히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성도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살아서 예수 그리스의 부활을 증거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였을 것이다. 이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진 이 사건은, 또한 앞으로 주 예수 당신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나타날 부활의 소망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일어난 여러 초자연적 현상들을 생각해 보라. 온 땅을 뒤덮은 칠흑과 같은 어둠이나 땅에 땅이 흔들리는 지진 그리고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에서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 등은 예수의 죽음이 갖고 있는 우주적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을 인류를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대리적 속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 사건들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놀라운 인류 구원의 역사적 중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모두 십자가의 구원을 믿게 하려는 동시에 그분이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이제 사탄의 마지막 카드가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음을 선포하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하여 초대 교회 교부인 유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342-420)는 자신의 책 마태복음 주석 제4권 2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진이 일어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원소들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현재의 심판의 두려움을 보여주고 모든 이를 미래의 심판으로 초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위들이 찢어진 것은 돌 같은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깨뜨려 부활을 증언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들이 열린 것은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나게 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온 세상과 인류와 우주에 대한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접혀져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비밀이다(고전 2:7, 골 2:3). 그리고 이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펼쳐진 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그래서 한 교회의 세워짐은 물론 나 같은 한 사람의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조차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과 연결되어 있으니 그것의 한 부분이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한 사람의 구원과 멸망 그리고 한 교회의 설립과 흥망을 서로 엮어 가면서 구원사의 직조물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구원 역사는 세속 역사와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듯이 상호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는 하나님의 경륜의 밑그림을 그려 준다. 우리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죄인들이었다는 사실과 오직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설교자인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1834-1892)는 자신의 설교 <애통하는 자의 위로>에서 죄에 대한 애통과 눈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말하였다. “마른 눈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와 아직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위로와 하늘나라의 실체를 경험할 수 없다.
III. 적용과 결론
III. 적용과 결론
도대체 그리스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살이는 마치 쏟아지는 폭우에 다 젖은 옷과 물에 흠뻑 젖은 운동화를 신고 질척이는 뻘밭을 걷는 것과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우리의 영혼의 날개가 없어서인가? 있기는 있어도 짊어진 세상 염려와 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파닥이는 날갯짓에도 불구하고, 날아오르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는가? 삶을 통해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면 참으로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음을 통하여 삶을 보지 않으면 참으로 해아래서 우리가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다음 예수께서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구원받을 우리 때문에 기쁨으로 그 큰 십자가의 고통을 모두 감당하셨다. 그때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우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울어드릴 때이다. 그때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고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거저 얻은 생명을 바칠 때이다.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마치고 천국에서 그분의 품에 안기는 날까지 시간이라는 편지지에 눈물을 먹물 삼고 피를 물감 삼아서 그분을 향한 사랑을 마음껏 쓰고 그리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다.
아 읽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해요.
좋으면 먹고 대지와 내용들의 흐름을 잡았어도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 그것은 이 내용들이 이렇게 풍성한 내용들이 있다는 것에도 매번 놀라지만 놀라게 되었고 특히 이제 그 성전은 네 번째 성전까지 이렇게 자세하게 그리고 또 휘장에 대해서도 무게와 길이와 너비와 이런 것들을 딱 성도들이 들었을 때 되게 신뢰성도 가고 또 예배 올 때마다 본인들이 얻게 되는 그런 깨달음과 새로운 또 지식들도 있다는 것들에 대해서 기대하고 그런 마음들이 커질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늘 숙제지만 저희들이 대지 잡는 거 이런 것들 훈련을 해왔는데 그 안에 철저하게 그렇게 경험을 지지 그렇게 해서 그 내용을 담을 것인가?
그것도 하나의 숙제이자 감탄으로 저는 아버지 손에 우리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이 참 복제되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이 부분이 우리가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전하고 전도하고, 또 삶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이 저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되고 그런 부분들을 이렇게 보여줄 수 있는 설교 설교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고요.
그리고 그 하나님 손에 부탁할 수 있다는 그 친밀감 속에 내가 살고 싶다는 그런 소마음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손에 부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 안이나 교회 밖에 있는데, 그런 그 부담감에 그런 생각도 듭니다. 할 수만 있다면 설교를 잘 준비해서 하나님 손에 모두 다 부탁할 수 있는 그런 회심이 있는 설교였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런 전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예 저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거나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라고 하는 이 부분에 주목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이 구원 사역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대목이 굉장히 도전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파로케라고 하는 정밀함 그리고 상세함이 그림이 그려지게 되기도 했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길을 여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 이것에 대한 큰 도전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을 이렇게 설교 중에 강조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좀 떠올랐고요.
그리고 인용하는 면에 있어서도 저도 이 부분을 똑같이 인용을 했는데 왜 이렇게 좀 다를까 이런 느낌도 좀 들었고 이걸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설득력 있고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그런 내용들이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대지마다 나오는 것들이 저에게 굉장히 도전이 되었고요.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그분에게 생명을 바칠 때라는 부분. 그래서 이런 표현을 어떻게 도저히 도대체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편지지에 눈물을 먹물 삼고 피를 물감 삼는다는 이런 표현은 너무나 이렇게 도전을 주는 표현인데 이런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그런 논문이었습니다. 저도 이번에 주에 설교를 했었는데 한 달 제가 그렇죠. 다루지 못했던 것은 마지막 실언을 끝으로 가상 실언의 클라이막스를 찍고 이제 성도적에 도전을 줘야 되는데 저는 PT가 좀 잘못됐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함, 감사함에 초점을 두고 가셨다면 오늘 목사님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을 극대화시켜 상기시킴으로 우리가 어떻게 죽었어야 됨을 그러니까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을 기억하며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해 울어야 될 때라는 도전이 아 더 맞구나 이렇게 예속에서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억지로가 아니라 정말 기쁨과 나를 위한 대속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살아가야 된다는 걸 놓친 것에 대해서 바위가 터짐은 전혀 다루지 않았던 본문이었는데. 이번 주에 새로 다시면서 유세지우스에 있는 내용들 굉장히 새롭게 다가와서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목상의 설교 그 원고물에 대한 것이 먼저 완성되기도 하고 보존이 대략적인 어떤 바닥은 작지만 그것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마치 골다공증 환자처럼 구멍이 송송 나 있는 본 것 같고요. 사실 이 설교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보존되고 좀 각오가 된 것은 나도 좀 이렇게 꼼꼼하고 깊이 있게 풀어가는 설교를 하려고 해야겠고 그리고 그렇게 좀 공경을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은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 설교를 오래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이렇게 꼼꼼하게 풀어가는 설교 방식이 어느 정도 조금 있어서 설교를 할 때 사람들한테 그것에 대해서 막 이렇게 푸는 사람들의 반응은 뭐 그렇게 설명을 해야 되나 그렇게 막 설명하지 말고 그래서 우리 보고 뭘 어쩌라는 것에 대한 도전을 주면 더 나을 텐데 계속 이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좀 약간 반감을 갖는 청중들이 오히려 있어 와서 설명 그만하고 메세지를 주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가지고 사실 이런 방식을 이제 다시 제가 좀 피하려고 피하려고 쭉 해왔거든요.
그런데 다시 한번 옥상의 설계를 보면서 이런 깊이 있는 해설이 결국은 진리에 대한 경험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가는데 여기 부족한 것은 이렇게 보는 것도 있지만 또 그것을 잘 풀어가는 방식의 문제도 있다라는 생각도 좀 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 아이가 이 부분에서도 너무 저는 단편적으로만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으로만 본 것 같은데, 이것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찾아냈다는 데서 이제 보면서 질문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3쪽에 보면 중간에 인용문 밑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사물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영혼을 사물이라고 이렇게 쓰신 구체적인 이유가 아 영원히 사물입니다. 사물입니다. 사물입니다. 그런 물질과의 차이는 있겠죠. 개념이 물질. 물질보다 더 큰 개념 레븐 라틴어의 레븐이라는 단어인데 요새 다시 그거는 사물. 그러니까 물질에 묶이지 않는 것도 다 사물이에요. 영적인 것도 다 사물이에요. 맞아요? 인격체도 사물이에요.
인격체도 사물. 3페이지 맨 하단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원수들이죠. 원수가 맞나요? 원소 원소 거기 밑에 나오잖아. Naturam Elimenta 원소 자연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구성물들이 있잖아. 그것들이 이제 혼란스럽게 되는 거지. 왜 가만히 있는데, 왜 바위가 터지냐고 그 얘기야.
원수가 아니라 원수 아니고 밑에 두 번째 줄에 라틴어 본문에 보면은 나오려나? 스테라의 모터스박투스에스트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땅이 움직였습니다. 부트에스트 유다이에스트젠트의 갠틸레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디덴테스를 보았습니다. 오프라이터르 나뚜랑 엘레멘터 투투바디 그러니까 뭐야? 자연의 원소들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그렇게 이제 되는 거죠. 목사님 죄송한데 하나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이제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데 부활 전에 이렇게 살아난 걸로 명시하는 게 맞습니다. 살아났는데 그 사람들은 이제 그냥 자연적인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보는 것이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개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진짜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안 그렇겠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안 믿을 수 없는 빼박의 증거겠지. 그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그럼 목사님 그 살아난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인데 그분 그분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셨을까요?
부활의 그게 무슨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렇게 무덤이 터지고 부활을 하시잖아요. 하잖아요. 구원받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그 구원받는 이 부활한 그 사람들의 이게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어떤 그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겠지. 그리고 그 부활과 자신들의 부활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그럼 목사님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실재했던 사람들이고 그리고 이 사건은 이 당시에만 한정적 사건으로 일어났던 것이지. 한정적으로 일어났지 않은 같은 사람들이 반복됐다고 볼 수 있는 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 마디가 다 이루었다인데 그게 구원의 사역에 완성을 그렇게 표현하신 거라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여섯째 날 창조사역이 다 완성됐다라고 하는 이 부분이 언뜻 떠올랐는데 이런 연관성이 혹시 있는지 그것까지 연관하는 거는 좀 너무 알레고리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왜냐하면은 그거는 뭐 날짜 날짜의 문제인데 이것도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니까 그래서 말이죠. 내가 제안을 하는데 이거야.
이거를 꾸겨지지 않게 잘 가지고 가서 그래서 토요일날 복사를 해서 하고 그다음에 설교를 한 다음에 그다음에 구경력의 시간이나 이런 시간에 성도들이 이거를 손에 쥔 채로 나누게 하라고 정할까 못하겠으면 그냥 돌아가면서 한 번 더 읽어보자고 하고 그때 질문하면 질문 받고 역시 파일 파일로 받을 수 있지 그래서 하나 더 제 질문 그리고 지난 다 이루었다 보니까 목사님 9월 28일 날 선교하셨던 더라고요.
그런데 이 내용들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바위 터지는 사건 교인들이 이제 이렇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설교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청중들이 함께 성장을 해요. 그래서 히브리서에도 비유가 나오거나 음식을 먹되 이렇게 무른 음식만 먹는 게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런 거는 상당히 단단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을 이제 먹고 소화만 시키면은 우리의 이제 희망은 굉장히 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포기하지 말고 그러니까 절대 하지 말아야 될 게 뭐냐면은 이렇게 설계하면 교인들이 지루해 지루해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내가 옛날에 교수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아니 교수 된 지 한 5년 됐을 때 일이구나. 어느 교회에서 나를 연희교회라고 신촌에 있는 교회인데 그 교회에서 고등부에서 나를 수련회 강사로 불러서 교회에서 수련회 뭐 설교하러 올라가라 그러는데 어떤 사람이거든요. 국사님 오늘 설교가 60분에서 90분쯤 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60분은 좀 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해요. 고등학생들이 다 지루 지루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될 생각이 들고 처음이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도사님 기도나 열심히 하시오. 그리고 그날 설계를 했는데 그 간도사가 의자에서 내려앉아가지고, 거기 복도에 엎드려가지고 회계 기도하는 걸로 마무리가 됐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서 내가 얘기했잖아. 내 설교하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주님이 들어와 주십시오.
충격적인 시리즈가 시행됩니다. 미움과 용서입니다. 미움과 용서.
벌써 내가 설교 세 번째 설교를 준비했던 1번 2번 준비해 놨고 지금 이제 물론 초보지만 어저께 이제 양평에서 주일 예배들이 오는 길에 허가가 안 좋아서 그 바람분들 카페 벤치에 앉아서 1시 반부터 6시 반까지 7시까지 이 이 편의 초고를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 비용과 용서는 굉장한 시리즈입니다.
내가 설교를 목회를 하면서 십자가 설교를 들으면서 그 안 울던 뺀질 뺀질하던 교인들이 미움과 용서를 들으면서는 거기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거든. 그 미움의 문제. 특히 요즘같이 이렇게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막 이런 시대에 또 교회에서 실제로 막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그런 곳에서는 너무나 걸리니까 그래서 이거를 내가 혼자 도저히 할 수가 없어가지고 알바를 썼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제 친구인데 그 107을 졸업하고 이제 종신을 진학하려고 지금 이제 준비하고 있는 그거를 미움과 용서 1, 1편을 한 페이지 반도 채 못 썼는데 자기가 너무 마음에 찔렸다고 그런 얘기를 아까 하더라고. 잘 넣어가지고 가서 그렇게 한번 해봐요. 그런데 그게 조금 읽으면서 가르쳐줘. 자 그런 게 이제 딱 기억에 이렇게 나오는 거야.
그렇게 연습해놨다가 내가 어떻든지 간에 발화하기는 11월 11월 둘째 주에 우리가 내가 출장 가기 전에 수업할 그때에 책이 나오게 하려고 그래 그 전에 몇 권씩 필요한지 다 물어볼게. 그래서 비용은 별로 안 들어. 여기서 출판사 안 보내고 그냥 여기서 다 디자인해가지고 여기 복사하는 집에서 복사해가지고 그냥 이렇게 예쁘장하게 만드려고 하거든요. 그거를 가지고 밀고 나가요 아 이렇게 성전이 이런 거였구나. 그럼 설교를 들을 때 이건 정말 몰랐던 건데 놀랍다 그런 게 있어야지 되잖아.
그게 지난번에 우리가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지만 뭐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앗아갈 때 그렇게 이런 게 이런 식 이런 방식의 이것들이 말하자면, 그렇게 지식을 찾는 것을 가리키는 거야. 그냥 뜬구름 없이 그냥 성전, 성서의 휘장 한가운데가 쭉 찢어졌습니다. 성소가 뭔지 성소가 찢어졌다는데 그거는 무슨 의미인지 또 장막 시절의 성소와 성장 시절의 성소는 어떻게 다른지 그러면 뭘 다 알았게 이야기를 해야지만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것 아니야.
그거를 지치지 말고 열심히 해서 그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이런 식으로 계속 공부 한약 가면 자기 자신이 공부가 되잖아. 그야 이거 이 시간은 이거 아니 20시간 걸리는 거야. 이거 준비하는 거고, 그래서 나는 이제 한 번에 두 개씩 설계 가르쳐주면 못할 것 같길래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기술적으로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다음 주에 우리 모임에는 좀 더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되겠지만, 어쨌든 나와 못 만나는 날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자급자족해서 이렇게 해서 스낵을 좀 주시고 그래서 이거는 그냥 예전에 소개했던 거와는 다른 부분들을 할 수 없는 다른 다른 본문도 있고 같은 본문도 있는데, 일 일단 내가 그 지난 설교를 안 본다는 거 그리고 완전히 처음 이 본문을 봤다고 치고 그다음에 이제 전개를 하는 거죠. 시리즈는 몇 주 예상하십니까?
박사님 이거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다가 보니까 막 너무 엄청나서 도저히 1주에 못해가지고 사실 1주에 할 거를 하다가 보니까 지금 이제 3주가 된 거거든. 쉬지는 않을 것 같아 내 생각에는 그냥 한다. 다섯 번 정도에서 그냥 끝내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도 들고 어쩌면 세 번에서 끝날지도 모르겠고 세 번은 좀 더 할 것 같아요. 네 번이나 다섯 번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그렇게 볼까요? 네. 인간용사라는 그 세계 3G를 놓고 현수막을 하나요?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다시 비교하면서 봤는데 너무 너무 가상치료를 하고 비교하면 안 되죠. 네. 확장도 확장이지만 다루지 않은 부분들을 너무 많이 다루셔가지고, 사실 자산시험 보고 좀 도움을 받으려는데 너무 여러 가지가 너무 새로운 것들이 많이 많아서 그냥 가정처럼 뭐 원고도 1번도 안 봤으니까 과거에 한 설교를 똑같은 부분이라도 예전에 한 설교를 전혀 안 보고 그다음에 이것이 처음이다라고 생각하고 쓴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