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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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1-2:1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오늘은 ‘배신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으신가요? 작은 약속을 어기는 일부터, 크게는 믿었던 사람에게 큰 사기를 당한다던데, 평생 믿었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는다던지, 배신이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습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내 비밀을 이야기 해줬는데, 그 친구가 그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버린다던지, 가족들이, 내 진심을 외면한체,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직장에서 함께 한 동료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길 때, 우리는 이럴 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운함과 분노, 그리고 깊은 상처를 느낍니다.
사람이 크게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바로, 배신감이지요. 왜냐하면 배신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 믿었던 사람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했던 만큼, 기대했던 만큼, 더 크게 무너지는 감정이 바로 배신감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배신감을 느끼신 적이 있을까요? 많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 1장은 바로 그 하나님의 배신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호세아서는 선지서인데요,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음란한 여인을 취하라” 이 명령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고발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경험하고 계시는 마음의 고통을 이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사랑했습니다. 마치 음란한 여인과 같지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신의 남편이 있음에도, 다른 남자한테 한 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사랑하는 이에게서 오는 깊은 배신의 아픔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뼈아픈 배신을 경험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깊은 배신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관계를 끊어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배신감 속에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배신보다 깊고, 상처보다 오래 남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며 알기를 소망합니다.
첫번째 내용은 그렇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요.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선지자 호세아의 삶은 굉장히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호세아와 음란한 여자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신이 가진 모든 애정과 사랑과 은혜를 그들에게 쏟아붓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고 있던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을 향한 광야의 여정 중에, 만나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외적으로부터 이방민족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그 땅을 정복하는 과정 중에서도, 친히, 모든 전쟁을 주도하시고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그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 그들은 급속도로 타락해 갔습니다.
오늘 본문이 호세아서인데요,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학자들은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했을 때에, 북 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 2세가 활동했던 시기로 보는데요, 이 여로보암 2세 때 북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고 합니다. 국토가 넓어지고 무역도 활발해지고 백성들은 풍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타락 그 자체 였습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치와 사회와 종교는 타락의 절정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약 30년 동안, 왕이 6명이 바뀌었고요, 그중 4명에 쿠데타로 죽었습니다.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과 부자들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빈부격차가 더 심해지는거죠, 가난한 자들은 억압당하고요, 정의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간음인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잘 사는 나라 같았지만, 안에서는 썩어져가고 있습니다. 곧 있을 멸망도 알지 못한채,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그들의 모습을,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이스라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은 우리 가운데에는 없습니까? 예수님께 놀라운 사랑을 받고,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 되었음에도, 그분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영적 간음을 저지르는, 다른 것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없습니까?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고백을 넘어서 삶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매 순간의 선택의 순간마다, 이것이 주님을 더 사랑하는 길인가, 이 질문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면서, 영적 간음을 저지르는 삶이 아니라, 주님만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복된 하루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두번째 살펴볼 부분은요,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세 자녀를 낳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그 이름들의 의미는 상징인데요, 특별히 하나님의 상처난 마음을 담은 메시지입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4절에 보면 ‘이스르엘’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흩으신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피 흘림과 폭력을 심판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번영했지만 그 번영 이면에는 불의와 폭력, 부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부패한 구조를 흩으시겠다 하시는거에요. 사랑이 없는 번영은 결코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죠.
둘째 딸의 이름은 6절에 보면요, “로루하마”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긍휼을 입지 못한 자” 즉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늘 긍휼을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신데,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끝없이 사랑했지만, 계속 거절당한 배신감을 가진 그 마음의 절규인 것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9절에 보시면 “로암미”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들을 사랑하며 의지했기 때문에, 그 언약의 관계인, 왕과 백성의 관계마저 끊어지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아니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거에요. 하나님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분의 진노와 더불어, 사랑의 배신감과 좌절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자녀의 세 이름은, 지금 배신감을 느끼는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사랑했지만, 배신감으로 인하여, 사랑의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할 때, 상처를 받고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랑이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으면요, 배신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배신이 너무나 아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감정이 없으실까요? 하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배신감을 느끼십니다. 우리의 외면과 무관심에 상처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더 의지하고 사랑할 때, 그분의 마음은 찢어지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런거에요. 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받을지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겠지, 복 주시겠지, 물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면요,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요. 이런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거에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게 사랑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어떠냐?”는거지요. 우리는 종종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어차피 용서한다며 아주 가볍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 뒤에는 언제나, 아들을 버리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상한 마음과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 새벽 시간,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도 시간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2장 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원래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로루하마였는데, 앞에 로가 빠지면서 암미, 루하마라고 합니다. 이제 로라는 것이 부정어이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라고 했었는데, 하나님이 말을 바꾸세요. 이제 너희는 내 백성이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배신감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요. 이 일은 배신을 한 쪽에서 용서를 구해야 풀어지는 것이 마땅함에도. 하나님은 스스로의 마음을 풀어버리십니다. 그 배신을 사랑의 회복의 자리로 바꾸어버리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신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은요 우리가 멀어진 거리보다 더 멀리, 우리가 닫은 마음보다 더 깊이 다가오시는거에요.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 실패했다고 꺾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끝까지 붙드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배신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것은 우리 입장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마무리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벽에 우리를 깨우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며, 주님보다 나 자신을 더 의지하며 살아온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자리한 영적 간음과 배신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났을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너는 내 백성이다” 말씀하시며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그 신실하신 사랑 앞에 감사와 감격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이 새벽에 우리의 마음이 다시 주님께로 향하게 하옵소서.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신랑 되심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배신으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덮으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붙잡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마음을 느끼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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