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2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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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성도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세상의 모든 염려와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 앞에서 때로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과 20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구절만 보면, 아브라함은 마치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처럼,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속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오히려 우리와 닮아있는 연약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음 위기가 닥치자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조급함에 빠져 이스마엘을 낳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진짜 아브라함의 모습일까요?
한쪽에서는 완벽한 믿음의 영웅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실수투성이의 연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이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실패로 얼룩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작품으로 빚으시고, 결국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1. 말씀의 배경: 로마 교회의 영적 전쟁터 (6분)
1. 말씀의 배경: 로마 교회의 영적 전쟁터 (6분)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이 왜 이 편지를, 그리고 왜 하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는지 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도가 함께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AD40년 경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유대인들이 로마를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AD 54년에 네로 황제가 즉위하자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5년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끌어 왔는데 다시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행동들에 대해서 옳지 못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두개의 그룹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먼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해방감 속에서, 율법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을 답답하게 여기거나 무시하려는 교만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행위의 의를 내세우며 교만해지고, 다른 한쪽은 자유를 방종으로 삼아 교만해질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로마 교회들에게 쓴 편지가 바로 로마서 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차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반박할 수 없는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바로 유대인의 육신의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행위를 받기 이전에 의인이라 인정받았으면 유대인 그리스도의 율법적 교만은 무너지고, 이방인들은 오직 은혜 앞에 겸손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기초: 나의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 (10분)
2. 믿음의 기초: 나의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 (10분)
우리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경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묻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너는 지금 누구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치는 믿는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7절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두 개의 헬라어 동사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입니다. 여기서 '살리다'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단순히 기절한 사람을 깨우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시체, 그래서 썩어져가는 상태에서 완전한 새 생명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몸은 백 세가 되어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사라의 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로 그 죽음의 현실 한가운데서,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둘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입니다. 여기서 '부르다'는 헬라어로 '칼레오(καλέω)'입니다.
이것은 그냥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즉 그분의 말씀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창조적인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세상에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주관적인 믿음'**은 때로 연약하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날씨처럼 변하고, 우리의 결심은 사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흔들리는 나의 믿음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믿음의 대상, 즉 '객관적인' 실체이신 전능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에 '죽은 것 같은' 영역이 있습니까? 재정적으로, 관계적으로, 혹은 건강의 문제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까?
혹은 내 삶에 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바로 이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과정: 실패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열심 (12분)
3. 믿음의 과정: 실패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열심 (12분)
그렇다면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삶은 늘 믿음으로 충만하여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창세기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9절이 보여주는 그의 견고한 믿음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빚어내신 결과물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아브라함의 삶은 수많은 실패와 실수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으로 갔지만, 그 땅에 기근이라는 첫 번째 시험이 찾아오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신, 스스로의 방법으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바로 그곳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약속보다, 눈앞의 바로 왕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또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느껴지자, 창세기 16장에서 그는 인간적인 조급함에 빠져 아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계획을 앞세운 분명한 불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위대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 위대한 이유는, 그의 실패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내를 속였다고 해서 "너는 거짓말쟁이니 이제 끝이다"라고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로의 집에 개입하셔서 사라를 지키시고, 아브라함의 실패를 수습해주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해서 "약속을 믿지 못했으니 너는 자격 박탈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횃불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독려하시고,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시며 정체성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성공을 보고 의롭다 칭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합니다.
이든이가 노래를 잘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의 작은 믿음의 선택 하나를 보시고 그의 삶 전체를 의롭다고 평가해주신 것입니다.
4. 믿음의 절정: 실패를 넘어선 담대함 (10분)
4. 믿음의 절정: 실패를 넘어선 담대함 (10분)
다시말해 하나님이 의로 여겨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포기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삶속에서 가장 순종하기 힘든 상황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마침내 '죽은 몸'을 통해 얻은 기적의 아들, 그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과거의 아브라함이었다면 결코 통과할 수 없었던 시험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두려워 아내를 버렸던 그가, 어떻게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수십 년의 연단을 거친 아브라함은 이제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조오포이에오의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으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은 당시 그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그는 '설령 내가 이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드려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라도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이제 문제 해결이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선택하는 믿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신약 시대에 와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불과 몇 시간 뒤 힘없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는 처절한 실패를 맛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며 과거의 삶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실패의 현장, 그 절망의 바닷가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숯불을 피워 조반을 먹이시며, 세 번 부인했던 그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그의 무너진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비겁한 어부는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외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예수님을 죽였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이 주신 담대함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실패를 덮어주시는 은혜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낸 것입니다.
(결론 - 6분)
(결론 - 6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의 위인전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23절과 24절에서 이 모든 기록이 바로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라고 선포합니다. 이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 역시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수많은 실패와 의심, 그리고 부끄러운 순간들로 채워져 있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내 자신의 모습에 너무나 실망하여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을까' 깊은 자책감에 빠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의 자리에 찾아와 다시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계좌에 '의로움'을 입금해주시는(로기조마이) 분입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우리를 빚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은 25절의 복음으로 가장 확실하게 우리에게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 아브라함과 베드로가 저질렀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기 위하여, 즉 법적으로 완전한 무죄와 의인의 신분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는 나의 행위나 믿음의 수준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과거의 실패에 매여 있지 마십시오. 지금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실패자 아브라함을 끝까지 붙드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배신자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동일한 은혜와 신실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잡고, 나의 실패를 빚어 믿음이라 불러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 안에서, 다시 한번 주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이
완벽함이 아니라 신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 앞에서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위에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다시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주님이 빚으시는 믿음의 이야기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