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공정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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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불공정한 은혜
본문: 역대하 33:1-25
[서론]
우리가 보는 역대기에서 만나는 유다 왕들중 가장 선한 왕은 누구일까요?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정화하여 신앙개혁을 이끈 선한 왕입니다.
그럼 유다에서 최악의 왕은 누구일까요?
모든 유다 왕들이 행한 악보다 더한 악을 저지른 왕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입니다.
가장 선한 왕의 아들이 가장 악한 왕이 되었다는 사실부터가 충격입니다.
므낫세는 모든 악한 왕들의 끝판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9절이 전부 그의 악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했던 신앙개혁을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아버지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 숭배를 했습니다.
또한 아세라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별들까지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주님 성전 안에도 우상제단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인신제사도 드립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고, 마술사로 마법을 부리게 하고, 악령과 귀신들을 불러내서 점을 칩니다.
7절에 보면 우상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자기가 직접 만들어서 성전에 가져다놨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의 죄는 개인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줘서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악행이 심지어 하나님이 멸망시키신 가나안 족속보다 더 악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열왕기하 21장 16절 을 보면, 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 피가 예루살렘 이끝에서 저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의 왕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다 합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12살에 왕이 되어 무려 55년을 다스렸습니다.
오랜 통치가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을 생각할때 이것도 참 이해가 안갑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악한 왕을 오랫동안 살려두신 것일까요?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되는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므낫세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 용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하나님의 용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본론1]
10-17절입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서에 없는 역대기만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므낫세와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방나라 앗시리아를 통해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으로 므낫세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쇠사슬에 묶여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왕으로서 굉장히 큰 수치심과 모멸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던 자가 이제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12절입니다.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여기서 강조되는 표현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조상의 하나님’이란 자신이 버리고 떠났던 하나님, 즉 조상들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자기 방식대로 살았지만 이제서야 믿음의 뿌리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둘째, ‘크게 겸손해졌다’는 표현입니다.
‘아주 겸손해졌다’는 표현은 자신을 낮추다, 꺾이다, 무릎을 꿇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한 감정의 후회가 아닌, 존재 전체가 무너져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된 모습을 말합니다.
13절에서 그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가 다시 이방나라의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힘들고 어려울때 어쩔수 없이 하는 회개 아니었을까?”
“이 정도 고통으로 그의 죄에 대한 대가가 충분한 건가? 심지어 다시 왕이 되게 하신다고?”
아무리 그가 돌아와 신앙을 개혁했을지라도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불편해 합니다.
믿는 우리들조차도 마음 한 구석에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밀양’을 생각해보십시오.
주인공 신애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죄자를 면회하러 갑니다.
그런데 범죄자가 “나는 하나님께 회개했고, 그래서 이제 마음에 평안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합니다.
자신이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벌써 용서하셨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용서는 너무 값싼 싸구려처럼 보입니다.
그게 용서라면,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므낫세의 용서가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감, 우리의 감정,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론2]
그러나 이 불편함은 사실 복음의 핵심을 거스르는 감정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므낫세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하거나 불편해하면서도,
정작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므낫세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불공정해 보입니다.
“그렇게 악한 므낫세가 회개 한번 했다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수 있나?”
“이게 과연 하나님의 정의이고 사랑일까?”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만약 은혜가 공정하게 작동했다면 우리중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두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주목하신 대상은 첫째 아들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평생을 아버지 곁에서 수고했고, 저 자식은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탕진했는데 왜 저런 놈에게 잔치를 베풀어 줍니까?”
자격에 대한 그의 말은 매우 그럴듯 하게 들립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나는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저 놈은 안돼”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바로 공로 사상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 아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사랑입니다.
므낫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한 왕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고, 성전을 더럽히고, 백성을 타락하게 한 악인 중의 악인입니다.
그는 회개할 자격조차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아주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를 다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므낫세의 회개’가 아닙니다.
그 회개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과연 누구신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악한 자조차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남겨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용서하실까?”
“우리가 그토록 하나님을 배신했는데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받아주실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므낫세도 용서하는데 너라고 용서 못할게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좁은 기준에서 보면 하나님의 용서는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생깁니다.
만약, 므낫세가 우리의 가족이었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길 바랄까요?
더 나아가 만약, 내가 므낫세라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 바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불편하게 여길때,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첫째 아들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싸구려 은혜가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같이 그 어떤 악한 자, 그 누구일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붙드는 자는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의 회개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악의 크기와 깊이를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가지를 제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인이고, 세리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금걷는 관리입니다.
그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갑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어떨까요?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흠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다시 겸손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므낫세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한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하나님은 그 은혜 앞에 우리에게 다시 서라는 초대하십니다.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므낫세가 구원받은 이유는 그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럴 자격이 그에게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의 회개를 은혜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 실패가 있더라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의 길은 열립니다.
그가 용서받았다면 나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므낫세의 회개를 받아주신 이유는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 입니다.
우리가 몇 주 동안 암송구절로 읽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
이 약속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복음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겸손히 무릎꿇고 자신을 찾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므낫세의 악함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은 더 큽니다.
이 복음을 기억하며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찾는 우리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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