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2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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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든 날, 게으름의 뿌리 자기 사랑

Proverbs 22:13 NKRV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도둑이 든 날

옛날에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게으른 농부만이 텅 빈 집에 남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언제나처럼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농부는 게슴치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잠결에 들은 소리는 바로 도둑이 낡은 담장을 다 넘으면서 떨어뜨린 벽돌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다시 스스로 스르르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허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며 말입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다시 힘겹게 졸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다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집 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농부가 깊이 잠든 줄로 안 도둑은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습니다. 게으른 집 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게으른 자일수록 그의 혀는 분주하다.

본문은 게으른 자를 “밖에 사자가 있다. 나가면 나는 그 사자에게 찢겨 죽을 것이다.” 하면서 집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현대사회는 실내에서 일하는 직업들도 많이 있지만 이 글이 기록될 당시는 농경사회였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 빈둥빈둥 돌면서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게으른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첼’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아찰’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찰’은 ‘한가하게 기대다’, ‘늦추다’, ‘머뭇거리다’라는 뜻의 동사로 ‘게으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잠언에 기록된 지혜자의 해석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상황을 보고 터득한 교훈들입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에 대한 잠언을 쓴 지혜자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게으른 자를 바라보는 지혜자의 시선은 일상적인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영적인 부분으로까지 깊이 들어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일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식에 시선이 모아져 있으며 그 게으른 자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식은 바로 핑계라고 지적합니다.
게으른 자라고 해서 그의 혀까지 게으르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가 많고 변명이 많습니다. 몸은 게을러도 혀는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게으른 사람 중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본문 속에 이 게으른 사람도 대단히 말을 잘합니다. 그는 자신이 밖으로 나가 일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절절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밖에 사자가 있고 길거리에도 사자가 있다. 내가 나가면 사자에 의해 찢겨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

일과 쉼의 조화

그러면 대체 게으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핑계를 대는 것일까요? 게으른 것이 나쁘다는 것은 동서고금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왜 게으른 사람은 스스로의 게으른 삶을 정당화하고자 끊임없이 변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게으른 사람은 본질적으로 빗나간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게으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태도에 옳지 못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 충실하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항상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도 때로는 쉬어야만 하는 때를 맞이합니다. 육신과 영혼이 일로 인해서 많이 지쳤을 때는 잠시 몸도 마음도 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무한정의 긴장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지 않으셨고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적절한 휴식의 때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일할 때 확실히 하듯이 쉴 때에도 확실히 육체와 마음의 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쉼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 역시 문제입니다. 몸에 위험 신호가 오면 하루쯤 푹 쉬어주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피곤할지도 모르니까 새벽기도 나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쉼을 빙자한 핑계입니다. 이것은 밖에 나가면 사자가 나를 찢어 죽일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새벽기도 나가면 피곤이 사자와 같이 나를 찢을 것이라고 핑계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휴식을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 속에 남아 있어 그릇된 방식으로 자기를 위하는 부패한 성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옹호해 주어야 할 육체의 쉼의 요구와 죽이고 눌러야 할 정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영혼뿐 아니라 육체에 대해서도 내가 어느 지점까지 일할 수 있고 어느 지점까지 긴장을 견딜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라는 내면의 권고가 창조의 질서가 시키는 요구인지 자신의 부패한 욕망이 시키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특별히 몸이 약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고 우리는 그런 이들의 약함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앞에서 지적한 정당한 휴식의 요구와 게으름의 종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가 육신의 건강에 대한 그릇된 염려와 만나는 사람을 봅니다. 그 들은 자신이 순수하게 아프기 때문에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인지 게으름이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핑계 삼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할 줄 모릅니다. 물론 아픈 사람들에게는 건강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자신의 본질적인 연약함과 그릇된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으름 사이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부패한 본성의 손짓을 냉정하게 외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이용당하여 자신도 속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의 뿌리, 빗나간 자기 사랑

게으름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기 사랑입니다. 사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힘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합니다.
온종일 빈둥대며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어느 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텔레비전이 고장 나고 말았다면 아마 그는 벌떡 일어나 신속하게 그 텔레비전의 수리를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상황이 다급하면 그 무거운 텔레비전을 들고 수리점으로 뛰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 게으른 사람으로 하여금 분주하게 움직이게 하였을까요? 고장 난 텔레비전이 그를 각성시켜 정신 차리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고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순간에도 그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잠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의 궁극적인 뿌리는 빗나간 자기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바쁘게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치고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탁월한 영성을 소유했던 사람 가운데 게을렀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게으른 사람에게 그런 아름다운 선물을 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게으름의 뿌리인 자기 사랑을 빗나간 자기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자기 사랑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돌아오는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집안의 불화가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게으르면 온 가족이 힘들고 고단하게 살 것이고, 부인이 게으르면 모든 집안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은 그들 때문에 괴롭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충성스러운 자는 추수할 때 마시는 한 그릇 얼음냉수에 게으른 자는 눈의 연기와 이에 초에 비유했습니다(잠언 10장 26절, 25:13). 충성스러운 사람은 부리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지만 게으른 사람은 부리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힌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사랑의 정체.

그러면 끊임없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자기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게으름은 거룩한 삶의 목표를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얻는 보람보다 지금 당장 좀 더 편하게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욕적인 요구를 붙드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기 사랑은 본능에 가까운 욕구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익에 매우 민감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기를 학대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사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도 자신을 왜곡된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의 위치와 목적, 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정체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행복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자각하고 거기에 자기를 정확하게 맞출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 없이는 누구도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온전하게 자기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들을 자신에게 세워 가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변화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영적으로 변화받을 때에만 그의 사고와 정서와 의지가 질서 있게 정돈된 틀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굽어지지 않은 마음의 틀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 목적들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삶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고 그분의 성품을 알고 나면 그만큼 빗나간 자기 사랑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셨는가를 인격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재편되기 마련이고 삶의 목표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으로 정해지면 자기 사랑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와 존재 목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의 자기 사랑은 빗나가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렇게 빗나간 자기 사랑은 거의 대부분 정욕을 따라 사는 삶으로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자기 안에서 은혜는 약화되고 죄성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게으른 자에게서 이렇게 될 위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과 노동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궁중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지 않으시고 입히지 않으시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울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 12:28-29).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감나무 아래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지내는 삶의 동기가 게으름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약속을 타락의 기회로 삼은 매우 악하고 불행한 행동입니다. 이런 삶이 말씀을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의례하는 삶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장된 게으름으로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망치는 일입니다.
실제로 게으른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혹시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십중팔구, 그는 생각이 너무나 없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짐승들이 별다른 고민이나 불행의 인식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낙관할 만한 철학이나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여 돈을 벌고 안 벌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악한 일입니다. 노동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에게도 참된 의무였고 죄가 들어온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에도 에덴 동산에서 노동을 하였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 많은 짐승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며 창조주에게 위탁 받은 이 세상을 관리해 나갔습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낮에 기쁘게 노동을 하고 저녁에 행복한 피로감을 느끼며 잠들었을 것입니다. 노동 그 자체가 징벌이 아니라 노동에서 맛보는 인간의 고통과 쓴 열매들이 죄에 대한 형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의 일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또 하나의 귀한 죄가 없는 상태에 아름다운 에덴 농사를 번성해 나가도록 다스리는데도 노동이 필요했다면, 제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쳐나가는 일에는 얼마나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할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든지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끔 미국이나 유럽에 가게 되면 본받고 싶은 모습들을 몇 가지 봅니다. 그중 하나가 사회보장제도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는 사람들을 무한정으로 아무 원칙 없이 구제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신박약이나 자폐증에 걸려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그저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던져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투자해서라도 그들에게 단순 노동의 기회라도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그렇게 정책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구제비로 살아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평생 먹여 살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체제는 그들을 인간다운 삶으로 인도할 수 없기에 노동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사회 정책화는 인간에게 있어 노동이 지니는 본래적 의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의도적으로 정신박약이나 박약아나 자폐아 같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천천히 가르쳐 가며 일을 시키고 품싹을 줍니다. 그 사람들을 자기가 노동한 대가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을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훌륭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몸소 깨닫게 해줍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인식도 그 목적에 부합하는 노동을 통해서 자신에게 각인됩니다. 힘씀이 있을 때 비로소 목적은 기쁨이 됩니다. 즉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시편 128:2)는 하나님의 법칙은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고단한 삶으로의 부르심이 곧 축복이다.

노동이 오히려 축복인 것은 육체적 삶의 영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노동의 축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은 성화의 영역입니다. 한때 저는 죄와의 싸움이 너무 힘겨워.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성화의 길을 만들어 놓으신 걸까? 한번 구원으로 성화가 영원히 완성되고 죄에 대해서 아주 초연한 천사 같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살다 가게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길고 어려운 성화의 영역들을 신자들에게 주셔서 각자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려고 애를 쓰며 살게 하신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신자들이 이렇게 죄와의 분투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며 하나님만을 붙들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을 창조 시의 원래 자리, 곧 절대적 의지와 순종으로 데려가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고단한 성화의 길 한가운데 두시고 분투하며 살아가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훨씬 더 빨리 부패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화를 위해 분투하라는 사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낙담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기에 오늘도 어제의 은혜를 토대 삼아서 부지런히 살 뿐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이 부지런함이 있습니까? 우리 각자에게는 주어진 직분과 역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맡은 것으로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맡은 바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오직 한 가지 일 역할만 맡겨진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반드시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의 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직장의 구성원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교회의 직진자로서 등등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피면서 거룩한 목표에 집중하기 위하여 쓸모없는 시간의 소비를 줄이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어진 여러 직품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없으며 종국에는 여기저기 분주하게 다니기만 했을 뿐 제대로 한 것은 하나도 없는 현실에 직면할 것입니다. 섬길 수 있는 축복의 자리로 불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막혀진 곳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시원한 얼음냉수가 되어 드린 적 없고 오히려 이에 초 같고, 눈의 연기 같은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고통만 드리게 될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맡겨진 일은 많았노라. 시간이 없었노라. 그래서 별로 한 일이 없노라’ 라는 변명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몸이 두 개인 사람,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할 일을 못 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모자라서 못 한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지혜로울 때 부지런함도 빛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더 부지런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부지런함은 단지 기계적인 성실함과 근면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과 함께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것은 쓸모없이 낭비되던 시간들을 정돈하여 보다 중요한 일에 사용할 줄 아는 것이고. 급한 일과 꼭 해야 할 일들을 조화롭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며 맡은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좀 더 빨리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으샤으샤 주어진 일을 효과적으로 빨리 잘해내는 것이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해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터지가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그 일을 해왔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위하여 보다 나은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의 특징이자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안 할 구실을 찾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해야 될 것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현재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는 일의 대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놓으면 전 인생을 두고 엄청난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컴퓨터로 글을 쓰다가 각 주의 글씨 크기를 바꿔야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방법으로 하나하나 각주를 찾아 들어가 원하는 크기로 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저를 만나기 위해 들렀던 청년이 제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다가와 마우스를 가지고 몇 번 클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과 몇 초 만에 100여 개의 각주들이 한꺼번에 다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전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부지런해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가끔 목회자인 독자들로부터 저의 삶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설교 준비하랴, 신방하랴 집회에 나가랴 바쁠 텐데 대체 언제 시간이 나서 연구하고 또 그 많은 책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약 8년 동안 20여 권의 책을 썼는데 다른 사람에게 설교나 강연 테이프를 주고 집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직접 집필하였습니다.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모두 바쁘게 사시는 분들입니다. 따라서 제가 반드시 그분들보다 훨씬 덜 자고 훨씬 덜 먹으며 산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제가 직접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함에 있어서 늘 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수행하는 방법들을 터득해 가고자 애를 쓰며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한된 시간을 남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도 제목에는 ‘주님의 일을 할 때 먼저는 저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해 주시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저에게 주십시오.’ 라는 절실한 제목이 있습니다.
저는 직장생활도 해보고 학교에서 교편도 잡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남의 밑에서 일해 보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거느리고 일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목회지에서 여러 지체들과 함께 성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함께 일해본 경험에 의하면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사람이 자기 몫의 일을 잘 감당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직무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입니다. 일을 잘 감당할 사람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자기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자기에게 부여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의욕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자기의 일이 무엇인지를 더 정확히 압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직무를 정확히 인식한 후에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줄 알면 그는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그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 비하여 훨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그의 부지함은 결코 빛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지식 위에 효과적인 업무 수행의 방법을 아는 지혜도 있고 그 일을 끝까지 해내는 인내와 성실함이 있다면 그의 부지런함은 탁월하게 빛날 것입니다. 저는 목사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는 교회 개척 후 5년밖에 안 걸렸지만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경의 진리와 목회의 선배들을 통하여 그것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초등학생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인생의 그라운드 위에서

우리에게 인생은 성화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땀 흘리며 살아야 하는 하나의 터전입니다. 그것은 구원 이후부터 천국까지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터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우리의 모습은 인생이라는 커다란 운동장 위에서 천국에 닿아 있는 성화라는 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운동장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사람마다 각기 다를 것입니다. 뛰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거꾸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가다가는 주저앉아 가는 시간보다 더 많이 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예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노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길 원하십니까?
우리가 게으른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의 그라운드 위에 선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하고 안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운동장에 서 있는 선수에게 휴식은 없습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울리고 인생이라는 운동장을 떠나게 될 그 순간까지 거기선 선수의 사명은 승리를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승리의 환희를 느끼며 감격스럽게 우리 인생의 감독이신 하나님과 포옹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후회와 아쉬움으로 쓸쓸히 운동장을 걸어 나가고 싶으십니까? 그것을 결정하십시오. 지금 인생의 그라운드 위에 서 있는 당신이 당신의 삶으로......

게으름의 뿌리, 자기 사랑

1. 서론: 게으름의 단면 (잠 22:13)

게으른 농부 이야기
도둑이 들어도 행동하지 않고 변명만 하는 게으른 농부
행동 대신 말만 많고 핑계만 대는 사람의 전형
성경적 관점
게으른 자는 ‘밖에 사자가 있어 나가면 찢긴다’며 회피함
농경사회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일하지 않는다는 의미

2. 게으름의 본질: 빗나간 자기 사랑

핑계와 변명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와 변명이 많음 (몸은 게을러도 혀는 바쁨)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일과 쉼의 조화
무조건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은 아님
적절한 휴식은 필요하지만, 쉼을 빙자한 게으름은 문제
육체의 쉼과 정욕을 구분하는 지혜 필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분별

3. 게으름의 뿌리: 빗나간 자기 사랑

자기 사랑의 특성
게으른 사람도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함 (텔레비전 수리 예시)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행위는 게으름의 발현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 중 게으른 자는 없음
부정적인 결과
가정 불화, 타인에게 고통을 줌
충성스러운 자는 얼음냉수, 게으른 자는 눈의 연기와 이에 초 (잠 10:26, 25:13)

4. 자기 사랑의 정체: 하나님보다 자신을 위함

인간의 본능적 자기 사랑
누구나 자기 이익에 민감하며, 자신을 사랑함
그러나 온전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
영적 변화의 문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영적으로 변화될 때만 질서 있는 삶 가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재편될 때 자기 사랑도 올바른 방향으로 정립
올바른 인식이 없으면 정욕을 따라 살게 됨

5. 인간과 노동: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노동을 통해 일하심
감나무 아래 기다리는 것이 아닌, 노동을 통한 책임
노동은 죄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수단
노동의 가치
에덴동산에서도 노동은 존재 (아담의 짐승 이름 짓기)
노동 자체가 징벌이 아니라 고통과 쓴 열매가 징벌
사회보장제도의 예시: 노동을 통해 인간 가치를 깨닫게 함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시 128:2)

6. 고단한 삶으로의 부르심: 축복

성화의 영역
죄와의 싸움은 힘들지만, 성화의 길은 축복
하나님을 의뢰하고 붙들고 살아가게 함
낙담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감 (빌 3:12)
시간 관리와 지혜
쓸모없는 시간 소비 줄이기
주어진 직무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한 헌신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지런함이 모자라서"
지혜로운 부지런함
기계적 근면함뿐 아니라 지혜로움 필요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 연구 (컴퓨터 각주 변경 예시)
직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효과적인 수행 방법 습득
지혜와 인내, 성실함이 더해질 때 부지런함이 빛남

7. 결론: 인생의 그라운드 위에서

인생은 성화를 위한 터전
구원부터 천국까지, 땀 흘리며 살아야 하는 곳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역할을 깨닫는 과정
우리의 선택
게으름을 포기하고 승리를 위해 달릴 것인가?
후회와 아쉬움으로 쓸쓸히 나갈 것인가?
지금 당신의 삶으로 결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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