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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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Luke 23:34 NKRV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복음은 씨앗(소식)입니다. 이 씨앗(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이 발아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씨앗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싹을 틔워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에는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데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용서라는 열매를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의열매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죄인들이 십자가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국 교회는 신앙에 있어서 십자가의 중심성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교회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다급함이 사라졌다. 특히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물질주의에 흐르게 되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진리에 있어 상대주의적 사상을 따르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공로와 힘도 없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크다. 그러나 타락한 도시 한복판에는 부패한 교회가 있고 그 교회 한복판에는 잠들어 있는 강단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최후의 유언인 가상칠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II.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 9시경이었고 거기서 운명하신 시각은 오후 3시경이었다. 십자가에 박히신 후 첫 번째로, 남기신 유언은 놀랍게도 당신을 불의하게 십자가에 못 박는 악한 원수들을 위해 드린 용서의 중보 기도였다.

A.십자가의 형벌

첫째로, 십자가 형벌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형벌로써 십자가형의 판결 과정
십자가의 형벌은 죄인을 죽임당할 자로 심판하여 목숨을 빼앗는 사형 집행의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먼저 그런 형벌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는 판결을 받으셔야 했다. 그래서 차례를 따라 재판이 열렸고 피고인은 예수였고 고소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재판장은 당시 유대 총독이던 본디오빌라도였고 변호인은 없었다. 그 대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인산인해로 모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침 그때가 유대인들의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수많은 인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기 때문이었다.

1. 십자가 형벌의 유래

첫째로는 십자가 형벌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자.
형벌의 유래
십자가 형벌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그것들 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페르시아 유래설이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를 정복한 후 그들의 금고를 맡아보던 파티에스가 자신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대왕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제시한 사례가 역사에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현장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록했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자신의 책 『역사들』 1권 128장에 기록되어 있다. “키오스인들은 팍티예스를 데려가 감시했으며 키루스 대왕의 명령에 따라 그를 십자가 형벌로 처형하였다.” 여기서 팍티예스를 처형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에나스코페사이인데 이 단어는 '말뚝에 꿰뚫어 매달다', '기둥에 박다', '매달아 죽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십자가 형벌의 초기 형태는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 유사 형벌
그 후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 시대에도 유사한 형벌이 시행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있었던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로마 제국에서 널리 시행되었다. T자형 십자가나 플러스형 십자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 형벌이 시행되던 페르시아의 초창기 형태는 말뚝을 땅에 박고 끝을 뾰족하게 하여 사형수의 항문을 꿰뚫어 그 말뚝이 내장을 관통하는 방식의 형벌이었다. 로마 시대에 와서 십자가 형벌은 국가 기강 확립과 질서 유지를 위한 매우 극단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런 형벌을 받지 않았고 반란을 비롯한 중대 범죄자들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과시적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십자가형 폐지
그러다가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형벌로 죽으신 것에 대한 커다란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십자가가 치욕스러운 형벌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315년에서 320년경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내에서 십자가형을 완전히 폐지하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그 끔찍한 형벌은 서양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로마의 역사가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책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생애』 제1권 2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또한 옛날부터 널리 퍼져 있던 십자가 죽음의 방식을 폐지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그분은 그 누구도 십자가로 사형에 처해지지 않도록 명령했으며 십자가 처형은 로마 제국에서 영원히 제거되고 실제로 지워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2.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

둘째로는 십자가의 형벌의 잔혹성이다.
십자가, 금기어
당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를 “크룩스(Crux)”라 칭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는 “크루시픽시오(Crucifixio)”라고 불렀다. 당시 제국어 공용어로서 통하는 코이네(Koine) 그리스어로는 십자가가 “스타우로스(Stauros)”라는 말로 통용되었다. 예수시대 당시 이 단어들은 사람들의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형벌이 가진 다른 형벌에 비교할 수 없는 잔혹한 특성 때문이었다.
십자가형, 관습
우선 당시 재판장에서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는 죄수에게는 두 가지 관습이 적용되었다. 하나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심하게 채찍질을 당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었다. 먼저 첫 번째 관습을 관하여 살펴보자.
관습1, 채찍질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죄수는 기둥을 바라보면서 묶인 채로 보통 등 부분에 집중적으로 채찍을 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법에는 '40에 하나 감한 39대'의 채찍질이 한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로마법은 그 횟수의 한계를 지정하지 않았고 집행자의 재량에 따라 훨씬 더 많은 채찍질이 가해질 수 있었다. 이 가혹한 채찍질을 가리켜서 로마인들은 “플레이겔라티오(Flagellatio)”라고 불렀다. 죄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기 전에 관습적으로 시행되던 채찍질의 잔혹성은 채찍의 형태에 있었다. 이때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채찍인 플라그룸(Flagrum)혹은 “플라겔룸(Flagellum)”은 가죽끈 여러 개가 달린 채찍이었다. 그 여러 가닥의 가죽 끈 끝에는 각각 작은 뼈 조각 혹은 금속 조각, 납 조각 등의 날카로운 것들이 매달려 있어서 채찍질을 하면 살점이 뜯기고 근육과 혈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또 하나, 두 번째 관습에 관하여 살펴보자.
관습2, 십자가 짊어짐
그것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었다. 영화나 종교화에서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전체를 짊어지시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당시 십자가의 무게는 약 135~180kg 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렇게 많은 채찍질을 당한 죄수가 그런 무게의 십자가를 통으로 짊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에게는 대개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형수는 일반적으로 “파티불룸(Patibulum)”이라고 불리는 가로보 혹은 횡목을 짊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지탱할 세로보, 즉 수직 기둥은 처형당할 장소에 미리 박혀 있었다.
십자가 형벌의 최종적 잔혹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서 나타난다.
최종적 잔혹성, 못 박힘
우선 형장에 도착하면 죄수는 횡목을 정확히 등과 두 어깨 밑으로 지나가서 그의 몸이 횡목 정중앙에 있도록 자세를 바르게 잡는다. 이어서 죄수의 두 손을 횡목에 못 박는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못을 박았는데 많은 경우 죄수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손바닥의 살이 찢어져 몸을 십자가에 고정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처형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십자가 형벌을 집행하는 자들은 커다란 못을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부분의 뼈 사이에 박았는데 이러한 조치는 죄수들에게 더욱 고통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잔혹스러운 못질은 해부학적으로 정중신경을 손상시켜 매우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 손목에 못 박힌 죄수의 몸은 떨어지지 않도록 가로목과 함께 줄에 매달린 채 도르래 같은 것을 이용해 이미 세워진 수직 막대 위로 끌어올려진 후 거기에 고정되었다.
그렇게 가로목이 세로 목에 고정되면 죄수의 발은 수직으로 모아지고 거기에 하나 혹은 두 개의 못을 발목이나 발등 위에 박았다. 이때 사용된 못은 길이가 약 13cm에서 18cm에 이르렀고 지름은 약 1cm에 달했다고 하니 꽤 큰 대못이었다. 이렇게 매달린 죄수는 대못 세 개나 네 개에 체중 전체를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 인하여 혼절과 깨어남을 반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때 죄수들의 신체에는 두 가지 큰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타는 것과 같은 갈증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이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어떤 죄수들은 몇 시간 정도 매달렸다가 죽음을 맞지만, 어떤 죄수들은 의외로 며칠씩 죽지 않고 매달려 고통을 받았다.
십자가 형벌의 야만성은 죄수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최대의 고통을 받게 하는 데있었다. 죄수들은 이러한 십자가에 박힌 채 신경과 혈관의 손상과 출혈 전신에 흘러내리는 몸무게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죽음의 과정
십자가 형벌로 인한 죽음의 주된 원인은 질식사였다. 왜냐하면, 발이 벌어지고 몸무게로 몸이 아래로 처지면 횡격막이 압박을 받아 숨쉬기가 극도로 어려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체적으로 숨을 쉬려면 발을 지지하고 몸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이러한 동작은 못 박힌 두 발의 고통을 크게 증가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는 이러한 상황 속에 사망의 위협과 생명의 고통 사이에서 숨쉬기를 위한 노력을 하다가 결국 질식사하게 된다.
또한 심한 채찍질과 못 박힘, 무거운 유지에 대한 극심한 출혈과 갈증에 노출되어 탈수나 쇼크, 심장마비 등으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십자가 형벌에 대한 시행 방식과 잔혹성에 대해 우리는 플루타르쿠스나 유세비우스, 키케로나 타키투스등의 저술 속에 상세하고 일관되게 기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로마의 웅변가이자 철학자, 법학자이며 정치가인 마르쿠스 키케로는 자신의 책 『베레스에 대한 고발』 제2부 64장에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며 그를 채찍질하는 것은 잔학행위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존속 살해에 가깝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대해 내가 무엇이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마르쿠스 키케로의 이 글은 당시 시칠리아 총독인 가이우스 베레스의 부패와 착취 그리고 잔혹한 통치를 고발한 일련의 연설들을 담은 것이다. 로마 시민이 베레스의 명령으로 부당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될 뻔한 가비우스의 사례를 들어 비난하였는데 이는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과 베레스의 비인간적이고 로마법을 무시한 처사를 함께 고발하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이 연설에서 십자가 형벌에 대해 '이 극단적인 형벌'이라는 말로 고발하였다. 우리가 십자가라고 말할 때 과연 십자가 형벌의 사실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면서 언급하는가.
십자가형의 잔혹성을 이해함의 중요성, 두 가지
실제로는 그것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이 상투어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그냥 입술로만 되뇌이지는 않는가. 그러나 십자가에 관한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들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받게 되었을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 형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깊이와 넓이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구원의 기쁨을 말한다. 그러한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당하셔야 했던 고통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이해, 그 고통에 동참하는 아픔의 공감이 없이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를 위해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기보다는 그분의 도움으로 성공과 번영을 기대하기를 먼저 한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사실상 십자가 없는 복음이 환영받고 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더 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은 예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피가 모든 것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율법의 정죄가, 양심의 송사가, 필멸의 운명이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멈춘다. 존재는 의로움으로 송사는 구원의 확신으로 필멸의 운명은 부활의 희망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해 본 적이 언제인가? 빌라도의 법정에서 끌려나오신 그분의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채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광경이 지금 내 앞에 재현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시작이고 경건의 출발이다.
적용
풋 미역 같은 검은 머리 흩날리며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곡하며 울던 마리아와 예수를 사랑하는 여인의 흐느낌이 우리 가슴에 머물던 날은 언제였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잔혹한 형벌을 받으실 만한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분에게 잘못이 있다면 어두운 세상에 너무나 찬란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뿐이었다. 당시 세상은 어둠의 일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빛으로 오신 예수를 싫어한 것은 그 빛이신 주님을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모두 다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뿐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지배 아래서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구원받을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끔찍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대신 당신이 지옥의 형벌에 버려져 하나님과의 위로가 단절되는 고통을 겪으셨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수치를 겪으셨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를 당신의 죽으심으로 살려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다시 살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시인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지 않는 이스라엘의 무리를 보며 "내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 이와는 비교될 수 없는 풍요로운 계시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아직 메시아도 보이지 않았고 새 언약도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시냇물처럼 흐를 눈물이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그렇게 마른 땅처럼 단단히 굳어져서 그분께로 돌이킬 줄 모르는가?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리고 울자. 돌처럼 굳어진 가슴을 손톱이 피로 붉게 물들 때까지 통곡하도록 쥐어뜯으며 울자 울자 울자.

B. 사하여 주소서

둘째로, 죄인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십자가 형벌의 역사와 그것의 잔혹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 죽음의 형벌을 받으시면서 예수께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는 탄원의 기도였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 중에 남긴 첫 말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악행에 참여하고 있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였다. 좁게는 십자가 안에 있는 로마 병정들을 위한 기도였고 넓게는 당신을 십자가 사형에 처하게 처하는 데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장 34절)
용서를 위한 기도에 대한 의문 제기
우리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의 모습을 배우며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하나는 어떻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인들을 위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을 위해 변명하면서까지 용서를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였을까? 그런 이타적인 기도의 동인에 관한 것이다.

1. 용서하시는 사랑

첫째로는 용서하시는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비셨다. 그것은 평화로운 산상이나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 할 수 없는 극단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받으시면서 남기신 말씀이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와 타들어가는 목마름 때문에 입술조차 떼어놓기도 힘든 처지에서 하신 첫 말씀이 바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다. 지금 당신 자신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데, 오히려 자기를 죽이고 있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지 않는가.
사랑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하나로 연합시킨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사랑은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인내와 자비와 긍휼이라는 세 국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오래 참음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 오래 참음은 둘 사이와의 관계가 깨어지거나 악화될 것 같은 위협을 받을 때 그 관계를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것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이다.
두 번째로는 자비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들을 자비롭게 여긴다. 여기서 자비란 슬픔이 섞인 사랑이다. 타인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거나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다. 자비는 오래 참음이나 긍휼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의 인격적 성향이다. 따라서 자비는 사랑받는 자의 어떤 장점이나 그로부터 받을 이익 때문에 수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 번째로는 긍휼이다. 사랑의 마지막 국면인 긍휼은 아픔이 섞인 사랑이다. 긍휼은 타인이 처한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아파하는 감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돕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못 박는 데 참여하고 있는 원수들을 향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마음에 이런 긍휼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종말에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그때 그들이 당하게 될 아픔을 미리 앞당겨 느끼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던지 이런 고통은 그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들을 향한 아픔을 동반하는 사랑이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보다 더욱 컸기 때문에 고통받으시는 예수께서는 악행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다. 끊임없이 흐르는 땀과 눈물 그리고 쏟아지는 피로 물들이신 생애였다.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을 그처럼 많이 선포하시고 외치셨건만 여전히 듣고 돌이키지 않는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이 섞인 사랑아픔을 동반한 사랑으로 그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몸을 내어주셨다.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죄를 저지르는 악한 병정들을 바라보시는 예수의 마음에는 그들의 비참한 영혼의 상태에 대한 큰 슬픔과 함께 아픔이 있었다. 그 슬픔과 아픔을 동반한 감정으로 하나님께 형벌밖에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랑의 성향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이 미래에 받을 형벌의 고통에 선취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신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도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목적임을 아셨기 때문에 순종함으로 그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다. 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것이 예수께서는 마치 당신 자신이 겪는 일처럼 기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2. 시공간과 사랑의 초월성

둘째는 시공간과 사랑의 초월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공간과 사랑의 초월성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영원하시다. 그래서 그 사랑을 본뜬 모든 사랑은 영원하기를 희구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일반 원천 차원의 문학이나 예술에서조차 왜 사랑이라는 말과 가장 많은 짝을 이루는 것이 영원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영원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없이는 영원을 알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랑함으로써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명제 속에는 영원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시간에 단절이 없이 언제나 영원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랑과 영원성과 불변성은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삼위일체적 성격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영원함과 불변함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 이러한 성격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의 초월성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랑의 초월성이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가 영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중세 신학자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책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제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번째 사랑의 단계는 하나님 자신이 그분 자신 때문에 사랑받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끝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영원성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 때문에 사랑받는 것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두스는 이 책에서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대한 지순의 사랑에 이르게 되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네 단계로 설명된다. 자기 자신 때문에 자신을 사랑(Amor sui propter se ipsum)하는 단계, 자기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Amor Dei proter se ipsum)하는 단계,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Amor Dei propter Deum)하는 단계,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사랑(Amor sui propter Deum)하는 단계다. 이 마지막 사랑의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경험하게 된다. 베르나르두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신자의 영혼은 마치 쇠가 불에 달궈져 쇠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붉게 타오르듯이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잠겨서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행된 사랑이 없었더라면 결코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간과 우주를 감싸고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자기 회귀적 사랑에 참여하게 된다. 이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영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을 알고 사랑하는 길이다. 그래서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차와 상관없이 여기저기라는 공간차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자의 희로애락에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마치 둘이 한 몸인 것처럼 모든 정동의 발생과 소멸에 동참한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에서 잘 입증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성경은 말한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여기서 우셨다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클라우센(eklausen)”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통곡하다이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셨을까? 더욱이 함께 그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중 예수처럼 통곡하는 사람은 없지 않았던가? 이는 그때의 예수께서 주후 70년에 일어나게 될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의 비참함을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그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은 미래의 예루살렘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비참함을 선취적으로 공감하셨기에 터져 나온 통곡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은 자신들이 살해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다. 오히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줄 알았다. 그들은 그토록 무지했고 그 무지는 그들이 입은 피해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없음과 무지함에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이 받을 미래의 심판과 멸망에 아파하셨으니 그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영혼들을 위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하였던 것이다.

3. 그 사랑의 현재적 경험

셋째로는 그 사랑의 현재적 경험이다. 우리는 입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가. 자비와 긍휼이라는 단어는 이제 시냇가의 조약돌처럼 길가에 푸른 풀처럼 흔해서 아무 감흥 없이 주절거리는 형식적인 대사가 되었다. 자 여기에 사랑의 나무가 있다. 그러나 땀 흘림이 없는 곳에서 오래 참음의 뿌리는 자라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마음에서는 자비의 줄기와 가지가 무성해지지 아니한다. 붉은 피가 흐르지 않는 마음에서는 긍휼의 열매가 맺히지 아니한다.
이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자신의 대표적 책 『파우스트』 제1부에서 말한 바와 유사하다. "친구여, 이론은 잿빛이지만 삶의 황금나무는 푸르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은 잿빛이다.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실천에서 입증된 것이 아니니 마치 소화되지 않은 채 뱃속을 돌고 있는 유리구슬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피폐한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세상에 속했는지 경계가 흐릿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함에 있어서도 잿빛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회색지대는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은 구원받을 우리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선 거기에서 그분과 함께 죽게 하셨다. 무엇 때문인가? 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저 다만 2천 년 전의 일처럼만 느껴지는 것은 누구 탓일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인가?
우리가 지금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순수하여 신앙생활의 이력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남을 돕고 섬기는 봉사의 기억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 사랑은 아무 조건도 없이 공로도 없이 수시로 부어지는 사랑이니 이는 받은 자로 하여금 그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사물이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 외에 그 사랑을 가져온 다른 원인들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없이는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 재현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던 모든 때에는 언제나 공통된 경험이 있었으니 예수 십자가의 죽음의 현재적 소환이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여 예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가슴을 찢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다른 사람을 비판이나 하면서 메마른 가슴으로 힘겨운 희생길을 지팡이도 없이 맨발로 걸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는 십자가의 사람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며 사람들을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자로 여기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게 된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다시 한번 더 적용해 보자면 예수의 기도에 지금 우리도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며 복음 전파의 파급성을 깊이 깨닫고 멸망당할 자들의 피난처이신 구주 예수의 구원의 길을 전파하여야 한다.

Ⅲ. 적용과 결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세계 선교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더구나 무엇인지도 모르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크게 이바지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그리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처음 만난 예수는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쓰신 분도 아니었고 보좌에 통치하시는 권세자도 아니셨다. 그때 우리가 만난 그분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채 험한 십자가에 초라한 죄수의 몸으로 못 박혀 계신 모습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은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의 감화를 받았다.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침내 그 앞에서 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그 후로부터 그분을 위해 살기로 했다. 우리는 그분의 찬란한 영광을 통해서 비참한 십자가를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받으신 비참한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영광의 주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그때 우리 마음에는 십자가만큼 커다란 찬송 제목이 없었고 십자가를 고 살아가는 삶만큼 뜨거운 기도 제목이 없었다. 우리 안에 사라진 첫사랑을 인하여 눈물로 회개하자. 그분이 지신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그분의 수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을 기억하자.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주룩주룩 흘러떨어지는 예수의 피에 온 몸과 마음을 적시자.
그래서 우리의 살 중에서 예수 때문에 찢기기를 거절하는 살이 없게 하자. 우리의 혈관에 흐르는 피 중에서 그분 때문에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없게 하자. 다시 시작하자! 우리의 삶을 십자가의 감격으로 살아내도록.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요. 본문을 보기 바랍니다. 함께 사자 포데예수스 엘레겐 때는 별 뜻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정도였죠. 그런데 혹은 그때의 예수가 엘레겐 말씀했다. 뭐라고? 파테르 아버지여. 빛을 탕감해주다 그런 뜻이 있어요.
아우토이스 저들을 저들의 빛을 탕감해 주옵소서 오가르 오이다신티에 호이우신 그러니까 오가르 가를 왜냐하면, 왜냐하면, who 아니다. 그런데 Oidasin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때문 모르기 때문입니다. 뭘 모르냐? T는 무엇이에요? 그다음에 토이 유시는 토이 에오 동사에서 온 거고, 만들다 행하다 그런 뜻이죠.
그래서 저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옵나이다.
30분만 줄게요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익숙해서 일르시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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