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3 새벽기도회: 마가복음 6:1-6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3 viewsNotes
Transcript
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새벽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허락하심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저희의 연약함으로 비롯된 죄와 실수, 그리고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만들어주심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 가운데서도 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깨닫게 하시고, 특별히 말씀과 기도를 통해 알아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잘 듣고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6:1-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요. 부디 건강 관리 잘 하시고 환절기 가운데서도 건강 잃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에 정진해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로 먼저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6장의 말씀으로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이라는 사람이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는 “아는 것이 힘이다”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인간이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격언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의도와는 달리 이 말을 문자적으로 적용했을 때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적용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 또는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을 겁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유독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때,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내가 쟤를 어릴 때부터 알았는데...” 혹은 “우리 동네 누구누구는 원래 저렇지”라고 말하다가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에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괜히 이런 말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우리가 가진 ‘익숙한 지식’ 이나 ‘선입관’은 때로는 ‘안다’는 것이 복이 아니라, 우리가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이 ‘익숙함의 벽’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는지를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6:1-6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한동안 갈릴리 주변에서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시다가, 이제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 반응은 어땠을까요?
우선 1절에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나사렛’이라고 하지 않고 ‘고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장소에 대한 개념은 ‘사회적 위치, 혈통, 친족, 권위, 우열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한 사람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그가 속한 장소, 고향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고향에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이러한 말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장소로 옮긴다는 정보만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곳 사람들이 가진 전통적인 입장과 예수님 입장 사이에 일어날 모종의 긴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제자들이 따르는데, 이것은 고향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이 2절에서 결국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서 말합니다.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으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고향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들은 ‘지혜와 능력’이 동반됨을 분명히 인지했습니다. 이는 앞서 갈릴리 전역에서 사역을 행하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권위 있는 가르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갈릴리 사람들과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이라는 것,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점에서는 갈릴리 사람들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4장을 보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것에 비해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놀라움이 곧바로 냉소와 배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와 예수님 대단하시다. 그분은 정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셔”라는 감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익숙한 지식’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성인 남성은 회당에서 히브리 성경을 읽고 강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행위 자체는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가르침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3절을 통해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 가지 범주 안에 가두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배척한 이유였습니다.
첫째, 직업적 범주입니다. “이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라는 말을 통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라는 직업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가두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목수는 토라,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목수의 직업적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라 판단하고 목수와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모순적이니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한 사람의 가치는 직업이었습니다.
둘째, 혈통 또는 가족이라는 범주입니다. “누구누구의 형제가 아니냐, 그리고 그의 누이들이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은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족과 마을을 중심으로 생활환경이 조성되었던 고대 사회에서 그곳을 등진 사람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한 곳에 정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족과 고향을 떠나 살던 방식으로 고향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곧 혼동을 주는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비합법적’인 것이라 조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와의 관계 아래에서 불리는 것이 익숙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머니의 이름인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일찍 사별하신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녀를 남편을 사별한 아내의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어머니와 아들 모두에 대한 폄하와 경멸을 나타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은 언급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누이들의 이름은 별다른 언급 없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라는 말로 함께 묶여 언급되고 있다는 것 역시 나사렛 사람들의 여성에 대한 폄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이 나사렛 사람들이 동정녀 탄생을 조롱하고자 했든지 아니면 사별로 인한 불가피한 호칭이었든지 간에 사람들이 사용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정말 마리아의 혈통적 아들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경멸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이 배척하다는 것을 직역하면 “걸려 넘어졌다”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것이 직역입니다. 걸려 넘어졌다는 것은 ‘죄 짓게 하다’ 혹은 ‘그릇된 길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의도적, 또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가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고, 그들이 만든 ‘익숙한 예수’라는 이해가 예수님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 선입관을 형성했다는 뜻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익숙함에 머물며 그분을 그 안에 제한시키려 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회당에서 능력과 지혜로 가르치는 예수님을 고향에서 알던 ‘익숙한 예수’의 틀로 이해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능력과 지혜의 예수’와 ‘익숙한 예수’, 바로 이 ‘두 예수’가 서로 조화되지 않자 고향 사람들은 ‘지혜와 능력의 예수’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러한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은 4장에서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앗 비유에서 말씀을 듣지만 ‘품지’ 않는 ‘길가’와 같은 사람들임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고향 사람들과의 갈등은 당시 사회의 문화를 고려할 때 훨씬 더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의 뿌리는 그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런 이유로 가족과 마을 공동체와의 연대는 한 개인의 존재와 의미 형성에 결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장소와 정체성의 견고한 연대는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선입관과 익숙한 지식이 예수님을 잘 이해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눈앞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능력과 지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배척을,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동시대인들에게 거절당했던 유대 선지자들의 운명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거부와 박해의 길임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갈릴리 사람들에게서는 환영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 떄문에 5절에서 “놀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이라 기대하셨지만, 그들의 불신앙이 그 기대를 저버렸기 떄문입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능력을 행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들만 치료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을 제한시켰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열매 맺는 데는 듣는 사람의 ‘믿음’이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익숙함’ 때문에 믿지 않아 능력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길 가에 뿌려진 씨앗 비유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배척당하신 후에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 6절에서 마을들을 “빙 둘러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십니다. 이 여행 방식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향이라는 특정 지역’ 안에 규정하려 했던 시도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지역, 혈통, 사회적 위치라는 전통적인 정체성의 기준에 갇혀 계시지 않고 오히려 그 틀을 깨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혈통이나 고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의 방식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역시 요구되며, 그분을 통해 도래하게 된 하나님 나라,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세워지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교회를 향하여 ‘나그네’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혈통적 유대인이라는 것이 구약에서 굉장히 중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이제 혈통적 유대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가족이 형성된 것입니다. 바로 무엇이냐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고향으로 삼도록 도전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오늘 이 나사렛 사람들의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익숙한 범주’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가 예전에 들었던 성경 이야기’, ‘내가 익히 아는 종교인’과 같은 익숙함의 틀에 가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문화적 경계, 우리의 사회적 선입관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삶에 나타내시는 새로운 지혜와 능력 앞에 우리의 ‘익숙함’을 깨뜨리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이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교회가 환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혈통과 지역으로 예수님을 판단했듯이, 우리 교회도 때로는 사람들을 ‘오래 다닌 사람’, ‘우리와 비슷한 사람’,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 같은 익숙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향 없는 삶’을 사시며 모든 이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범주 안에 우리의 가족을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직업, 배경, 가족 관계와 상관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익숙한 지식이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선입관을 버리고, 놀라우신 지혜와 능력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우리의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대하는 복된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마가복음 6장의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이해하는 익숙한 예수님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우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저희가 이웃의 범주를 두고 이웃을 배척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교회 안으로 부르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일에 모든 교회가 동참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을 맛보는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