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6. 주일4부예배. 우리가 이어가야 할 종교개혁, 다시 자유를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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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8:32–36 NKRV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서론

할렐루야. 4부 청년 예배로 모인 청년들과 모든 예배자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지요? 달력을 보니 이번주 금요일이 입동이더라구요. 한해가 어느새 훌쩍 흘러가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고 계절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서 마음껏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우리 서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의미로 또한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한 번 앞뒤로도 이렇게 인사를 나눕시다. “하나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종교개혁기념주일은 교회가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할 날입니다. 모든 교회가 창립기념주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많은 순서들을 준비하지 않습니까? 창립기념주일이 각 교회가 시작된 날을 기념하는 주일이라면, 종교개혁기념주일은 개신교 전체가 시작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니 창립기념주일보다 종교개혁주일을, 아니 창립기념주일을 대하는 것만큼이라도 종교개혁주일을 대해야 할텐데, 사실 그런 무드는 아닙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 다들 들어보셨지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배우는 것이 없다면 앞으로 바르게 나아가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걸어온 걸음을 돌아보며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걸음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한데, 우리가 언제나 기준삼아야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며, 또 기준으로 삼아볼만한 것은 그 말씀이 건강하게 열매맺었을 때의 모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PPT 1) 이렇게 한 번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핀포인트로 둡시다. 그리고 교회가 말씀을 가지고 전진해가는데, 대개는 비뚤대며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한번씩 다시 방향을 잡게 하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령 초대교회나 종교개혁같은 때 말입니다. 그것을 그 다음의 핀포인트로 삼는 겁니다. 그렇게 핀포인트들을 실로 엮으면 하나의 직선이 생깁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잡아보는거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준으로 삼고 우리가 걸어온 길을 곱씹어봄으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조정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영적인 영점을 잡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론 1

종교개혁은 1517년 마틴 루터라는 독일의 한 수도사가 당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부패한 신앙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95개 조항의 논제’를 뷔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당 문에 붙은 종이에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자는 절규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 시대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고 있지 못한다 사실을 보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교회가 정한 형식과 제도를 따라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교회의 허락’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던 것이죠.
그때 루터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사로잡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교회가 빛을 잃어버렸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PPT 2)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라틴어로는 “Sola Gratia, Sola Fide, Solus Christus”가 됩니다. 이후 여기에 “Sola Scriptura, Soli Deo Gloria”가 더해지면서, Five Solas, 즉 교회가 사수해야 할 다섯 가지 영적 원리가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를 통해 본격적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들어올린 횃불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참된 빛을 보고 함께 구원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얽매고 있던 죄와 두려움의 사슬이 끊어지고, 사람이 만든 형식과 제도의 감옥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나타난 결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을 두 글자로 요약하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통해 다시 복음이 회복되게 하시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자유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봅시다. 자유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누군가가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이전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전에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었고, 무엇인가에 억눌려 있었을 때에라야만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지난 18일 ‘재외국인안전대책단’과 현지 경찰의 협력으로 캄보디아 범죄조직에 억류되어 있던 청년 3명이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기사를 읽으면 즉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억압은 우리에게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쇠사슬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감옥은 쉽게 생각하지만, 사람의 영혼을 얽매고 있는 쇠사슬과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이렇게 선언하신 바 있지요.
누가복음 4:18–19 NKRV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근본적으로 어떤 현실 속에 있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차원의 자유를 주려고 하시는지를 생각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나는 지금 포로가 아닌데요? 뭐 좀 다른걸 해주실 수 없습니까?” 라고 반문할 수 밖에 없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이 딱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1–32 NKRV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에 유대인들이 어떤 말로 대답하였습니까?
요한복음 8:33 NKRV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전혀 깨달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차원의 자유를 주려고 하시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구요.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이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남의 종이 되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말씀을 잘 들여다보시면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대화를 누구와 나누고 계신지 확인해보십시오.
요한복음 8:31 NKRV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문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얼마든지 예수님이 주시려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여다봅시다.
요한복음 8:31–32 NKRV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전제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여도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는다면 제자가 될 수도 없고, 진리를 알수도 없으며, 자유롭게 될 수도 없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유대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전통과 논리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자부했던 그들의 대답을 보면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인 것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혈통들에게 주신 율법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이미 율법을 가지고 있으니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타고난 혈통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종교적인 전통의 실천이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4 NKRV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아브라함의 자손, 율법의 백성이라는 허울 뒤에 가려져 있는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정말 너희들이 타고난 혈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고, 율법을 가지고 있으니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맞다면, 어찌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가느냐?”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37–40 NKRV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들이 정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아브라함처럼 행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행했습니까? 답을 얻기 위하여 잠시 로마서의 한부분을 참고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4:1–3 NKRV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람이라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자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이 분을 두 팔을 벌려 환영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던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논리로 대적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자신들의 손으로 못박아 죽이는데까지 나아가지요.
이들이 비록 육신의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지만, 영적으로는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삶은 온통 그들의 아비가 사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들처럼 중세의 그리스도인들도 대대로 믿는다 하는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이라고, 죄의 종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들도 실상은 허울 뿐이었습니다.
죄악의 물결이 온 교회를 가득 휩쓸었고, 모두가 죄의 권세 아래 굴복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처럼, 중세시대의 교회 역시 강도의 소굴로 변해있었습니다. 사제 곧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는 자들의 직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귀족들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고 더욱 키워나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지요.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10살, 11살, 12살의 꼬맹이들이 성직자로 임명되어 오늘날로 치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이 여러 직책을 겸직해 여러 교구의 세금을 동시에 거두는 일도 흔했습니다. 도시마다 있었던 환락가의 주요 고객은 사제들이었고, 그들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일반 성도들은 교회의 전통과 관습, 특히 사제들의 중개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도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는 죄를 씻기 위해 이러이러한 것을 하라고 성도에게 명령하였고, 그런 벌을 다 받아야만 사제가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해주었었지요.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이 제도 자체가 타락해버렸습니다. 사제들은 결국 용서를 받기 위해 면죄부를 사라고 명령하는데까지 나아갔습니다. (PPT 3)당시 면죄부를 판매하는데 앞장섰던 수도사 요한 테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이 자리에서 곧 사함을 받을 것이요, 현재 살아 있는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나 또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이 표를 사면 돈이 헌금함에 짤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똑같은 것을 의지했습니다. 자신들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지요. “우리는 타고나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타고났으며, 설령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모습을 조금 유식한 말로는 “자기 의”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의”를 내세웠으나 그것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루터는 민감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로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경건을 추구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를 고백하고, 무릎이 닳도록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죄책감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두려운 분이신가? 나는 아무리 회개해도 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가?”
그는 절망에 휩싸인 채 로마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구절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꿰뚫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순간 루터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구원이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혈통이나 공로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을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임을 말입니다.
마침내 그를 얽매고 있던 죄와 두려움의 사슬이 끊어지고, 사람이 만든 제도와 관습에 포로 되었던 심령이 해방되었습니다. 진리가 루터를 자유케 하였습니다. 이후 루터는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복음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가 외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이 세 가지 선언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뒤흔들 참 자유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교회에서 이것저것 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구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케 된다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정말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까? 진실로 여러분을 얽매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고 여러분을 가두고 있던 감옥문이 활짝 열린 것이 맞습니까?

본론 2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도록 자유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터가 복음을 통해 다시 발견한 진정한 자유는 이 시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자유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PPT 4)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이것이 루터가 말한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것을 “방향이 있는 자유”라고 말을 붙여서 설명하곤 하는데요, 자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유는 다른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직은 좀 두루뭉술하죠? 차근차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5 NKRV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은 죄와 죽음이라는 세력에 포로가 되어 있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봅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 NKRV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와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던 자들의 어깨에서 멍에를 벗겨주십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멍에를 메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지 이제 조금 눈에 들어옵니까? 새로운 멍에를 져야합니다. 그걸 지고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겁니다.
루터가 참 사랑했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구절 한 부분씩만 더 인용해봅시다. (PPT 5) 먼저 로마서 6장 18절입니다.
로마서 6:18 NKRV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자 여기 제가 말했던 방향이 나옵니다. 죄의 노예였던 자들이 자유를 얻어 이제 무엇에게 메이게 됩니까?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의라는 단어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나라 같은 말을 다 가져다 붙이셔도 됩니다.
From Sin, To God. 이것이 방향이 있는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5:13절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NKRV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까? 이제 무엇에도 메이지 말고 니 맘대로 한번 살아가봐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도록,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자유입니다.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 시대에 접어들며 교회는 참된 자유가 가리키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자유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참 자유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자유는 방종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겨우 내 맘대로 살아가는데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하시며 이전에 죄와 죽음의 종이었던 때에 꿈꿀 수 없었던 삶을 한 번 살아보라고, 이제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멍에를 메고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기꺼이 다 바쳐 사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분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슬프고 우울해 보이십니까?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기쁨에 겨워하며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에는 늘 충만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통해 진짜 멋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고, 그분의 삶에는 참된 아름다움이 늘 흘러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인생을 다 바쳐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가장 기쁘고 즐겁고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삶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자유케 되었는지 그 증거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허락하신 삶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5 NKRV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시간 상 슬슬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는 사실 말씀과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두 논문을 곁들인 것이었는데, 부디 여러분에게 진리에 대한 배움과 참된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가득해지길 소원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을 할 때는 기초가 아주 단단해야 하늘을 향해 마음껏 쌓아 올릴 수 있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라갈 수 있도록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우리의 인생을 딱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왜 하늘을 향해 자라나기보다 여전히 세상의 욕심을 가득 품고 우리의 살을 찌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하늘을 향해 키가 커야할 자들이 세상을 향해 덩치만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기쁘고 가장 즐겁고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고서 왜 우리는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전에는 그렇게 살면 망할까봐, 그렇게 살면 죽을까봐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자들이 그리스도인들 아닌가요?
죽음마저도 정복해버리신 분인데 설마 우리의 삶 하나 책임지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걸까요? 그분의 지혜가 우리의 삶을 다 책임지기에는 부족합니까? 그분의 능력이요? 오직 은혜를 인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굳게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함께 모인 예배자 여러분, 하늘의 멍에를 메십시오. 세상의 소금이요 빛,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 이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멋진 역할을 기쁘게 감당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방종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하늘의 멍에를 메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생 동안 마음껏 이 자유를 누리며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방탕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리를 알게 하시고 참된 자유를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진리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축도

이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와 죽음에 붙들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더럽고 추악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로 기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이 없는 사랑과, 항상 우리를 도우셔서 진리의 길, 자유의 길로 걷게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시고 역사하심이,
이 시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마음껏 하늘을 향해 우리의 삶을 펼쳐가며 쌓아 올려가겠다 결단하는 모든 청년들과 또한 함께 예배하는 자들 위에, 이들의 가정과 학업과 생업과 비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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