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역사(11) : 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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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나 3:10–4:4 NKRV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설교문

재밌는 요나서

성경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라면, 요나서는 그 66권의 성경 중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성경중 하나입니다.
특히 요나서가 성경에서 구약의 저 끝 언저리에 통틀어 48절 밖에 안되는 짦은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요나서가 가지는 인기는 매우 독특합니다.
아마도 이 이자리에 계신 성도님들도 가장 여러번 반복해서 읽은 성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하면 요나서가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설교하는 대신 같이 요나서를 통독하자고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도 적어도 3~4번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제가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대략 20번 정도는 요나서 전체를 반복해서 읽었는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왜 요나서는 그렇게 인기가 많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짧은 분량임에도, 그 속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 때문일 것입니다.
요나와 하나님, 그리고 니느웨 성읍 간의 삼각 구도 속에서 흐르는 긴장감과, 또한 반전은 요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꿀 같은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히 선지자 요나라는 인물이 가진 다른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성향은 우리들에게 묘한 흥미와 함께 한 편으로는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도 수 없이 많이 요나서를 읽으면서 이 못난 인간이 ‘어휴 어쩜 이렇게 나랑 비슷한가’ 하는 생각을 얼마나 여러번 했는지 모릅니다.
동의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네요.

반전의 요나서

특히 오늘의 본문은 요나서의 모든 이야기가 반전되는 장면입니다.
요나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악독한 성읍 니느웨에 대해 분노하신 하나님이 그 성읍을 멸하기 위해 요나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요나 1:1–2 NKRV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이 짧지만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자비와 긍휼의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선지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언제나 실제 그 악이 심판을 받게되며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요나 1:3 NKRV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이 말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요나의 도주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도주는 마치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거나 늦추기 위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을 막으려던 다른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읽어보았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위해 가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가 가는 길을 다섯 차례나 막아섭니다.
멸망 당할지도 모르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여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행사를 여러번 막아섭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멸하시려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시거나 아니면 차라리 자신도 생명 책에서 지워달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모두 참 겁도 없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을 막아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함에 응답하시지만, 용서받은 이스라엘과 달리 의인이 10명도 남지 않은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습니다.
도망치는 요나의 모습도 이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니느웨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배를 타고 니느웨에서 멀어집니다.
배를 탄다는 것은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중간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계속 가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멸망의 메세지를 니느웨에 전하지 않겠다는 요나의 단호함으로 보이는데, 그 숨은 의도를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 요나서의 저자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한 이유를 의도적으로 감추면서, 도주의 결과만을 보여줍니다.
결국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니느웨로 향하게 된다는 결과 말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멸망의 메세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본문에서는 요나가 도망친 이유가 낯낯이 드러나는데 그 이유가 너무도 충격적입니다.

요나 3:10–4:1 NKRV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이 짧은 두 절에서 그동안 전개 되어오던 모든 이야기가 뒤집혀 버립니다.
1. 니느웨가 다른 멸망한 성읍이나 민족들처럼 선지자 요나의 말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2. 또 하나님이 니느웨에게 재앙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막기 위해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매우 싫어했다고 표현되어있는 단어의 본 뜻은 ‘악을 행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자비와 용서를, 자기 기준에서 악한 일로 여기고 심히 화를 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이제 숨겨왔던 자신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놓고, 하나님께서 이러실 줄을 자신은 진작에 알았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며 떼를 씁니다.
요나 4:2–3 NKRV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어찌보면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있는 요나 아닙니까?
그러나 요나의 그 아는 것이 순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요나의 말들이 어떤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결국 요나의 목숨을 건 도주는 자기 목숨을 걸고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한 행동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고 12만명을 몰살 시키기 위한 심판의 시한 폭탄이 터지기 만을 바랬습니다.
여러분, 이제야 요나가 폭풍 속에서 자신을 던졌던 그 장면이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배를 돌려 니느웨로 갈 바에 자기도 죽고, 니느웨도 멸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요나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자기 나름의 숭고한 테러리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재앙의 폭탄 해체를 명령하셨으나, 실수해서 터져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사흘 길을 돌아야할 성을 하루만에 대충 돌고 마는 것도 마찬가지의 심리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자기 목숨을 내놓았던 모세와,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요나는 마치 거울처럼 닮았으나 서로 뒤집힌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성네는 것이 옳으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생명입니까, 멸망입니까?
모세와 아브라함 같이, 영혼의 구원에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사실은 이 헌신이 한 순간에 다 내어주고 끝나는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 반복된 죽음의 악몽

저는 20대의 어느 시절에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절을 악몽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꿈의 형태나 스토리는 제각각이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 죽음으로 끝나는 꿈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날의 꿈은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시작됩니다.
전철이 들어오는 안내 방송이 들리고 도착을 기다리는데 한 아이가 장난을 치다가 플랫폼으로 떨어집니다.
꿈 속의 저는 어찌나 용감한지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아이를 플랫폼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전철에 사고가 나서 죽으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행이다’
그 생각과 함께 놀라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또 어떤 날은 화재 현장에 맨 몸으로 뛰어듭니다.
또 한 사람을 불 속에서 건져내고, 저는 죽어갑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합니다.
‘다행이다’
그렇게 또 놀라면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게 왜 저에게는 악몽이었을까요?
저는 제가 생각한 ‘다행이다’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살려서 ‘다행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꿈 속에 저는 그들에게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 죽음이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내 죽음이 낭비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저는 제 꿈 속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숭고한 자살을 반복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를 반복했습니다.
언젠가는 정말 사랑도 없이, 긍휼도 없이,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숭고한 마음도 없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모르겠지요.
사람들은 내 의도나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른채 나를 사람의 생명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해주지 않을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며 꿈에 설득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심하게 다투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가족 안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려는 제가 동생의 눈에는 가식적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와, 정말 그 말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화내고 변명하며 나의 진정성을 설득하려고 하다가 결국 싸움까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아, 물론 주먹 다짐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생들이 저보다 10cm씩 더 커서 못 이깁니다.
한참을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데 마지막 동생의 말에 저는 완전히 KO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마지막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봐. 도대체 뭐가 변했다는 거야? 내가 형 이런 모습 때문에 평생 상처받고 살았는데 고작 몇 년으로 뭐가 바뀌었다고 인정하라는 거야.
말문이 막혔습니다.
괴로운 말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한 순간에 인정 받고 싶었습니다.
20년을 넘게 이기적인 형으로써 상처를 주었으면서, 용서와 인정은 1~2년이면 충분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한 순간이 었으니,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인정해주는 것도 그래야 되는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에 억울했고, 성내고, 분노했으며, 나를 인정하라고 윽박 지른 것입니다.
적어도 같은 20년, 아니 평생을 써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오랜 악몽에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온 열방에 잃어버린 영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는 다이빙 시합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들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만 뛰어들어 복음만 건내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기까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거절당하며 또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오랜 장거리 경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적어도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가기 까지는 구원받을 백성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들을 품고, 그들이 돌아온다면 온 맘으로 기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품어가야만 합니다.
내 가족 구원에서 멈추지 않고, 도시에서 멈추지 않고, 나라와 민족, 온 열방을 그렇게 품어나가야하는, 평생이 걸리는 경주입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영혼 구원을 위해 한 순간에 그의 생명을 내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의 인생이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증명합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다고한 그가 자신의 삶을 가벼히 내던졌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봅시다. 이 말씀에는 바울이 복음을 위해 당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8 NKRV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복음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이정도 당했으면 “나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 이 모든 일 중에 단 하나만 당해도 우리는 복음을 위해 우리의 도리를 마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바울은 뒤에 1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3:1 NKRV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또 가리라.
이정도 했으면 됐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목숨을 걸고, 삶을 걸고 평생 사랑하는 너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리라.
니느웨에 대한 성스러운 테러 공격을 실패하고, 됐으니 이제 죽여주소서 하는 요나와는 전혀 다른 끈질김, 간절함이 바울의 편지에는 담겨있습니다.
매를 맞고 그 때 순교하지 않았다고 바울이 복음을 가볍게 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인생이야 말로 자신의 온 삶과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생명의 전달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매를 맞거나,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는 정말 목숨과 바꾸더라도 주님께 인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친구들이 내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이 목숨을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다보니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 신앙이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종교적 활동 정도로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목숨보다 더 한 것을 그들에게 내어줄 결단이 필요합니다.
한 순간의 목숨이 아닌, 그들과 함께하는 평생의 헌신입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오른 빰을 맞았을 때, 왼 편도 돌려대주는 삶,
겉 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내어주는 삶,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동행해주는 삶,
바보가 되어주고, 호구가 되어주는 삶
사랑하는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기까지, 아니 그들과 우리가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참으로 우리 일생을 내어주는 전도를 시작합시다.
자존심도 내어주고, 이기심도 내어주고, 모두 다 내어주고, 단 하나, 그들의 구원을 얻어냅시다.
때때로 억울하고 화가나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 때, 다시 요나에게 던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주님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분을 풀기 위해, 나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한 영혼이 영원한 죽음에 거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께로 돌아올 날이 미뤄지는 것도 결코 옳지 않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옳으신 그 뜻대로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주소서!
아멘
바라건데 우리의 생을 건 영혼 구원의 간절함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이 시간 말씀 가운데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열방을 구원하기 위한 결단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개인의 기도 제목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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