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6 주일오후예배: 마태복음 28:19; 에베소서 4:4-6; 니케아신경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2 viewsNotes
Transcript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8:19; 에베소서 4:4-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귀 기울여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니케아 신경을 함께 고백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3. 성령 하나님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으오니,
그분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공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죄를 얻게 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대망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이 말씀의 자리에 초대하시고,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심 참으로 감사합니다. 별 볼일 없고 아무것도 아닌 저희에게 복되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을 통해 계시의 빛을 비춰주시니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 시간 주님의 위대하심과 신비를 알게 하셔서 날마다 주님을 향한 기쁨을 올려드리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은 특별히 성령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이 교회를 향해 지금도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의 큰 은총을 받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과의 친교의 자리로 초대받으신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말씀의 자리에 잘 나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인데요. 음식을 통해 자양분을 공급받기도 하지만, 특별히 인간은 음식의 맛을 통해 행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을 통해 매번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양식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 생명을 지금도 이 강단을 통해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고 계시는데요. 오늘도 그러한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이 강단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려줄 유산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값비싼 재산일 수도 있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일 수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 즉 교회의 교사들에게 가장 소중한 유산은 다름 아닌 “구원의 진리”였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고백할 신앙고백의 문구들은,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고민했던 흔적들이며 그들의 고백적 언어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고대 교화가 남긴 유산인 니케아 신경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신경이 무엇인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 즉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이 니케아 신경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어때야 하는지를 우리가 깨닫고 있는데요. 우리가 성부와 성자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당연히 누구를 고백할 차례가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님을 고백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령님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으십니까? 유독 은사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성령님하면 방언이 떠오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심지어 병을 낫게 하는 신유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님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교회가 우리에게 남겨준 신앙 고백의 유산에서의 성령님에 대한 고백은 그런 부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님을 고백해야 할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가르쳐주는 신앙 고백에 대한 말씀을 “성령님과 거룩한 공교회”라는 제목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니케아 신경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듯이 초기 교회의 신학적 논쟁은 단순히 복잡한 ‘교리 문구’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표현과 문구들이 신앙 고백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이고, 이해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대한 문제도 함께 있었습니다. 고대 교회 때에 일어난 모든 논쟁의 암묵적인 주제는 바로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교회가 성령님도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우리의 ‘우리의 구원이 실제로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신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아버지보다 열등한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시기만 해선 안되었습니까? 오로지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셔야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리우스 논쟁을 통해 인간 예수가 단지 인간이기만 할 뿐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참 하나님이심이 확립되자, 그 다음 논쟁은 자연스럽게 성령님도 참 하나님이신가, 즉 성령님의 신성으로 옮겨갔습니다. 아리우스가 등장하기 이전에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을 변호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니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말하였고, 그렇기에 성령님을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이 라는 생각도 동시에 결코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사람이 세례를 베풀 때 어떤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아니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만?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고 초기 교회는 성례 시 신앙고백을 할 때 이 세 분을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계시 아래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라는 고백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어떻게 참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할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리우스의 주장의 후폭풍으로 예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켰던 아리우스주의처럼, 성령님 또한 피조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것을 따르자니 우리의 구원이 무효화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한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만든 집단은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며 황홀경 가운데서 성령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계시를 드러낸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성령훼방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라면 그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의 손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자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형제가 없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르침에 어긋나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성령 하나님도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교회가 고백하고 믿고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정형화된 언어로 어떻게 성령 하나님도 참 하나님이실 수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우리가 니케아 신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동등 본질” 그리고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 출생하셨다”라는 정형화된 언어를 통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동시에 태어나지 않으신 아버지와 태어나신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성령님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님일 수가 있는지를 고백하는 과정도 지금의 우리와 같이 성령 하나님도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쉽게 할 수 없는, 결코 순탄치 못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며 교회는 다시 성령님이 어떻게 참 하나님일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정형화된 언어로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는 성령님이 어떻게 참 하나님일 수 있는지, 즉 성령님의 신성과 성령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올바르게 활동하시는지에 대해 명확히 정의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공헌을 한 사람 중 한 명이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를 반박하여 예수님의 신성도 확보하였고, 동시에 성령님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원론적인 개념인 ‘신격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주장을 통해 성령님의 신성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즉 로고스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즉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로 오신 것이며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이 신격화의 전 과정은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만약 성령님이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인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창조주와 연합시킬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셔야만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실 수 있으시듯이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 수 있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만이 가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참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신격화’, 즉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이것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성적으로 피조물이면서 죄인임에도 성경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은혜로 입양된 자녀가 되는 것이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은혜의 입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인 신성에 참여하지만, 우리의 피조물 된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신격화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완성, 즉 영화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님의 신성이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확보하는 것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이제 구체적은 정형화된 언어로 성령님의 신성을 확보해야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성령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확신했지만, 이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형화해야 할까요?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 모두 하나님이시지만, 당시에 강조하였던 한 분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것을 통해 다신론으로부터 방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다른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니라, 각기 구분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하나님이 서로 다른 모습, 양태로 오신 것이 아니라 구분된 세 분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하고 결국 성령님의 신성을 확보하면서 삼위일체라는 정식 교리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이들이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입니다. 저번에 이충만 교수님이 오후예배 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서 언급하기도 한 교부이기도 한데,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이렇게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목숨을 걸고 이 진리를 수호하였습니다. 먼저 교회는 처음에는 성령님도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성령께서도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본질이며 신성을 지니고 계심을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령훼방론자들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성자와 성령이 구분될 수가 있느냐가 쟁점이었습니다. “출생되었다”라는 이 표현은 오직 성자께만 사용해야 성경을 따르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한다면 아버지의 손자이거나 아들의 형제라고 생각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성부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이 성령훼방론자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 즉 발출하셨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5:26 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서보면 분명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하여 성자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으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제 비로소 한 분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이해가 분명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길을 닦은 이는 분명 아타나시우스였지만, 명확한 설명을 제시한 이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공식을 제시함으로 삼위일체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였습니다.
“한 본질 안에 세 위격”
“본질”이 같다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 모두에게 동일한 신성이 있으며, 참으로 한 분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위격이 다르다는 것은 세 분이 한 분이 시대에 따라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세 인격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세 교부들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있어서 ‘태어나지 않으신 분’, ‘태어나신 분’, ‘발출하시는 분’으로 구별되거나 ‘부성’, ‘아들됨’, ‘성화하는 힘’이라는 관계로 구별된다고, 그러나 이 구별됨 속에서도 실체나 활동, 의지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자 성화자이며, 각 활동에서 하나이며, 한 위격 홀로 고유한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세 위격이자 한 신성으로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이로써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 아닌 참 하나님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성령님의 신성을 확증하고 니케아 신경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항상 주의했던 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무한한 분이시기에 유한한 인간의 정의, 언어, 범주를 넘어서 계씬다고, 우리는 그분을 결코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강조했습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상이 아닌, 신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정형화된 언어로 표현한 것은 그들이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맞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경을 대할 때 딱딱하고도 아주 무미건조한 언어라고 생각하여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일어났던 논쟁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논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드러내신 것, 인류에게 주신 것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 과정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은 우리의 지적 만족과 유희를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과 기독교 전통이 전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법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그리고 이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게 됩니다. 태어나지 않으시고, 태어나시고, 발출하셨으나 한 분이시라는 이 놀라운 신비를 우리는 신경을 통해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은 이렇게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확립하면서 성령님의 활동 방식에 대한 논쟁도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아까 제가 언급했듯이 몬타누스와 같은 자들이 등장하여 성령님의 활동을 황홀경에 빠져 성경 외의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며 성경과 전수된 사도적 사르침의 권위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것을 거부하고, 성령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 황홀경에 빠져 새로운 계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식을 성령님께서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님께서는 교회, 교회 구성원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례와 직분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하시고 활동하신다고 당연히 생각하였고, 그 주체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방식은 항상 인간을 사용하시고, 인간과 함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가 있다는 것을 배격하며, 성경이 가장 최고의 계시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와 교회의 직원인 직분자, 그리고 성도인 우리와 우리가 모인 교회가 거룩해지는 것은 다 성령께서 지금도 역시 일하고 계시는 역사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 및 다른 여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현실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였습니다. 우리가 니케아 신경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 부분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교회가 과거에 가장 극심한 박해를 겪고 있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루어진 주제였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거룩한지, 그리고 어떻게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박해와 박해 이후에 대두되었습니다.
3세기에 로마를 다스리고 있던 사람은 황제 데키우스였습니다. 데키우스는 경제 문제와 군사 문제를 모두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로마 제국을 두고 “왜 로마의 위대함이 사라져 버렸는가?”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어 준 ‘신들’을 향한 전통적인 믿음이 로마 제국 내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에 일조한 기독교, 즉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피해를 주는 칙령을 공포하였습니다. 유대인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은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향을 피훠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로마 시민들은 여기에 대해서 반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과거 로마와 마카베오 왕조가 맺은 협정 덕분에 유대인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고 로마법 아래에서도 유대인의 종교적 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을 유대인도, 로마나 그리스의 문화 아래에 있지도 않은 제3의 종족으로 여겼으며,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데키우스의 칙령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신들에게 숭배하라는 칙령에 결코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심한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는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그렇게 한 것처럼 위장해서 증명서를 얻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 끝날 줄 몰랐던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끝이 나게 되었고, 교회 내에서 불거진 문제는 타락한 이들, 즉 기독교 신앙을 배교하고 로마 신들을 우상 숭배한 자들을 다시 교회 내로 받을지 말지에 대한 여부를 두고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반응한 한 부류는 엄격주의라고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순결한 사람들만의 모임”으로 주장하며, 배교자들을 거부하고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거룩하지 않은 직분자가 전달하는 성례는 부당하고 부패했다고까지 주장하며, 교회의 거룩함이 구성원의 도덕적 순수성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도 충분히 이해되거나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시면 도덕적으로 순수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해야 그것이 효력있게 발생할 수 있다고 충분히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전달하는 사람이 순수해야 의심없이 설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키프리아누스라는 교부는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긍휼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징계하면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쪽은 배교자들을 향한 관용을 베푸는 정책을 채택하려는 이들과 엄격한 자세를 취하려는 이들로 인해 분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자들은 배교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음을 지킨 자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자들이 모인 자신들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는 주장하면서 다른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소위 분파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박해 이후 교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에 대한 문제, 교회를 어떻게 하나되게 만드시는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에 교부들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투쟁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말씀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셔서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에베소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라는 숫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진 않았지만 3절에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교부들은 어떻게 교회의 거룩성과 일치성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투쟁하면서 노력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키프리아누스가 공헌하였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공헌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거룩함은 인간 자체의 순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이 행하시는 사역에서 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직분자의 순결함을 의존하지 않으며 정통을 따라 적법하게 행한 성례는 유효하며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성례는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요한1서의 가르침대로 말입니다. 요한1서 1:8-9 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편지를 작성한 요한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전히 죄가 있으며, 수신자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라는 말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께서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1서의 가르침에 따라 키프리아누스의 노력으로 주교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교회가 구원받은 선택받은 자들이 모인 성소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학교라고 주장하면서 회개를 위한 적절한 제도, 타락한 이들을 적법한 절차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규칙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제가 항상 교회를 두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과 악인이 모인 곳이며, 교회는 건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라는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 모인 곳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일평생동안 회개의 작업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알았고, 교회 안에서 구원이 베풀어지기에 그 누구도 상관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죄를 정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고, 방주에는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모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거룩한 곳이며 성령께서 여전히 거룩하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지 교회 자체가 거룩한 곳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교부들의 노력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하여 이렇게 수호하였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일치성이었습니다. 순결한 자들만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파주의자들은 교회를 분열시킴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자들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치성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열의 위기 속에서 “교회의 일치”야 말로 교회의 본질적인 징표이며, 이 일치를 이루는 핵심은 바로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이며, 성령의 사역에 저항하는 행위였습니다. 교회의 일치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조직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거룩한 사역을 수호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밖에서 행한 성례는 효력이 없는 성례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치에 대하여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구원의 방주임을 강조하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며, 분열을 조장한 분파주의자들은 교회 밖으로 축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축출을 통해 교회는 일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 성령님의 신성을 교회가 어떻게 확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현장 속에서 교회의 거룩과 일치를 어떻게 성령께서 이루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굉장한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령님의 역할에 대한 부분입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성령님을 참 하나님으로 확립했듯이,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주체적인 분으로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힘이나 능력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성령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신격화’의 주체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단순히 감정적 체험을 넘어, 우리의 구원이 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보증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경건 생활은 이 참 하나님이신 성령님과의 연합을 향한 응답과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의 역할입니다. 거룩함은 성령님의 선물이며, 일치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분파주의자들의 주장과 박해의 위협 속에서 교회가 배웠던 진리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거룩하게 만드시는 곳이지,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거룩을 넣어주고 계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담보하고 있는 소유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이기에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으며 성령님의 은총과 일하심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일치는 양보와 대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부들이 성령님의 신성을 확립하며 치열하게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듯이, 우리 역시 서로 다른 의견과 배경을 가진 지체들을 향해 성령 안에서 양보와 사랑의 대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참된 일치는 우리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름을 성령 안에서 수용하려는 부단한 노력과 책임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통일된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그 분 안에서 사랑과 온유함으로, 양보와 대화를 통해 일치를 이루어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서로 다른 의견의 차이, 감정의 굴곡으로, 심지어 신학적 견해가 다르다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분열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잘못한 것은 인정하며 사과하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 서로가 대화를 통해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대 교회 교부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아본 것처럼 성령님의 신성과 교회의 본질을 수호하여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이 유산을 통해 우리는 참 하나님이신 성령님, 그리고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공교회를 이루시는 성령님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굳게 붙잡으시면서, 성령님과의 깊은 연합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노력하는 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라는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성령님께서 치료하시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오늘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계시며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로써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금도 거룩하게 만들고 계시며 하나된 보편의 교회를 형성하도록 하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성령 하나님이 어떤 능력이나 힘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주도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감사합시다.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셨다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신비적 역사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에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가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교회를 찢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인 이 교회 안에서 모두가 다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양보와 대화를 통해 일치를 이루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과 사역을 깨닫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같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될 수 있고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한 분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했던 것처럼 지금도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일치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저희의 모든 순간 속에서 성령 하나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언제 함께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삼위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저희가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고백하는 행위임을 기억하면서 이 니케아 신경을 통해 찬송을 올려드리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