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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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성경봉독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서론
서론
오늘은 금요심야기도회이면서
또한 자녀들을 위한 세이레기도회로 모였다.
오늘 본문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 부르시는 장면
두 명의 제자 - 빌립, 나다나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증거했다.
그리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며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며 증거하였다.
이렇게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과 삶을 같이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예수님의 사역을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몸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장차 예수님의 증인이 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과 나다나엘도 이러한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은혜 받는 복된 시간 되기를 축복한다.
본론
본론
예수님은 먼저 빌립을 부르신다.
43-44절 말씀이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지금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 와 계셨다.
그곳에서 며칠 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갈릴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고 계셨다.
그 때 마침 길에서 빌립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아마 예수님은 지금 혼자가 아니셨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드레와 그의 형제 베드로,
그리고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는 또 한 사람인데
아마도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일 것이다.
원래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빌립은 이러한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
갈릴리 벳세다라는 마을 출신으로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빌립은 자신이 잘 아는 고향 친구들 사이에
누군가 낯선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빌립은 그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 만난 빌립에게 자신을 먼저 소개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너무나 간결한 한 문장이지만,
빌립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울림의 말씀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나를 따르라’하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뭐야, 이 사람?’
‘자기가 뭔데?’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까?
아니 그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빌립은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을 듣자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느껴던 것 같다.
처음 만났지만
이미 나의 모든 것, 내 인생 전부를 알고 던지는 한 마디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 바로 내가 찾고 기다린 그분이구나’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분명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베드로, 안드레 등과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빌립은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을 따랐는가?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혼자만 따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를 찾아가 그에게도 예수님을 소개하고 함께 따르자고 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혼자 누리면 되는가?
아니다.
같이 나누어야 한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은혜가 있길 축복한다.
45절을 보자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 간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인
바돌로매와 같은 인물이라 여겨진다.
빌립은 분명 무척 흥분되고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다나엘, 나다나엘, 우리가 드디어 만났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 분을 만났어.”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을 만났어.”
“성경이 기록하고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야, 그 분을 만났어.”
“그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야.”
여기서 ‘우리’는 빌립 자신을 포함해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을 말할 것이다.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장차 이 땅에 구원자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빌립과 그의 동료들은 그 예언을 믿고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빌립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와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다.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까?
‘와, 진짜? 진짜? 진짜 만났어?’
‘나도 가서 만나고 싶다. 나도 소개해 줘.’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다나엘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46절이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나다나엘의 귀에는 빌립이 말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란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이라는 말이다.
나다나엘은 나름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던 것 같다.
특히 메시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성경에 메시야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했는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다.
미가서 5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 나다나엘은
‘베들레헴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빌립이 말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자란 곳은 나사렛이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다.
예수님은 미가서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하지만 빌립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난지 하루 이틀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탄생과 그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나사렛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제 자신을 소개할 때
제 고향은 강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제가 태어난 곳은 강릉이 아니라 강원도 고성이다.
이걸 자세히 설명하려면 밥 먹으면서 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구약 성경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게 될 것을 여러 말씀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것 또한
구약 말씀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23절은
예수님이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게 된 것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나다나엘과 빌립은 아직 거기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어, 그러네…’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다.
나다나엘의 질문처럼
‘나사렛 출신이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지?’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립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정보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과 확신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야기한다.
“와서 보라”
내가 말로는 설명 못하겠지만,
너가 와서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나선다.
아마 나다나엘은 빌립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따라 나섰을 것 같다.
물론 마음 한 편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빌립이 이렇게까지 할까 하는 호기심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다나엘의 생각은
예수님이 그에게 건넨 두 가지 말씀으로 인해 철저히 깨지고 만다.
나다나엘을 보자 마자 예수님이 건넨 첫번째 말씀이 무엇인가?
47절 말씀이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지금은 서로 통명성도 하기 전이다.
인사도 하기 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멀리서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을 보자
그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이다.
육신적으로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으로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또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 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 흉계를 꾸미거나, 속이거나, 거짓되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다나엘의 외모를 이야기 한 것인가?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다.
나다나엘의 보이지 않은 내면과 속사람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품을,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와 열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냥 인사치례로, 칭찬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의 내면을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라는 것이다.
십 년을 살아도, 이십 년을 살아도 모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내면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통성명도 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소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향해
겉 모양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어쩌면 자기 자신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사람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겠는가?
당연히 나다나엘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나를 알지?’
‘아니, 당신이 누구시길래 나를 그렇게 잘 아십니까?’
나다나엘의 질문은 놀람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이은 예수님의 대답으로 인해
나다나엘은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48절이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는 이미 너를 보고 있었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이미 너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빌립이 너에게 가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부터
너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너를 보았고 알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길을 지나가다가 너를 본 적이 있어’라는 뜻이 아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분명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묵상하면서
선지자들에게 주신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인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분명 무화과나무 아래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나다나엘 둘만의 은밀한 교제의 장소였을 것이다.
나다나엘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고,
나다나엘은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 눈 앞에 있는 예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별볼일 없는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다나엘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알고 계실 나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조차도 자신의 지식과 논리로는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그는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고백인가?
49절이다. 같이 읽어보자.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할 때
그 기도하던 자신을 보고 계셨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또한 예수님이 바로
자신이 기도하고 바라고 소원했던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또한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인 자신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왕이시며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나다나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더 큰 약속을 주신다.
50-51절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연상되는 성경 말씀이 있는가?
이스라엘, 즉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의 내용과 무척 흡사하다.
나다나엘과 그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후
형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할 때 루스라는 곳에서 잠을 자게 된다.
거기서 한 꿈을 꾸게 된다.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야곱은 꿈 속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보았고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통해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 하늘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이 꿈을 꾼 후에
자신이 누워 잠을 잔 그 땅이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 고백하며
그 이름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 짓게 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해 “더 큰 일을 보리라” 말씀하시면서 무엇이라 하시는가?
51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이 하늘과 누구 사이를 오간다고 말씀하시는가?
인자이다.
즉 사람의 아들, 바로 예수님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이 땅을 연결하는 분이 누구라는 것인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누구라고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집, 벧엘, 곧 성전이라 말씀하는 것이다.
지난 주일 담임목사님께서 설교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이 예수이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를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이 지금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이 은혜를 누리고 있다.
앞으로도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축복한다.
결론
결론
저는 오늘 말씀에서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과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모로써 우리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부모보다 못하기에 부모가 하나 하나 도움을 주어야 한다.
먹는 것부터해서, 입는 것, 자는 것
모든 것을 챙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또한 부모의 당연한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어 가면서
자녀는 점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면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아니 시간이 더 지나면
부모가 자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도 오게 된다.
자녀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교 숙제도 부모가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이 되면, 아니 초등학교 5학년만 되어도
학교 숙제 질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온다.
자녀가 성장해 부모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똑똑하고
사회적으로도 더 좋은 직장과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도 있다.
이제는 부모 도움 없이도 더 잘 살아갈 때가 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이러한 자녀를 보면
‘이제는 내가 해 줄 게 더 이상 없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로써 자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녀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빌립이 나다나엘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것처럼
내 자녀가 나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이 배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은 지식 그 이상이다.
내가 가진 믿음을,
내가 가진 복음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자녀에게 잘 설명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은 말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빌립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똑똑해서도 아니다.
그가 설득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와서 보라’는 그 외침 하나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예수님을 만나면 좋겠어.”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어.”
예수 없이도 내 자녀가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가?
지금은 공부하느라, 직장 다니느라 너무 바빠 예수 믿을 시간이 없어 보이는가?
나보다 똑똑한 자녀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녀에게 외쳐야 한다.
‘와서 보라’
내 자녀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 우리 자녀들의 인생에 있어
입시를 잘 치르는 것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 줄 믿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고 계신 예수님이
또한 우리 각자의 인생도 보시고 아시고 계신 줄 믿는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도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약속하신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나를 보고 계신 예수님이
나도 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제한된 작은 지식과 생각에 갇혀
그것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던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 우주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을
함께 보고 꿈꾸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지금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과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오늘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