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떠나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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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스라 2장
제목: 제국을 떠나 천국으로
[서론]
최근 대구에 계신 한 목사님을 만나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과 대화할 때면 항상 모든 결론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는 합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번에도 제 고민을 나누던중, 결국 우리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은 두가지 뿐인거 같아요. 제국의 길이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길이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의 길을 걷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제국의 가치와 우상을 좇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제국을 향해 걷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고 있는가?”
[본론1]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약 50여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유대인들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갈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것을 허락해 준 사람이 바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입니다.
그는 놀라운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유대인 포로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줍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수 있도록 허락해줍니다.
심지어 바벨론이 약탈한 성전 기물들도 되돌려주고 이웃들에게 귀환자들을 돕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제국의 왕을 사용하셔서 그 분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을 떠나 고국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오릅니다.
그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르심에 응답했을까요?
에스라 2장 64절 입니다.
무려 약 5만명이 귀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백성들이 42,360명, 노비가 7337명, 노래하는 자들이 200명입니다.
여기에 많은 재물들과 짐승들이 있습니다.
말과 노새, 낙타와 나귀가 수천마리니까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행렬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무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150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습니다.
감이 잘 안 오시죠?
서울에서 부산이 약 400킬로미터인데 거의 4배 거리입니다.
게다가 길은 대부분 광야와 황무지, 돌산과 모래 언덕입니다.
심지어 아이들과 노인, 가축과 짐까지 함께 있으니, 그 여정은 그야말로 험난하고 고된 순례의 길입니다.
저도 선교여행을 몇번 다니면서 느꼈습니다.
10명에서 15명 정도의 팀만 이동해도, 짐을 챙기고 숙소를 정하고 식사할 곳을 찾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한번은 화장실이 제대로 안되어 있어 변기 위에 올라가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세수를 못해서 물티슈로 얼굴과 몸을 닦아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수만명이 그런 여정을 함께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길은 결코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 과연 왜 그들은 이런 고된 길을 선택했을까요?
이 불편하고 험한 길을 떠나며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았던 것일까요?
[본론2]
먼저 생각해볼 점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에서의 삶입니다.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지 5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미 두 세대가 지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곳에서 집을 짓고, 자녀를 낳고, 자식들을 교육시키며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2세대, 3세대에게 바벨론은 더이상 포로의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고향같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외국에 정착한 한인 2,3세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낯설고 멀고 불편한 곳인 반면, 바벨론이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터전입니다.
게다가 바벨론은 세계적인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어 그 당시 문화와 문명의 정점에 있던 곳입니다.
지금도 영국 대영박물관에 가보시면 그 당시 바벨론 제국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엿볼수 있습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똑똑해서 그 곳에서도 굉장히 많은 재산과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단서가 오늘 말씀에도 등장합니다.
노비가 7337명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 따지면 노래부르는 연예인이나 가수들이 200명이나 있었습니다.
가축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누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시지만 그곳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실현될 곳이 아닙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땅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도 없고, 성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성전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들은 제국의 풍요를 과감히 버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택한 것입니다.
보장된 삶을 떠나, 불편하고 고단하고 불확실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선택이 가능할까요?
그 비밀은 에스라 1장 5절 에 있습니다.
“그 때에 유다와 베냐민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하나님의 감동’이 그들을 깨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히브리어는 ‘깨우다’, ‘일으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익숙한 편안함 속에서 무뎌졌던 마음을 하나님의 감동이 다시 깨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을 모두가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감동은 받았지만 실제로 떠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나아갈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이 긴 여정과 험한 여건을 감당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지금 ‘제국’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제국은 어떤 곳입니까?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스펙과 성공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습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중심성이 신처럼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속도와 효율, 성과가 최고의 가치이기에 사람이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곳입니다.
이런 제국의 유혹은 날마다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핸드폰에 뜨는 광고처럼, 유튜브 알고리즘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소유하면 행복해질수 있다고 ‘이 방식대로만 하면 성공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만, 실제 삶은 제국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제국에 속한 사람인가는 교회 출석 여부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 어떤 삶의 방향과 길을 가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제국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천로역정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넓고 편한 길이 아닌, 좁고 협착한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본론3]
하나님은 제국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이름이 오늘 말씀 속에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족보나 가문의 명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명단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제국에서 불러내셔서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기록하십니다.
먼저 2절에는 지도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3-35절까지는 일반 백성들의 명단입니다.
36-42절까지는 예배를 담당할 제사장과 레위인의 명단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선택이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예배를 회복하려는 신앙의 결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43절부터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막일꾼들’이라는 표현에 동그라미 표시하십시오.
그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고, 단순한 일꾼들입니다.
성전에서 나무 패고, 물 떠오고, 청소하는 잡다한 일을 하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도 하나님 나라 귀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55절에는 솔로몬을 섬기던 종들의 자손들도 등장합니다.
성전과 왕궁을 섬기던 종들의 후손들입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지만,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꺼이 귀환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과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제국은 능력있는 자, 가진 자, 성공한 자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헌신된 자, 섬기는 자, 예배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했던 사람들,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명단에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한편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59-63절입니다.
족보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돌아왔지만, 자신의 출신을 확실하게 밝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 중에는 자신이 제사장 가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족보가 입증되지 않아 제사장직분이 보류됩니다.
이들은 우림과 둠밈, 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도구가 다시 회복될때까지 기다리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수는 있지만, 정체성과 거룩이 분명한 사람만이 사명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제국처럼 성공과 성과, 스펙과 지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에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제국이 무시하는 이름일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오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그 이름을 기록하여 주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제국의 길이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길이냐?
이 선택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의 우리에게도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제국은 여전히 우리를 편안함으로 유혹합니다.
세상의 가치, 눈에 보이는 성공, 익숙한 안정 속에서 살아가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길은 믿음으로만 걸어갈 수 있는 좁은 길입니다.
불편하고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가 있는 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길을 함께 걸을 사람들을 감동으로 깨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감동에 응답하여 순종하며 걷는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기록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이름도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명단에 올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믿음과 정체성과 거룩으로 우리의 삶을 세워나가길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감히 제국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작은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 걸음이 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길 위에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일에 기꺼이 헌신하며 섬기는 함께걷는교회 모든 식구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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