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1:1-11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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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산에 올라가라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소선지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아주 오래전에는 소선지서가 호세아 아모스 미가 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이유가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중심으로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2) 예를 들어 중심을 미가서로 보면 미가 6:8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와 같은 말씀이 중심을 잡는 것이죠.
그렇다면 소선지서에서 학개서는 어떤 위치와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가요? (3)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 시작해서 잘 아시는대로 다윗 솔로몬을 거치면서 남.북으로 분열했고 북 이스라엘, 남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북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 경에 패망했고 남 유다도 주전 586년에 패망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의 시간에 우리가 아는 선지자들이 그때마다 등장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안그러면 혼난다. 자꾸 그러면 패망한다. 라고 경고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를 무시한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남 유다에도, 봤지 북 이스라엘이 어떻게 패망했는지 너희도 그렇게 살면 같이 망한다 라는 이야기가/ 사무엘 열왕기 역대하에 걸쳐서 나옵니다. 그때 등장했던 선자자들의 이야기중 작은 분량을 모아 소선지서라고 묶여 진 것입니다.
소선지서는 이렇게 주전 820년경 부터 시작해서 주전 510여년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전체적인 조망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살피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4)그런 상황에서 학개는 남 유다가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세대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5)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포로된 남 유다가 돌아온 폐허의 현실과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학개서는 특히 짧은 2장의 구성을 에스라서와 함께 볼 때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돌아온 이들에게 성전 재건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아시는 분들은 이방왕인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짓고 예배하도록 하는 일종에 친화 정책이 일어 났다는 정도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성전 재건’의 이야기로만 읽는다면 그 깊은 의미를 살피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염려를 내려 놓고 마음에 문을 열고 함께 말씀의 깊이를 경험하는 설교자의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혹시 포로로 붙잡혀 간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본 환상을 기억하시나요?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인데 정말로 믿기지 않는 장면이죠.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이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은 없을 것입니다. (6)이번 부흥 사경회의 중심 말씀을 함께 읽어 볼까요 ‘하나님 나라의 비전, 그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백성들에게 꿈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학개의 비전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과의 관계를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신다’라고 미리 말씀을 드려 놓고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CCM 가사중에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면 꾸는 꿈이 아니라 이 꿈은 하나님의 꿈. 즉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온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의 전유물 처럼 오해합니다. 그런데 소선지서를 읽다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나서가 나옵니다. 요나서는 미가서를 나훔서와 함께 감싸고 있는데 앗수르라는 상당히 호전적인 이방의 수도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내용이죠. 요나는 심판의 경고를 니느웨에 사실 대충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수도 전체가 회개가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넘어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방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돌아온 그들은 나훔서에서 120년이 지나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역사의 시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앞서 읽었던 (7)미가서 6:8절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구약의 표현입니다. 이를 다시 요듬 표현으로 바꿔보면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삶을 바울은 의롭게 한다는 ‘칭의’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성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의미를 ‘영화’라고 하는 정의까지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일어나면서도 이해를 위한 순서적인 의미로 세분화 한 것인데, 말씀과 교리 그리고 삶이 한 덩어리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남은 자였고 심판으로 부터 구원 받은 자 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구원 받은 자로써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중심에 ‘성전 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패망을 보고도 ‘우리는 괜찮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교만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성전은 파괴 되었고 바벨론에서 포로의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이방인의 왕인 고레스를 통해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죠. 이미 고레스라는 왕이 태어나기 140여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선포한 내용입니다.(8)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그리고 포로 시기에 걸쳐 활동한 예레미야도 (9) 역대하 36:22 “22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라는 것입니다.(10) 에스라 1:1–3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이며 두 번째는 ‘고레스가 한 말처럼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다’고 돌려 보내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렇게 고레스 왕의 칙령을 들고 돌아온 이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 감격과 상황이 에스라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11) 에스라 1:5–6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계속해서 고레스 왕도 창고에서 느부가넷살왕이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왔던 성전의 그릇 등 다양한 것들을 넘겨 줍니다. 이렇게 1차로 돌아온 사람들은 무려 42,360명이고 그들과 함께 남종과 여종이 7,337명 등 많은 사람과 많은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이 많은 재물을 갖고 나와 성막을 세운 것처럼/ 5만여명의 사람들도 성전을 재건할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 기간을 셈하시는 일종의 보상을 주시는 것이죠.
그렇게 돌아온 자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릴 때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공사가 다 끝나고 예배를 드릴 때 영광과 감사를 누렸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이들이 2년이 지날 즘에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의 기초가 놓을 때 이렇게 기록합니다.(12) 에스라 3:10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그리고 13절에 에스라 3:13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이제 순조롭게 성전 재건이 마무리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본문의 시작에서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달이라고 하면서 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시간은 얼마나 지났고 왜 백성들은 시기 상조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4장부터는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앞서 사마리아 즉,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이주 정책과 더불어 민족 혼합정책을 펼쳐 북 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 속으로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남아 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돌아온 남 유다가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자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성전 짓는 일을 방해했다고 기록합니다. 조직적으로 방해해서 고레스때부터 다리오 왕때까지 상당한 시간동안 성전 짓는 일을 방해했고 특히 고발하는 글을 왕에게 직접 올려 적극적으로 방해를 한 것이죠. (13) 에스라 4:12 “12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그리고 나서 결국 성을 세우면 왕에게 대적할 것이라는 내용이죠.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혐오와 가짜 뉴스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패역하다. 악한 성읍이라고 하는 말과, 패역하다는 의미가 범죄와 반역을 의미하는데 이런 안 좋은 말을 예루살렘에 붙여서 보고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내용을 쉽게 풀어보면 ‘예로부터 이곳은 반란이 자주 일어난 곳이다. 왕들을 괴협히고 다른 지방에도 피해를 줬다. 그래서 이 성읍을 없앴는데 다시 세워 그런 반역을 하려고 한다’라고 가짜 뉴스를 만든 것입니다.
결국 왕은 명령을 내려 일을 중단 시키고 그들의 성읍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 재건을 하지 못한 시기가 무려 1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게’ 하신 뜻하심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막아 선 형국이 된 것입니다. 흔히들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표현이 생각 납니다.
함께 합시다.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하면 오히려 잘 안다는 사람이 나서서 내가 경험해서 아는데 라고 말하면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태도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사마리아의 외부적인 요인도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2절에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그들이 3절에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는게 말이 되냐’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교회 일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을 보면 뒤에 서 있거나 / 안되는 이유는 그렇게도 잘 찾으면서 / 막상 자신의 일이 걸린 일은 그 누구보다 앞장 서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이런 말도 가능합니다. 돌아와서 성전 기초도 했고 안 할려고 한건 아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렇게까지 조직적인 방해를 해서 못하게 명령까지 내려 왔는데 괜히 했다가 다시 포로로 잡혀가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집은 어떻게 그렇게 꾸민다는 말입니까? 흔히들 앞뒤가 맞지 않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 우리가 다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을 좀 맡기려면 밤, 낮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 지금은 아이를 돌봐야 하고, 맞벌이를 해야하는 상황 등 우리도 여전히 시기 상조라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처럼 16년이라는 시간을 침묵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워져야 할 성전 재건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기 상조다 라고 말하면서 주저 앉아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그런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을 해보면 ‘너희의 마음을 너희의 길들 위에 두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깊게 생각하라, 신중히 반성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6절과 7절로 이어집니다. 말씀이 아주 흥미롭게 배열됩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다/ 먹을지라도 - 배부르지 못한다/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의 삯을 받아도 - 구멍 난 전대에 넣음이 된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월급 날은 통장이었다가 다음 날이면 텅장이 된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들의 지난 16년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시간에 그렇게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흔히들 비기독인들도 이런 상황이 되면 ‘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면서 이유를 찾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에 삼재가 끼었나? 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3재라는 게, 3가지 재난인데, 3년이나 9년 주기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우상의 종합 사상입니다. 그래서 점을 보거나 이유를 찾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반면 기독인들은 삶의 문제가 있어도 그만, 없으면 평안하니 괜찮다는 식으로 신앙과 삶이 매우 수동적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얼마나 핑계 되기가 좋습니까? 이런 수동적인 태도는 오랜 시간 포로로 잡혀 마음 깊은 곳에서 그저, 잘 버티자, 포로에서 풀려나 성전 재건을 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니 시기상조다라고 하는 핑계는 결국 나부터 살고보자는 이기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상황에 끌려다니는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학개라는 이름의 의미가 축제라는 의미인데 과연 포로에서 해방된 이들의 삶이 축제인가 6절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를 잘 만들어 놓고 그저 항구에 둔 채로 제가 만들었어요 아름답지 않습니까라고 자랑하는 모습처럼, 자기 집을 꾸미며 나름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를 만들었다면 거친 바다의 파도를 치고 나갈 때 비로소 만들어서 보이는 아름다움이 용도대로 사용되어 확장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비전’입니다. 성경에 비전의 사람 하면 요셉인데 요셉은 자신의 성공을 이렇게 말합니다. (14) 창세기 45:7–8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비전을 가진 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머뭇거리고 주저 앉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 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전이 재건되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의 상태가 육신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갇힌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실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이번 부흥 사경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입니다. 말씀을 듣고 일어 설 때 입니다.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내 마음 먹기에 달렸고 책을 읽고 유명인과 함께 뛰고 참여하면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흔히 말하는 변화는 그런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15)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불과 얼마 전까지 흑암의 권세에 오랜 시간동안 포로로 잡혔 있어고 우리의 사고는 그때의 습성에 젖어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가 그랬습니다.(16) 골로새서 3:8–9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지금 돌아온 백성들이 그때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16년의 시간을 계산해보니 많이 뿌렸는데 얼마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사경회 첫 시간이 우리의 지난 시간을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눅15장에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을 버리고 성공을 좇아서 먼 나라로 떠납니다. 보호 받을 아버지를 버리면 자신의 재물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만난 세상의 친구는 내가 가진 재산을 노리게 됩니다. 좋은 사업 제안으로 이곳 저곳으로 이끌지만 결국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곳에 머물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가 자신을 돌아보니 잘못은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도 아버지의 집인 것처럼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시작해야 할 곳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8절에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라고 명령 합니다. 이 말씀을 앞두고 비전과 미래 세대는 누구입니까? 미래하고 하니 우리 생각에는 미래에 아이들, 또는 다가오는 어떤 일을 미래로 생각합니다. 본문의 ‘성전을 지어라’는 명령을 누가 받습니까? 성경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미래 세대라고 말합니다. 포로 시기에 잃어 버린 꿈, 비젼과 환상이 사라진 이방의 땅에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성전 기초를 놓고 목놓아 울었던 16년 전에 / 기대와 소망을 상실한 세대 말입니다. 시기 상조를 말하며 스스로 괜찮다고 주저 앉은 세대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더 필요한 것이죠.
소선지서를 넓게 보면, 왜 포로 이후의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이 끝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남은 자들이 다시 돌아와 진정한 회복이되는 세대임을 보여주며 /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서로 다른 세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꿈을 꾸는 자들 이라는 사실 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라고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땅은 척박하고 아름드리 나무 즉 성전을 짓기 위한 좋은 목재가 없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는 백향목하면 어떤 수식이 붙습니까? 레바논의 백향목이죠. 그러니까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는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끊임없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라, 16년 전에 그들이 이미 고레스로 부터 성전을 지을 주변 나라의 지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거 있잖아’라고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너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 나오는 말씀을 유의 깊게 보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도 영광을 얻으리라’
베에르쩨-보 베에크카베드 //

וְאֶרְצֶה־בּ֥וֹ וְאֶכָּבֵד

여기에서 ‘기뻐한다’는 말을 새 번역에서 ‘기껍게’ 여긴다로 ( ’라짜ㅎ’רצה 1)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마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부모이기 때문에 잘해주는 그런 표현입니다. 뻔히 알면서 나의 기쁨을 위해서 ‘기껍게’ 해 준다는 건, 자녀가 한 행동 즉 ‘나무를 베어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즐겁고 기쁜 상태의 감정과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 앞서 에스겔의 환상에서 예루살렘에서 떠난 영광을 기억하시죠. 그리고 영광이 없는 교회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이 영광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과 필연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 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낮추어서 맞추어 주신다’. 이 표현을 잘 이해하려면 예수께서 하신 놀라운 장면을 살펴보면 됩니다. (17) 요한복음 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어서 무릎을 제자 앞에 꿇는 그 장면입니다.
이렇게 기쁨과 영광을 함께 드러내는 장면이야 말로 학개의 이름이 의미하는 축제의 장면 아닙니까?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 혼인잔치에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잔치를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즉 영광은 믿음으로 연될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는 행동이죠 그리고 성전을 지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이 믿고, 순종한다면 순종하는 자녀들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시면 다시 믿음은 성장하는 선순환의 구조가 만들어 집니다.
포로에 돌아오고 20년즘 지나서 성전 재건이 마무리 됩니다. 돌아와 2년 후 기초공사, 그리고 16년을 빼면 불과 2-3년즘 걸린 셈입니다. 이런 성전을 두고 (18) 학개 2:3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사람의 눈에도 보잘 것 없는 것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기껍이 여겨 주셔서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과거로 시간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그들은 처음으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면입니다.
(19)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
다시 시간을 건너 뛰어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20)열왕기상 8:10–11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21)역대하 7:1–3 “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설명되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그 자체이고 본 자들은 반응할 뿐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상태가 영광의 상태인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광을 직접 준비하시고 드러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22)에스라 6:15–16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이 차이가 여러분 보이시나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새 번역으로 읽겠습니다.(23) 학개 2:6–9 “나 만군의 주가 말 한다 머지 않아서 내가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어 놓겠다.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은도 나의 것이요. 금도 나의 것이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바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게 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놀라운 장면이죠. 하나님께서 산에 가서 직접 벤 나무로 지은 초라한 성전을 ‘기껍게’ 여겨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 스스로가 자신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내겠다 하시고 인간의 눈에 초라함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그 초라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음성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24) 시편 103:13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입니다. 심판으로 인해 포로됨을 경험한 미래의 세대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셔서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자녀 세대의 포로된 초라함을 성전 재건을 통해 직접 드러내시는 영광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앞서 표현대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흩어졌진 이유가 9절에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한 번 시기상조라고 앉아 있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이끄시게 하고 14절에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켜’ 성전 재건에 참여하게 하셨다고 1장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실 이 말씀 중 일부를 총회 전 주일 말씀으로 전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25년을 시작하면서 소선지서를 미가 - 요나 - 나훔 그리고 오바댜 하박국, 아모스 스바냐, 요엘 학개의 순서로 강해를 진행 중 주일 본문이었습니다. 저는 대체적으로 금요일즘에 설교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10월 27일 총회 직전 토요일 일찍부터 3차례나 간격을 두고 서목사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는데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거의 없는 저인데 아무튼 그후에 저도 전화를 드렸지만 목사님과 통화가 되지 못했고, 생각에 월요일 총회 때 뵈면 전화하신 이유를 여쭈면 되겠다 하고 그렇게 주일에 학개 2번째 말씀을 전하고 나서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구나 이런 하나님을 다른 분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지나 갔습니다. 월요일에 총회에 참석을 했는데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시면서 바쁘셨습니다. 그런데 투표에 앞서 후보를 고사를 하시면서 안천 교회가 내년에는 교육관 건축 비전을 갖고 있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분이 하셨으면 좋겠다 하셨는데 결국은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상황이 그래서 여쭈어보지 못하고 헤어졌다가 이런 목적에 부흥사경회가 있으니 와서 말씀을 전해라 한 것이죠.
그때/ 아! 이런 하나님을 전해야겠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론 교육관을 건축과 성전 재건과 맞물려 부담이 되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마침 22년/23년 송구영신 예배 때 학개 2장을 갖고 말씀을 하셨으니 잘 되었다. 요걸 핑계로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들으신 분은 돌아가서셔 그때 말씀을 찾아 들으시면 학개를 모두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러분 그런데 정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멋진 분 아니십니까? 우리 예수님도 자신을 낮추다 못해 제자들에게 무릎까지 꿇어 발을 씻기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총회장이 되시고서는 수락 말씀을 하실 때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 선 저도 여러분의 자리에 있었던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이 여기까지 올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라는 저의 산은 나무도 없는 산 같지만 말씀을 따라 남겨진 나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누구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 개척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말은 쉽게 합니다. 말씀대로 하는 교회에 가고 싶다. 그러나 개척교회는 안 가고 싶다. 이런 저런 교회의 흠을 잡고 다시 시작할 곳을 찾습니다. 하지만 개척교회는 안 간다 하는 것이죠. 개척 교회 목사가 되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며 자신의 집을 꾸민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실망하는데 오늘 본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맞추어 주시는 즐거움과 영광으로 바꿔 주시는 본문 설교에 너무나 가슴이 벅찼습니다. //
여러분 어쩌면 저는 여러분의 선배즘 일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불과 얼마전까지 장로가 60명이고 아내와 저도 교회 봉사로 같이 앉아 예배한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같이 예배드리는게 꿈이었는데 이젠 서로 마주보고 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그런 열심으로 미래에 장로를 꿈꿨던 안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놓친게 있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이 아니라 ‘마치, 저기 좋은 나무 있는데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제 영광이랄 것도 없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는 걸 알면서도 매일같이 산을 향하여 나무를 베러 오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특별히 중직자 여러분 그동안도 여러분들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셨고 이제 지금의 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주는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셔야 하는 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낮은 자리에서 비전을 담는 그릇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 / 지금의 세대가 아버지의 세대가 보았던 기쁨과 즐거움을 받아서 이곳이 언제나 기쁨의 잔치가 되는 교회가 되도록 각자의 산에 오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함께 말씀 한구절을 읽고 두 가지 기도제목을 나누겠습니다.
(26) 출애굽기 24:9–11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부흥 사경회가 안천 교회에 말씀의 잔치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안천교회가 받은 비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자녀들의 세대를 위한 교육관 건립의 순적한 일정을 위해 이를 시작으로 일어날 천명 예배자 사역과 분립 개척을 위한 원년이 되길 위해서 / 그런 가운데 각자에게 요구 하시는 ‘산이’ 있습니다. 그런 다짐을 위해서.
우리 교단이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실한 교단이 될 수 있도록 총회와 가르치는 신학교를 위해서 그리고 미래 세대의 자립할 개척 교회들이 더 많아지도록
하늘의 문을 여소서
여호와의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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