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30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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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새벽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하루동안 저희에게 많은 것을 베푸시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복은 바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직접적으로 알아가길 소망하니 이 자리 가운데서도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로 저희를 특별히 조명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7:11-19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7:11–19 NKRV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제 겨울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날씨인데요. 벌써 이번 주 평일이 지나면 11월이 됩니다. 이제 2025년도 벌써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은 2025년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과 기도로 알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먼저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혹시 여러분은 받아 마땅한 것과 선물의 차이를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 밥 줘!”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녀를 먹이고 입혀야 하는 의무를 가진 부모의 의무이며, 자녀는 그것을 “받아 마땅한 권리”로 여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만 18세 이상이 된 남자는 반드시 군대에 가야 합니다. 이것은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친구와 놀다가 늦었는데도, 부모가 화를 내지 않고 따뜻하게 밥상을 차려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자녀가 “감사해요. 엄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감사는 단순한 ‘받아 마땅함’을 넘어선 엄마의 은혜에 대한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수많은 은혜와 자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맑은 공기, 따뜻한 햇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우리의 건강까지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지금도 여전히 주고 계시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선물을 마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처럼 여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으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병환자 열 명이 깨끗함을 받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본문에 적합한 제목은 “나병에서 깨끗해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때야 하는지 함께 깨닫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셨습니다. 나병이라는 것은 여러분 아시겠지만, 이 당시에는 아주 끔찍한 질병이었습니다. 심지어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나병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안 좋았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을 우리가 보게 되면 율법에서 나병환자를 격리시킬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들은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와 같이 외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예수님의 명성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 나병환자들이 틀림없이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표현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에게 동정심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외쳤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들도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외치며 예수님께 자신들의 끔찍한 질병인 이 나병을 곧바로 고쳐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병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나병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을까요? 이러한 여부에 대한 의심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예수님은 14절에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율법에 따른 규정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율법을 보면, 나병에서 깨끗해진 사람은 자신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나병환자가 완치 되었다는 것을 살피고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이 사람이 공동체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나병환자도 그 병으로부터 나아지기 전까지 제사장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히 다 나은 것을 본인 스스로 확인해야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으러 갈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이 완전히 깨끗해지기 전에 제사장들에게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에는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능 동안 예수님꼐서 반드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암시가 녹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몸을 돌이켜 떠나갔고,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병에서 완전하게 깨끗해졌습니다. 5장에서도 예수님은 어떤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몸에 손을 대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셨다면, 지금은 마치 원격 치료처럼 손을 대지 않으시고 오로지 어떤 한 행동을 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나병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멀리서 말씀만으로 고치신 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바로 이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병을 고치셨다는 것, 그리고 말씀만으로 고치신다는 이러한 기적 사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특별히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요소입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나병에서 완전히 깨끗해지자, 이들은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유대 사회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하였기 때문에 가정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돌아간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 열 명 모두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로 인해 육체적인 자유를 경험하였습니다.따라서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감사하고 그를 계속해서 믿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권능을 행하신 분은 메시아이시며, 이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14절에서 “깨끗함을 받았다.”, 그리고 15절에서 “나은 것”이 두 동사는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것은 신적 수동태로 깨끗하게 하고, 낫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하신 것임을 나타내는 헬라어 문법적 방식입니다. 이러한 헬라어 문법이 말하고 있듯이 이들이 깨끗해지고 나은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에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열 명 중에 오직 한 명만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자신이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16절은 아주 극적인 문학적 기법을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먼저 열 명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합니다. 이 사람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기만 해야 했지만, 반면에 이제 나병에서 깨끗해지고 나서 그는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누가복음을 읽는 당시 독자들은 오늘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추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이러한 사람들의 추측을 웃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추측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로부터 민족들 사이에서 외톨이라고 불리며, 유대인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혼혈 민족에 속해 있으며 또한 언약의 약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바로 고침을 받은 열 사람 중에 예수님께 감사 표현 했던 단 한 사람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아마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기록한 누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장치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을 16절 마지막에서 소개합니다. 독자들의 고나심을 끌게 하려는 의도에서, 누가는 이와 같이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읽는 독자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자비에 유대인들이 반응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기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호의와 자비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유대인은 제사장들에게 갔거나,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 나병이 나았기 때문에 다시 자신이 속한 가족과 공동체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감사하며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반응은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얻은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땅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의 반응을 보시고 질문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는 감사하지 않는 아홉 명을 지적하시고, 그들의 잘못된 자세를 날카롭게 꾸짖으시는 책망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이 돌아와 감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면서, 다른 아홉 명과 대조시키고 계십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에게 구체적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사마리아인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들보다 영적으로 더 뛰어난 분별력, 즉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평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은 혈통이나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기초하여 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19절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이 나병에서 치유된 것 이상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병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한 열 명 모두는 육체적인 치유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자비로운 예수님의 행위에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온전한 믿음을 지녔음을 예수님은 칭찬하시면서 암시해 주셨습니다.
오직 이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의 자비로운 행위로부터 온전한 유익,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 구원을 얻었고,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예쑤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믿음과 궁극적인 구원의 연관성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주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한 명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수많은 나병 치유를 경험합니다. 병이 낫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공통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사는 자비를 받은 사람의 반응입니다. 출신과 민족, 그리고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누가 했는가에 초점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아홉 명처럼 우리가 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어버린 다면, 우리는 치유는 받았을지라도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복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오직 믿음으로 이것을 주신 분께 감사와 찬송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자만이 그분이 주시는 더 큰 선물, 곧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던 이방인 사마리아인이 믿음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말씀을 기록한 누가는 독자들도 그 사마리아인이 지녔던 것과 같은 이러한 모범적인 믿음을 가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재, 당연하다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받는 작은 호의와 복까지도 찬송의 재료로 삼아,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 큰소리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우리가 반응해야 합니다. 받은 은혜에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감사하며,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를 향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칭찬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혈통과 민족을 넘어,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가 어떤 반응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모든 인류가 받고 있으나 특별히 저희에게 믿음을 주셔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권능임 알게 하시니 날마다 저희가 하나님의 호의와 자비를 받을 때에 영광과 찬송으로 응답하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도록 하시고,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결코 쉬지 않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찬송과 경배로 가득한 하루가 되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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