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3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Notes
Transcript
왕궁에서 있었던 일, 게으름의 발전, 정욕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왕궁에서 있었던 일
왕궁에서 있었던 일
역사 속에서 가장 신비해로운 인물들 중 한 부류는 아마 제국의 황제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외부와 차단된 커다란 궁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중국인 저널리스트가 쓴 중국 황제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중국 역사에는 약 600여 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정치하는 일 말고 일상생활에서 몰두했던 일은 딱 두 가지, 바로 식탐과 색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루 2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대에 그들은 하루에 4끼를 먹었습니다. 황제의 한 끼 식사를 위해 동원되는 식자재는 작은 트럭 1.5대의 분량이었고, 조리사만도 수백 명이 필요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보다 더 신선하고 진귀한 먹거리를 찾기 위한 조직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식탁이 얼마나 화려했을지는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간 황제의 인생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황제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황실은 피바다를 이루어야 했고, 정변을 겪지 않은 황제라 하더라도 천수를 누린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의 과도한 식탐과 방탕한 색탐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제를 비롯한 몇몇 중국 황제들은 만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렸고, 가장 적은 수의 여자를 거느렸던 예가 4 500명의 후궁을 둔 경우라고 하니 그들의 방탕한 삶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서기 위하여 전쟁이 치열할 때에는 건강하고 성실하던 제왕들이 나라가 태평할 때의 예의 총명을 잃고 부패한 정욕에 빠지게 되는 것은 대부분 게으른 삶이 발전된 결과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가늠하고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영혼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경우도 육체의 게으름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의 정욕으로 몰고 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하루를 살기 위한 영혼의 채비
하루를 살기 위한 영혼의 채비
성경의 진리는 마치 보석과 같아서 어둠 속에서 볼 때에는 한낮 유리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햇빛에 비춰 보면 찬란한 빛을 바랍니다. 영적으로 무지할 때는 진리를 보아도 그저 몸이 건조한 말씀에 지나지 않지만, 지식의 빛이 비치게 되면 우리는 그저 굴러다니는 구슬처럼 보잘것없이 생각했던 말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과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됩니다. 게으름에 관한 자언의 많은 교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는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오색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과 같이 느껴집니다.
첫 장을 통해 우리는 현실적인 눈으로는 전혀 게을러 보이지 않는 분주한 삶이 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일에만 허덕이고 있을 뿐인 게으른 사람일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영적 게으름은 영혼의 심각한 질병들을 가져와 급기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만신창이의 상태로 만들곤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표면적인 삶이 게으를 때는 그 게으른 삶의 모습 때문에, 표면적인 삶이 분주할 때는 그 분주한 삶으로 인해 게으를 수 있는 영적 생활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을 단장하는 데 시간을 씁니다. 하루의 생활을 위해 자신을 단장하는 데 할애하는 시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단정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서 일어난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외모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남성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서 기본적으로 자기를 꾸미는데 여성들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아침에 씻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정도라고 봅니다. 이것은 1년이면 365시간이고 하루 8시간 근무에 적용한다면 45일 이상 해야 하는 작업량입니다. 그러나 어떤 여성도 이것을 과도한 노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그 하루 동안 만날 사람들에게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를 단정하는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당연한 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단장하게 맞이하고 하루를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단장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 문제 역시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당히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적은 시간으로 많은 충전을 받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뛰어난 대신 욕구도 많기에 만족할 만큼 스스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어리고 부족한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짐승과 방불한 삶.
짐승과 방불한 삶.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영혼의 재충전을 위해서 헌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단장하고 하루 살 채비를 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일의 노예가 되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허덕거리며 인생의 보람이나 목표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든지, 자기의 영혼을 돌본다든지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시간 되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일터로 달려가고, 다시 시간 되면 돌아와서 세수하고 밥 먹고 잠옷, 바람으로 누워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잠들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거의 동물 수준의 삶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아주 커다란 죄악입니다. 이것은 받은 구원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것과 방불한 삶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러분에게 이런 변명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영혼을 돌아보며 사는 일이 싫어서 그렇게 안 사는 게 아니다. 너무 바쁘고 힘이 들어 그렇게 못 살고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의 영혼에 어떤 도전을 주고,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루를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충전시켜주는 은혜 생활을 위해서 헌신할 만한 육체와 마음의 여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첫째로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의지가 없다는 불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명이 그럴싸하게 들린다면 정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재충전을 받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줄 여력이 없는 것은 자신이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지금까지의 생을 곰곰이 반추하다 보면 우리는 뜻밖의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 생활 열심히 하며 끊임없는 영적 도전 속에서 자기가 깨뜨려지던 때는 결코 할 일 없이 한가하던 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던 때는 비교적 할 일이 없고 한가하던 때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들로 인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던 분주한 때였습니다. 한가해서 충분한 시간을 기도하는 데 쓸 수 있었을 때보다 오히려 바쁜 상황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기도 시간을 마련하고자 안달하다가 겨우 소중한 시간을 내어 단 30분이라도 기도했을 때 마음은 쏟아부어졌고, 그래서 더 놀라운 영적 부유함을 누리지 않으셨습니까?
은혜의 한탕주의
은혜의 한탕주의
신자가 은혜를 끊임없이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자기 희생과 성실한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로또 복권이 출시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온 나라가 로또 열풍으로 들썩였습니다. 로또의 1등으로 당첨될 확률은 800만 분의 1로 1년 동안에 벼락을 두 번 맞거나 교통사고를 다섯 번 당하는 확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어나기 힘든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이란 환상을 갖습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꿈을 꿉니다. 이것이 허황된 꿈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사는 것에 지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꾸준히 노력하여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을 피곤해 합니다. 한 방에 모든 것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죄를 죽이며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일은 매일매일 거듭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루하루 애쓰며 사는 것은 싫어하고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은혜가 부어져 한 방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로또 복권 당첨 같은 영혼의 변화를 마음에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방에 모든 것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마음 이면에는 게으름이 있습니다. 매일 꾸준히 식사 조절하고 운동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단번에 저절로 살이 빠지는 기계를 꿈꾸는 마음 이면에는 체중 조절을 위해 노력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희생과 고통 없이 단번에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악한 게으름을 지녔다는 참입니다.
가끔 신문 광고에서 생애 절망에 빠진 사람, 사업에 망한 사람, 병 걸린 사람들의 일생을 바꾸어 드린다는 신앙 집회 문구를 보게 됩니다. 그런 집회는 참석자의 상당수가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모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알고 보면 표만 그렇게 선동적으로 내걸었을 뿐 건전한 집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사 헌금 봉투 하나 들고 주여 믿사오니 하며 나아가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미친 듯이 기도에 매달리면 어느 한순간에 불을 받아서 자신의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고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뿌리에는 영적 게으름이 있습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위한 자기 헌신이 싫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자 분투하는 삶이 싫은 게 게으름이 이런 한탕주의적인 은혜를 꿈꾸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발전 1단계
게으름의 발전 1단계
최선을 다하지 않음 그러면 도대체 게으름이란 무엇일까요? 게으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게으름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앞장에서 이미 게으름의 기초는 자기 사랑임을 밝혔지만, 이것은 게으름의 시작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시작 단계의 게으름은 그것을 나타낼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게으름이 게으름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의무가 필요합니다. 의무가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의 게으름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야 할 일이 없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는 그를 게으르다고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무가 확인되어 게이 게으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작 단계에서 나타나는 그 게으름은 사악하다고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으름의 처음 출발은 자기 사랑이 몸과 마음에 배어서 어떤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는 것을 심각한 악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작 단계의 게으름은 늘 이러한 형태로 출발합니다. 아예 의무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귀찮은 부분을 소홀히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영원히 사는 길이며, 그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갚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를 꺼립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싫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왜 하나님을 왜 의무를 행하지 않으십니까?
대답: 내가 싫으니까
질문: 왜 최선을 다하지 않으십니까?
대답: 내가 힘드니까.
그리고 이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온 우주와 사고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일 수 없습니다.
게으름의 발전 2단계 의무를 저버림
게으름의 발전 2단계 의무를 저버림
그런데 게으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바로 의무를 완전히 져버리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계속 발전하는 것은 게으름의 원인인 자기 사랑이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자기 사랑의 뿌리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죄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주인 노릇하고 싶어 하는 성품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으름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게으름의 뿌리가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핀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알고 스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지 속에서 이 게으름과 동침하며 침륜에 빠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칼을 든 자객을 왕에게 보내는 것만이 왕을 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왕의 음식에 조금씩 독을 넣어 서서히 죽이는 것도 왕을 죽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후자의 사례 역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큰 칼을 들고 덤벼드는 적이 살인, 가음, 거짓말, 배교 같은 것이라면 서서히 우리를 고사시키는 독은 바로 게으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게으름에 대해 잠시도 주의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게으름의 출발 단계가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다음 단계는 아예 그 의무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으면 형식도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형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가 만연되어 있는 이상, 형식의 심각한 변형이 초래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게으름은 이렇게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게 만든 다음 급기야 그 의무까지 저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힘들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이내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택하고 맙니다. 그게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게으름의 발전 3단계 정욕
게으름의 발전 3단계 정욕
게으름은 영육 간에 편안한 삶을 이룬 것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삶은 게으름의 소극적인 목표일 뿐입니다. 이 소극적인 목표가 반족되고 나면 나타나는 적극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쾌락입니다. 이처럼 게으름의 끝에는 끝 길이 없습니다. 파멸의 벼랑 밖에는...
신자로서 해야 할 선하고 마땅한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급기야 그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편안함은 획득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연합이 주는 신령한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이때 육체는 게으름으로 얻을 수 있는 편안함보다 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의 대부분은 죄를 짓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욕구는 매우 다양한데, 그 욕구들보다 더 다양한 것이 그 욕구를 대하는 인간의 방식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락한 욕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타락한 육신의 욕구가 숙명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은혜의 질서들이 심겨지면 탈락한 본성의 욕구보다 더 강력한 신령한 영혼의 욕구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 본능적인 욕구들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청교도 존 오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행동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욕구를 살펴라. 그 사람의 욕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불행히도 게으름은 신자의 내면에 형성된 이 은혜의 질서들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의무를 저버린 정도로는 만족치 않고 욕구를 쫓아 죄를 지으며 살도록 만듭니다. 게으름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자를 정욕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게으름은 보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발전된 게으름은 종력들을 계속 솟아나게 하여 신자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므로 편안함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악을 행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자 하도록 만듭니다.
전에는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만 하지 않으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죄를 지어서라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후자의 욕구는 전자의 욕구보다 훨씬 강합니다. 죄를 지은 대가를 치르며 느끼는 괴로움보다는 불타오르는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접근하지 못할 때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더 힘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굶은 사자 앞에 시뻘건 살코기를 두고 쇠창살로 막아놓았다면 그 사자가 어떻겠습니까? 미친 듯이 침을 흘리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 사자에게는 사냥감을 얻기 위해서 며칠간 뛰어다니는 것보다 눈앞에 먹이를 두고서도 자기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입니다.
게으름의 발전을 조장하는 비교 의식.
게으름의 발전을 조장하는 비교 의식.
그런데 이 게으름의 단계적 발전의 과정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 비교 의식입니다. 게으름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그거 꼭 해야 되냐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걱정 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안 살아 너는 신앙에 있어 이제 겨우 햇병아리일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하며 살지 않아도 돼 등의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게으름이 이런 지성의 동의를 받으면 게으름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보다는 신자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본분을 망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본분에 대한 인식 없이는 결코 성직에 대한 인식도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끔 성도들에게서 신앙의 수준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를 볼 때가 있는데, 이것은 가톨릭 문화의 유산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계급과 배우는 계급이 있는데, 이 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교회는 열심히 가르치고, 듣는 교인은 열심히 들으면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를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신분이며 앞머리에 붙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되고자 애써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이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의 기준으로 신앙의 수준을 분류하여 자신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리다는 이유로 의무를 저버리는 일에 면죄부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좋게 평가하려 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납니다. 이런 태도들은 옳지 않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절대적인 관계만 생각하게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교만해지거나 안일해지지 않습니다. 그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판단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을 시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인 만족을 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의 대상이지 시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신자의 비교 의식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이 충만할 때는 다른 사람의 태도는 상관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성경이 나에게 어떤 신자가 되라고 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이 나침반이 되어서 나의 양심과 신앙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싹을 자르라.
게으름에 싹을 자르라.
신자가 게으름 때문에 정욕에 완전히 사로잡힌 존재로 전락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은혜의 통치 아래에 사는 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서 죄의 종이 되어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방벌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게으름이 우리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종착지는 바로 여기이며, 이것을 향해 게으름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비참한 삶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미연의 게으름을 퇴치하여야 합니다. 애초부터 게으름이 우리에게 파고들지 못하도록 하루하루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써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이야말로 게으름이 정력으로까지 발전하여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처치법입니다.
물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미래가 있나?’ 등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고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달프지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찾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일에 충성하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해서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적인 의무에 대한 부지런히 삶을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단지 회의일 뿐이지만, 내버려 두면 그것은 그 의무를 저버리게 만들 것이며, 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면 온갖 더러운 종족들이 벌떼처럼 엄습해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과 타협하는 것은 제비가 독사의 알을 자기 둥지에서 품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부터, 다음 주일부터 내년부터라고 자꾸 미루지 마십시오. 상황이 좋아지면 좀 더 준비가 되면 할 것이라고 핑계 대는 것은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상투적인 수법에 넘어가 스스로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심오한 진리를 터득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살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에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반응해도, 주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자기를 쏟아붓는 부지런한 삶의 실천이 없이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삶이 없이는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실천이 없으므로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나 당당함도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당하지만, 게으름 피우기 일쑤인 사람은 다른 사람 눈치 보기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자기 몫을 성실히 감당하며 희생하고 헌신하여 누구 앞에서나 우리가 당신의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여러분에게서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본
예수님의 모본
땀 흘리는 부지런함, 게으름의 욕구를 꺾는 삶, 의무를 실천하고자 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을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에 눈물과 진흙이 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지도록 자기를 다 소진하며 기도하시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하게 살 동안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게으름은 우리를 안일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이끌고 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못하게 함으로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게으름은 우리의 삶에서 싹부터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 게으름과 야합하려는 자기 자신을 엄중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타협하고 싶어지면 우리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짧은 생애의 발자취 속에서 게으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의무에 태만하시거나 그물을 완전히 져버리시거나 정욕에 사로잡히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고,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내어쫓고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 대신 그 권능을 의지하여 우리를 섬긴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매 순간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신 분이 분이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모든 연약함을 다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분에게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누워 쉬는 것이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핍박과 모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대와 칭송을 받으며 안전한 환경에 거하는 것이 더 쉽고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 한 당신에게는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전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기도하시며 최선을 다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몸 바치시고 피 흘리시기까지...
눈을 들어서 이 세상을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려져 있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진리에 순종하며 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배교적인 신앙이 만연해 있는 이때에 진리의 빛을 받은 자답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쉽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항상 믿음의 길을 죽을 각오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사 충성을 말했고, 일사각오의 신앙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도우심.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도우심.
어느 날 한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정말 고달프게 실상생활을 하는 형제였습니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저는 그에게 기도 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정말 암담한 표정으로 목사님 여기에서 제가 새벽에까지 일찍 일어나면 저는 쓰러지고 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그가 새벽 기도하지 않기로 뜻을 세운 것 같아서 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형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난번 저와 이야기를 나눈 후 제발 기도 좀 하라는 제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돌아 결국 새벽 기도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힘들 것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 힘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분이 새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산술적인 계산을 깨뜨리며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기에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일에 뛰어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게으름을 버리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그러한 삶을 결단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부지런한 삶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고통과 인내가 아무리 쓴 것처럼 보여도 게으르게 살다가 정욕에 삼킨 바 된 상태가 되어서 지불해야 할 영혼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지런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정체와 계획을 알게 된 지금부터 그 게으름을 이기기 쉬운 때는 없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게으름과의 싸움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의 끝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정욕으로 말미암는 파멸이라는 벼랑 밖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