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먼저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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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본문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으로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 사이에 있는 교훈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과 자격에 관한 교훈인 동시에 예수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나라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기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세상을 자기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산상수훈의 첫 머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인격적 특성을 팔복으로 설명하시고 이어서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의 중심 교훈으로 미움과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용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불완전한 교회가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II. 제사보다 먼저 할 일
II. 제사보다 먼저 할 일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미움과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다.
이는 그분이 이 세상에서 세우고자 하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무엇에 의해 위협받을지를 잘 알고 계셨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이나 사탄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었다.
A.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봄.
A.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봄.
첫째로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예배자의 기본 자세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에는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가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율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흠 없는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직전에 자신이 형제에게 원망을 드릴 만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람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제사 드리기를 잠시 중단하고 그 형제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삶과 분리된 형식적 제사 비판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누룩처럼 퍼지고 있었던 잘못된 풍조 곧 삶과 분리된 채 드려지는 제사의 습관에 경종을 울리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는 하나님과 관련된 행위이고, 형제에 대한 미움이나 불화는 사람과 관련된 행위라는 이분법적 논리의 오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헌제자 자신의 삶과 제물의 일치였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드리는 자의 생활이 그가 드리는 제물의 흠 없음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에 부합하게 살아온 삶이 정성껏 드리는 제사와 일치할 때 그것은 최고의 제사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처럼 헌제자의 삶과 제사 행위는 서로 나뉠 수 없이 엮여져 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러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아야 한다.
삶과 예배 행위의 일치_구약의 예
그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때로는 삶과 단절된 제사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활에 대한 반성 없이 오직 어떤 예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였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미 6:6-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민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시며,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 예배 곧 삶의 제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러한 진리는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맑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극성처럼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삶과 예배 행위의 일치_신약의 예
그 요지는 이것이다. 예배자의 삶과 예배 행위는 온전히 일치해야 한다.
예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예배이고, 또 하나는 좁은 의미의 예배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모든 삶으로서 예배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 (롬 12:1).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육체를 이용해서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그리고 후자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드리는 예배다.
이것은 교회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와 기도와 찬양, 성경, 묵상 등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예배를 가리킨다.
삶으로써의 영적 예배와 형식을 갖춰 드리는 예배의 행위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순환 관계가 있다.
그래서 신령하게 사는 것만큼 예배할 수 있고, 또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만큼 잘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고, 예배를 능가하는 삶도 없으니, 삶은 예배에 의해 한계를 갖추고, 예배도 삶에 대하여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해 생활하는 수준만큼 훌륭하게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인 계명의 확장된 적용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일이 있는 것을 거론하시기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살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옛 사람이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21)
여기서 옛 사람이 말한 바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옛 언약, 곧 율법 좀 더 좁혀서 말하면 하나님의 십계명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새로운 언약의 체결자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그 계명 속에 숨겨진 보다 깊은 뜻을 설명하심으로써 우리를 일깨워 주신다.
그것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말로 욕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옛 언약에서 그냥 막연히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형벌보다 더욱 영원하고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가족이나 이웃,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중 누구를 미워하고 있다면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성경은 그 대상을 아주 넓게 지적한다.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이는 누구의 잘못인지와의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서 원망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이라는 뜻이다.
B. 먼저 형제와 화해함.
B. 먼저 형제와 화해함.
둘째로 먼저 불화한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꿈꾸시던 사랑의 기독교 공동체
하나님을 예배하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그런 사람들은 예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타인, 특히 형제들과 맺힌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세우고자 하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넓은 의미의 예배를 “영적 예배”라고 부름으로써 좁은 의미의 예배 못지않게 삶 자체가 신령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배에 관한 예수의 고전적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는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도 견지되어야 할 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과 진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만큼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고, 또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만큼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꿈꾸시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 삶은 예배를 위한 준비요 예배는 삶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즉, 다른 형제들과 맺힌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부득이하게 불화하게 되었다면 서로 화해함으로써 좁은 의미에서나 넓은 의미에서나 예배가 방해받지 말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에 그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은 그 구성원들인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끊임없이 사랑을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공동체였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의 실천, 그리고 이로써 이루어지는 사랑과 일치의 실현이 일상이 되어야 했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이게 무슨 잠깐만 그래서 잠깐 끊고 얘기를 하는 거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잖아.
근데 산상 수훈의 요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생활이에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거든요.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격과 삶이에요.
그러면 잘 들어봐요. 이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미리 머릿속으로 당신이 세우고자 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여야 되겠다라고 하는 큰 그림이 있는 가운데 그 그림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거잖아.
이게 바로 인류가 두고두고 지켜야 할 황금률인 동시에 예수께서 꿈꾸셨던 당신이 당신의 사역을 통해 만들고자 하셨던 공동체가 바로 이런 공동체이기를 원하셨던 거라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생활에 대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이 전부 다 이 산상수훈 안에서 나오는 가르침으로 가르치시는 거야.
그래서 너희가 높아지고자 하는 자마다 낮아지리라 낮아지고자 하는 자 말 높아지리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 산상수훈에 나오는 삶을 기초로 나머지 가르침들이 이렇게 퍼져 나오는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기준이 되는 거라.
이에 대해 동방교회의 위대한 설교자이며 신학 요한 그리소스토무는 자신의 책 에베소서 설교집 11번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사랑이 없으면 평화도 없고, 먼저 용서가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어떻게 죄를 먼저 용서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서로를 아끼지 않고 각자 자신만을 돌아볼 때 어떻게 교회 안에 화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평화, 사랑, 용서, 교회 일치와 화합은 각각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골디락스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그건 골드 룰이라고 그래 골디락스는 뭐냐 하면 골디락스와 세 마리의 곰이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어.
거기에서 이제 이 골드락스가 최고로 최적의 편안한 잠자리에서, 최적의 따뜻한 스푸를, 최적의 맛있는 음식과 함께 먹는 거야.
골디락스 그러면 경제학 같은 데서는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어서 딱 알맞은 상태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거지.
그래서 여기서 이제 그가 골디락스라고 그런 것은 뭐냐 하면 이 평화, 사랑, 용서, 교회 일치, 화합 이런 것들이 서로 떨어진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거야.
그래서 다 골고루 갖춰 있을 때에 평화와 사랑과 용서가 있을 때 교회는 일치를 이루게 되고, 또 교회 일치와 화합이 있을 때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되는 상태를 골디락스라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은 좀 이렇게 상식을 좀 넓혀봐. 좀 상식을 그래서 바빠도 좀 쉬는 중에 신문도 좀 보고, 잡지도 좀 읽고, 그렇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좀 알고 그래 그다음
이 아름다운 덕목들은 예수께서 지상에 세우시고자 하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자의 삶이란 이러한 덕목들을 끊임없이 실천하여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다른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노력할 때 그 직전까지 살아온 모든 삶은 그 어떤 선물보다 더 귀하고 받음직한 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각각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사람들, 특히 형제들과 맺힌 것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1. 형제와의 화목
1. 형제와의 화목
첫째로는 형제와의 화목이다.
미움이라는 성향의 영향력
사랑과 마찬가지로 미움은 사람의 성향이다.
처음에는 미워하기를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미움의 감정은 미워하는 성향이 되어 스스로 거스를 수 없게끔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의 마음을 방치하면 그것은 미움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대신 미워하는 마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초대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자기의 책 기도에 관하여 제10장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다툼이나 분노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오지 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평화로운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이 계명의 힘과 이치는 이러하다. 곧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전에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하며, 형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그리해야 한다.”
이처럼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기에 사라지지 않는 미움은 예배뿐만 아니라 기도까지 막히게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날아오르고 싶은 새의 날개에 쇠덩어리를 매달아 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아가서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먼저 그를 용서하고 화목한 후에 예배나 기도 중에 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2. 미워하는 마음과 상처
2. 미워하는 마음과 상처
둘째로는 미워하는 마음과 상처의 관계다.
용서되지 않는 이유
사람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를 가로막히게 하고, 영혼의 생명을 메마르게 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게 한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에 간직한 상처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서 이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면, 마음으로 가해자를 미워하는 것은 상처받은 자에게 유일한 위로다.
그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그의 불행을 기대하며 복수심에 마음을 불태우는 것은 상처받은 자에게 복수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다.
상처의 꿈, 복수
그리고 그 상처는 복수를 꿈꾸게 한다. 그러나 미움에서 비롯되어 꿈꾸는 복수는 하나님이 하실 일 곧 사람에 대한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그것보다 더욱 정의롭다고 믿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셨지, 우리를 사사로운 미움 때문에 보복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2장 19절.
그러나 그러한 악한 생각과 의도 속에서 자신의 영혼은 끊임없이 생명력을 잃어가며 마음은 거칠고 황폐해져 간다.
살인의 또 다른 이름
미움은 마약과 같다. 한 번 마음에 착상된 미움은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끊임없이 자라게 되어 결국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비 존재에 대한 갈망”, 곧 살인을 지향하는 감정으로 보셨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맺힌 것이 없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거기서 비롯된 불화는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자유롭고 풍성한 영적 교통을 가로막는다.
가족간에 적용
이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풍성하고 은혜로울 수 있다.
이것이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은 사랑과 긍휼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부부에게 말한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그러므로 이웃과 가족, 친구나 믿음의 형제들 중에 우리가 원망하고 미워하거나 또한 우리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으면 각자는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앞서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써 화목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예배하고자 하는 자들을 향한 양보할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다.
미움보다 용서하는 자에게 예비된 더 큰 은혜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는 늘 그것보다 크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요일 4:20).
한 사람이 구원받은 신자가 되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함께 형제된 성도를 사랑하고 나아가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서 높은 영성의 탁월한 증거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여 이를 통하여 그 사람의 구원받은 증거로 삼을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더욱이 형제를 용서하는 대신 복수를 꿈꾼다면 그는 나쁜 일을 스스로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못 박으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요일 3:10).
이에 대해 심지어 우리만큼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철학자 플라톤 조차 자신의 책 『크리톤』 49 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결코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어떤 악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3.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믿음과 사랑의 관계
셋째로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다.
참된 믿음과 사랑
우리는 믿음을 소중히 여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사랑도, 소망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기 짝이 없는 성경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구원에 이르렀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화하는 것쯤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마치 태평양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런 죄쯤은 그 푸르른 대양에 떨어진 한 방울의 붉은 잉크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가진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 형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가 창조하신 자연, 만물에 대한 관대한 배려를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역사신학적 관점
믿음과 사랑 사이에 이런 미묘한 관계에 대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서신과 함께 보낸 자신의 소책자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27번째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했다.
“사랑은 사람을 선하거나 의롭게 만들지 못하고, 오직 믿음이 그렇게 합니다. 믿음이 그를 선하고 의롭게 만들며, 그럴 때에 그는 사랑하고 선한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항상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부터 선함과 선한 행위들을 생산해 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믿음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타인과 애정하는 관계를 맺거나 이미 있는 관계, 애정을 심화하려는 영혼의 경향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미움과 원한을 풀지 않는 것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살인자의 악을 덮는 용서하는 사랑의 예화
2006년 10월 어느 날, 미국 펜실베니아 주 랭커스터 카운티의 한 아미시 크리스천 학교에서 찰스 로버츠라는 남성이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했다.
그리하여 어린 소녀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몇 시간 안에 그 기독교 공동체의 피해자 가족들은 살인자를 용서하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가해자의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은 가해자의 집을 방문하여 자살한 살인자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로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돕기 위한 기금 모금에도 동참했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용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큰 감동을 주었다.
무엇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부모들 안에 있는 도덕심이 아니었다.
먼저 그들 안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마음이 잔잔한 호수였고, 자녀들의 죽음이 죽음의 사건의 돌멩이였다면, 그 돌이 마음에 떨어지는 그 순간, 은혜의 정동은 사랑의 물결이 되어 출렁거렸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살인자의 악을 덮고도 남으리만치 크게 파도쳤던 것이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용1_용서의 대상
당신의 마음에 맺힌 사람은 누구인가? 끊임없이 미움과 원망이 솟아나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는가? 이제 당신의 마음에 맺힌 미움과 원한을 풀라.
그것은 당신이 지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죽은 것처럼 되어버린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길이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그분의 죽음은 그분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고, 그분 자신의 허물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에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형벌을 생각하고 아파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용서를 비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라 하시더라...”(눅 23:34).
적용2_자기 사랑을 극복하고 용서하라.
그러므로 입으로만 예수 사랑을 말하지 말고 불화한 형제와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자기의 마음에 원한이 맺힌 것이 모두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 탓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극도로 자기 사랑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미워하는 그 사람도, 심지어 그가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가장 극악무도한 사람도 여전히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면서 그분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찬송한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가 내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지 않는데도, 아니 심지어 지금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는데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곧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으시는 은혜의 생명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서러움에 겨운 자기 사랑을 꺾고 형제와 이웃에 대하여 용서를 실천하려는 신자에게 주어집니다.
C. 용서를 실천하는 길.
C. 용서를 실천하는 길.
셋째로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가에 관해 말하다.
자, 이제 나는 여기서 용서의 실천을 위한 복음적이며 실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이 방법을 따른다면 일평생 미워하던 사람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용서 불가능함을 고백
먼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과 그 이유를 정확하게 하나님께 고백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의 힘과 결심으로만은 그 형제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당신은 그러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형제를 용서하고 화목을 회복하는 것임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당신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형제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미운 마음이 있어서 갈등하며 그러한 현실은 당신을 부자연스럽고 힘들게 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마음에 마음의 눈을 들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형제를 용서해 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받지 못했더라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뻔했던 위기에 놓였던 지난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2절 말씀.
용서를 위한 갈등들
이때 당신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과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당신의 뜻 사이에 끼어서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바로 그때가 당신이 십자가를 묵상할 때이다. 그분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시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시나이다” 라고 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기억하라.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은 처절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육체의 죽음을 앞두고 드리셨던 기도를 기억하라.
그렇게 해서 용서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면 아직 어디서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당신의 상처가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무 보상도 없이 당신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억울한 감정 때문에 씻기지 않은 깊은 상처는 당신의 생살을 베어내는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세상을 살면서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온갖 잡스러운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마음에 호소하는 바들 때문에 용서하기를 주저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즐겨 회자되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든가, 머리가 검은 짐승은 다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혹은 알프레드 아들러의 영향을 받은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와 같은 책의 내용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말한 것처럼 “원수에게 너무 친절한 자는 자신에게 나쁜 사람이다”라는 촌철살인의 한 구절이나,
20세기 독일 출신의 역사가이자 사상가였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조건』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죄는 용서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와 같은 철학적이고 고상한 어록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선한 행위는 대부분 안개 속을 지나는 것 같은 불분명함과 의심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실행에 옮겨지기 마련이다.
상처라는 피학적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내면의 분노와 질투, 증오와 앙심과 같은 가학적 감정으로 에너지를 축적해 가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가치 체계의 전도(뒤집힘)를 가져온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미움받을 용기 책은 우리나라에서 한 100만 부 가까이 팔렸는데 기회 있으면 한번 읽어보세요(현재 200만부 기념 본 출판됨).
여기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어서 읽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성경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거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되려는 콤플렉스가 한 사람을 그 내면의 세계를 파괴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그렇게 해서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라 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한번 읽어보세요. 아멘
니체는 이것을 “르상티망”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가 이 용어를 부여한 개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상처에서 비롯되어 가학적 감정으로 응축된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동의한다.
미움에 관한 이러한 심리학적 기재에 대한 니체는 자신의 책 『도덕적 계보』 첫 번째 논문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에게 솔직 하지도, 순진하지도, 정직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사팔뜨기이며, 그의 정신은 은신처와 은밀한 통로, 뒷문을 사랑하고 모두 숨겨진 것이 그의 일이다.”
쉽게 바뀌지 않는 마음
상처도 미움도 최초의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변화되지 않는 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잊혀지거나 기억 속에서 또 다른 감정으로 변화한다.
마치 우주인의 내장을 숙주 삼아 희생하고 자라고 있는 에얼리언처럼 말이다.
즉 그것은 피학적 상처를 받음에서 미움과 원망, 복수와 앙심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에너지를 축적해 가다가 언젠가 의지의 통제를 넘어서는 순간 폭발하듯이 분출되는 분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종종 극단적 가학적 선택으로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다소 천박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동북아 문명권에서는 상처받음을 통해 우리 안에서 "르상티망”이 “한의 정서”로 축적되기 쉽다.
용서의 원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타인을 용서할 수 없다(한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철학자 니체가 모르는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에너지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현재적 체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두 가지 본보기를 들어보겠다.
경험에 대한 성경신학적 관점(구약)
먼저 구약 시인의 노래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여기서 “맛보아 알찌어다”는 히브리어 원어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느끼거나 아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제시하는 경건의 핵심은 이것이다.
곧 경건의 핵심은 영원하고 무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선함 혹은 아름다움을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경험에 대한 성경신학적 관점(신약)
또 하나는 바울 서신에서 발견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여기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번역된 부분이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시에스트로 마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현재 완료형 시제로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재까지 화자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용서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는 르상티망의 가학적 감정을 억누르거나 노예 도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동적이고 반응적이거나 내성 중심적이 아니다.
오히려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주는 사랑의 힘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양심이나 도덕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현재적 사랑의 감화 때문이다.
그렇다. 당신은 지금 사랑의 애정이나 지혜에 기대어 그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용서하려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지 말도록 유대인들에게 핍박받은 때에 한 말, 곧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라.
그런 숱한 심리적 갈등의 과정을 겪고서도 용서해야겠다는 결단을 유지하게 되면, 상처받은 당신의 기억들이 주는 고통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용서의 고통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의 고통에 투사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이 용서와 긍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당신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신비한 영적 연합을 느끼게 된다.
당신의 형제를 용서하기 위한 고통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통으로 실제화되어 그대의 마음을 통째로 꿰뚫으며 흐르게 된다.
그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고통을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된다.
때로는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 너무나 강력하고 고통스러워서 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회개하다가 혼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격한 정동의 체험이 지나가고 나면 당신에게 상처 주었던 그 형제가 혹은 가족, 이웃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진다.
그때 당신의 눈에는 그들이 그냥 당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불쌍한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던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이 없이 십자가의 사랑이 없이 핍절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느끼게 된다.
그때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아가서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빌게 되는데, 이는 당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도 영적인 연합, 그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III. 적용과 결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용서하라는 말씀을 복음서에서 9번이나 하셨다.
이는 복음서에서 11번이나 반복된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 다음으로 압도적인 빈도 수를 자랑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함께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형제의 허물과 당신 자신이 그로 인해 받은 상처를 곱씹는 동안에는 용서할 수 없다.
미움의 깊이와 고난의 넓이만 커질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은혜의 원리를 거스르면서 살아갈 살아갈 결과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결국은 당신의 영혼도, 당신이 미워하는 형제의 영혼과 똑같이 빈들의 마른 풀과 같이 시들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 지독한 자기중심주의를 내려놓자.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하신 말씀에 담겨 있다.
그 형제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한 것이다.
미움은 노예의 발목에 채워진 착고와 같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끊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현재적 경험, 혹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현재적 체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https://youtu.be/zzAb0XkL1ck?si=aSOrT5zEdJqezeta
아멘 아멘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어 정말 악인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되는 겁니까?
근데 그 그 사람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는 거야 그냥 그가 지난 시간에 아마 베르나르도스의 사랑의 4단계 나오는 거고, 거기에서 이제 신사의 영혼이 하나님과 결합되기를 마치 뜨거운 쇳물 속에 들어간 쇠꼬챙이처럼 생물과 새꼬쟁이는 다르지만 똑같이 같은 불꽃으로 달아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한 마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미운 만큼 미워하는 것만큼 예배와 기도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게 없는데도 사람들이 이 미움을 별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제 더 큰 심각하지 그게 더 심각성 심각한 문제야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아주 조리 있게 성경적으로 밝혀내서 성도들에게 그것이 커다란 충격으로 쾅 하고 다가올 수 있게끔 설교를 해야 된다.
설교를 다 이제 되어진 거를 이제 읽었는데, 그래서 그래서 마지막에 설교를 다 읽은 다음에 드는 생각이 뭐예요?
윤 목사님부터 예
을 보면서 이제 나름대로 머릿속에 또 경험해 봤던 부분도 있고 그러면서 이제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느끼고 있는 거를 정확하게 이제 글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표현하면서 이렇게 상대방이 읽고 또 듣고 이해하고 또 반응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저희가 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런 어떤 방향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저도 이제 아까 우리 조 목사님도 얘기하셨지만 이거 시리즈 한 번 정도 설교하면 더 할 게 있겠나 이런 느낌이 드는데 이거 한편에는 이렇게 많은 내용과 또 선교와 이런 개념들이 담겨 있다는 거지 설교를 어떻게 이렇게 접근해야 되는가 이런 부분에서 좀 더 이렇게 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했는데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준비하는 또 다른 어떤 이렇게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읽으면서 지난번에 목사님께서 죄와 은혜의 지배가 그 책 읽고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 이렇게 썼듯이 이거는 목사님께서 실제 경험하신 그 마음의 부분을 그냥 스킵하지 않고 그거 하나하나를 어떻게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경험적인 그걸로 회중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어찌 보면은 이 목사님 본인의 아픔을 그 그것에 대한 것들을 다 하나하나 정리를 해 주셔서 이제 용서가 너무 힘들지만 용서를 해서 영혼의 자유와 행복을 느꼈으면 하는 그 사랑이 묻어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 저는 이제 이게 회중이 보이는 듯했어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설교를 할 때 회중이 이런 반론을 딱 머릿속에 생각할 때 바로 다음 줄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제 결국은 저 용서 실천하고 싶어요.
그렇죠 그러면 마지막에 어떻게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이렇게 제시해 줌으로써 저도 사실은 용서라는 그 주제가 그래서 제가 예전에 한 번 용서라는 주제 설교를 용서 콤마 용서 콤마 용서 점점점 이렇게 제목을 할 정도로 너무 너무 그냥 쉽게 접근하면 그 설교가 오히려 상처가 될 수가 있으니까 이 용서를 하는 부분은 정말 세심하고도 준비된 설교가 필요하다 했는데 제가 찾던 용서에 대한 정말 텍스트 기본 그게 이제 바이블처럼 이렇게 딱 될 수 있는 그 원고를 만난 것 같아서 너무 또 기뻤고 또 그러나 여전히 그런 나는 참 어떻게 이렇게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그런 도전과 함께 또 의문은 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게 저는 사랑이 느껴진 것 같고 이거는 목사님이 경험한 것을 그냥 경험하고 그냥 끝낸 게 아니라 회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런 깊은 연구와 시간 투자나 이런 것도 나오는 게 아닌가라는
것을 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설계가 하나님과 사랑의 계획이야 그리고 그다음 주 설교와 사단과 미움의 계획 그러면서 이제 진행이 되고 또 그다음 사람
이 마치 제가 설교의 대상자로 이 말씀을 읽고 있었는데요.
이 동일하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그 옹구지처럼 이렇게 있는 것들이 이 보게 되는 것 같고요.
그리고 보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통해서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해 주셔서 그 부분이 하나님 안에 십자가 안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이 설득에 넘어가는 그런 읽으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근데 이게 이제 읽으면서 목사님이 여기에 현장에 계신 그런 시간이 오래 있으셨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목사님도 이게 상처받고 그리고 너무나 힘들고 복수하고 싶었고 뭐 그런 것을 느끼셨다.
뭐 그런 것이 묻어져 나왔던 것을 저도 알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그 말은 맞는 말인데 절대적인 양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예를 들자면 어떤 음식을 맛을 봐 근데 나는 최고의 미식가이자 셰프야.
여러분들은 그냥 보통 사람들이고 그럴 때 나는 그 집에서 한 끼만 한 끼도 필요 없고 9개 코스가 나오는 가운데 한 3 코스만 먹어보면은 그래서 이 집의 요리가 어느 수준인지 그리고 다음에는 어떤 요리가 나올지가 다 가늠이 되는 거야.
근데 이제 그런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실컷 먹고 났을 때 느낌이 맛있었다는 느낌밖에 없는 거야.
그걸 분석해 보라고 그러면 못하는 거지. 심지어는 두 번 세 번 먹어도 이 음식이 맛있는 건 알겠는데 다른 음식점 음식하고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네.
그러니까 설교자는 경험하잖아. 경험은 둘 중에 하나야.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직접 경험은 이제 자기가 직접 경험하는 거고, 간접 경험은 이제 독서나 영화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이런 거를 통해서 이제 경험하는 거지.
그거를 조금만 맛보고도 이것이 악이다.
조금만 맛보고 또 이것이 선이다. 그걸 빨리 아는 것 그것이 이제 굉장히 그럴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딱 그 냄새만 맡으면 알아야 되는데 서너 숟갈 퍼먹었는데도 똥이 된장 같고 된장에 또 맞다고 말 안다잖아.
그러면 안 되잖아.
이 주제가 너무나 중요하고 정말 그리스도인 에게 정말 꼭 필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졌습니다.
그 평생의 삶 가운데에 늘 이것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이로 인해서 너무나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이제 그런 삶의 연속이 계속되고 이것이 이제 목회 안에서는 이제 굉장한 위축감으로 다가오고 누군가를 품어야 되는데 품을 수 없는 그런 가시와 같은 그런 것이 다가올 때에 정말 여기에서 그 해결 방법이 복음이 아니면 안 되는구나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말들을 해줘도 그것이 해결될 수 없이 많은 그런 갈등 그리고 어떤 혐오 이런 것들이 개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너무 만연해 있는데 이런 것들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복음밖에 없구나 이 부분을 명확하게 그러면서도 굉장히 설득력 있게 하나하나 짚어주시는 것이 저에게 큰 은혜가 되었고 또 도전이 되었습니다.
네 목사님이 주신 이 설교문을 저희 성도로 이게 보면 예전에 제가 타이프 쳤던 것들을 나눴을 때랑 목사님이 이렇게 딱 프린트 된 걸 줬을 때 성도들이 느끼는 것은 저희 전도사님도 그렇고 신대원을 다녔던 성도가 두 명 있는데 주석서를 보는 것 같다고 그랬었거든요.
이 폼 자체가 그리고 목사님 오늘도 서두에 논문 형식의 것의 형식을 맞췄다고 했을 때 정말 잘 짜여져 있었어 잘 짜여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빠져서 제가 제 목회 현장에서 적용하기 위해 이것은 빼고 싶다 듣고 싶다 했을 때 목사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이해가 되는 게 이 논리의 계단이 하나가 빠지게 되면 기승전결로 못 가게 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이번 파트에서 좀 더 깊게 느낀 것 같습니다.
저는 특별히 감동받았던 것은 세 번째 돼지의 실질적인 실체를 실천하는 과제를 정말 이 논리적이고 성경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 나열하는 이 방식이 제가 볼 때 이번 설교에 가장 큰 저희들에게는 해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용해서는 촌철살인 같이 미움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 권리 한 대로 네 그거를 딱 꼬집는 그 순간 정말 십자가 앞에서 많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제가 이제 이 설교를 들으면서 사실 저한테도 가장 어려운 게 이제 용서의 부분이고 그리고 지금도 제 안에서는 건드려지지 않고 있어서 그냥 넘어가지만 건드리면 잘 용서되지 않는 그 특정 몇몇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 설교 앞에서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 바른 코너에서 거부할 수 없는 딱 그 지점이 바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서 너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 사람을 용서해야 된다라는 것 것과 그리고 그 용서라고 하는 이 미움이라고 하는 문제가 예배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준다 준다.
예배에 방해의 문제가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이 예배와의 관계 속에서 이 지적들을 보면서 우리가 예배의 문제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우리가 더 깊은 은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데 이 미움이라고 하는 문제를 너무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상처를 받았고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거를 하나님의 시선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사람도 주인이고 또 하나님 사랑하는 영혼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가 저에게 있고 그리고 이 위임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이 구도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이렇게 이 미움의 문제를 붙잡고 있을 거는 아니다라는 사실 생각이 저에게 들었고요.
하나님의 시선에서 좀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서 이제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신자라고 하는 그 표증으로서 사랑의 부분을 이제 짚어주셨는데 내가 정말 구원받은 신자로서의 사랑이 내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 미움과 용서의 문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질문
목사님 제가 예전에 그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면서 저기 목사님들하고 북 셰어링 하면서 그거를 기독교로 교독교 성경 방식으로 잘못됐음을 바르게 고치는 작업을 했었는데 목사님 오늘 읽어보라고 하신 의도가 이제 거기에도 성경적으로 설교적으로 긍정적인 요소가 있으면 읽으라고 하신 건지 아니면
그런 의도라기보다는 이제 미움과 용서의 문제를 기독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재료가 되는 거죠.
목사님 그 용서가 지금 같은 되게 복잡다단한 가정 그런 환경이나 이런 이런 거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제 늘 이야기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기 때문에 이제 피해자가 가해자를 먼저 용서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궁극적으로는 위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이제 머리로는 이게 이렇게 이해가 돼도 너무 그거가 실천하고 가기에는 너무 힘든 게 또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늘 용서에 대해서는 주제가 나올 때 상대방이 그래도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할 때 듣는 척이라도 어느 정도 그래야 할 수 있다든지 상대방이 어느 정도 그래야 된다든지 이런 것들이 있는데 저도 이제 용서가 너무 큰 고민이라서 팀켈러 목사님이나 용서를 말하다 이런 책들을 보면은 골프의 배제와 포용 이런 책들도 보면은 특히 팀 켈러 같은 경우는 서구 미국의 그런 거라서 그런지 뒤에 매뉴얼화해서 본인이 먼저 피해자인데도 가해자에게 용서하는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받아들였을 때 아니면 그냥 별 별로일 때 아니면 오히려 더 각관으로 행동할 때 막 이러면서 그런 것들을 막 이렇게 이렇게 매뉴얼화해서 적어놨는데 독자를 위한 건지 알겠지만 조금 자의적인 느낌이 들었고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매뉴얼화하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의야 자유겠지만 그게 무슨 절대적인 원칙이 될 수가 있겠어 사람이라는 거는 10세기고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중요한 거는 이제 마음에 맺힌 것이 없이 살아가야지만 된다.
그래야지만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그러면서 자기는 완전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는데 자기는 매일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진 것을 탕감해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는데 그게 이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꿈꾸셨던 초기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란 말이야.
그게 이제 주기도문이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지.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 없이 그렇게 살아봐야지.
더군다나 이제 목회자들이 한 번 틀어지면은 대부분 목회자들이 끝까지 화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그냥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고 그런 사람이 많지.
근데 그런 게 이제 전부 다 우리의 영성을 갉아먹는 거야.
그래서 기도가 깊어질 수 없게끔 만들고 죄가 점점 깊어지게 만들고 그렇게 우리를 이제 점점 이제 깊은 골짜기로 들려가는 거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건전한 관계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너무 그 사람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이런 방법들은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러니까는 그리스도인이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김영옥 씨가 쓴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을 한번 읽어봐.
그러면은 많은 답을 찾아볼게 알겠습니다. 내가 그거를 창가에 서서 한 숨에 다 읽었는데 읽고 나서 이제 드는 생각이 김용옥 씨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그 사랑을 배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이제 진정한 기독교의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이제 두 가지 환상이 있는데 하나는 주체의 환상이고 하나는 희생의 환상이야.
그래서 이제 희생의 환상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 하늘도 알아주실 것이다라는 그런 심정이야.
그런 게 이제 희생의 환상이지.
그래서 예를 들자면 아들이 고3인데 온 가족이 다 고3이 돼야 되는 거야.
걔한테 초점을 맞추면 맞추면서 살아야 되는 거야.
그런 것들이 희생의 환상이에요. 그리고 그것들이 이제 말하자면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지 않을 때에 그게 한이 되는 거지.
아까 얘기했던 쌍띠망 같은 쌍띠망 같은 그런 기재로 나타나는 거죠.
주체의 환상은 뭐냐 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주체를 섞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 불붙으면은 그냥 주체가 섞여버리는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근데 그런 것은 비상명적이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거는 정욕이야.
정욕 어떤 경우에도 주체가 자신의 주체성을 잃게 하는 것은 그것은 정욕이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마약에 대해서도 이제 노후하는 이유가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단 말이야.
인간을 그것뿐만 아니고 뭐 노름 같은 도박이라든지 도벽이라든지 도박이라든지 도벽이라든지 알코올 중독이라든지 모든 것들이 다 심지어 게임 중독 같은 것들도 전부 다 다 이렇게 사람을 노예처럼 만들잖아.
그런 거를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다.
이렇게
목사님 이 용서라는 게 일단은 우리 내면에서 먼저 일어나는 게 그게 선행이 되고
그거를 아무 생각 없이 가가지고 무슨
실천 근데 그게 실천이 숙제처럼 또 이렇게 여겨지거나 그렇게 안 되는 것은 그러니까 설교자의 그런 사랑의 태도겠죠.
그러니까 니가 이렇게 가서 용서해야 된다 이렇게 되면은 현대인들이 용서라는 설교를 듣고
미례한 거지
그리고 또 이제 실제 너무 힘든데 실제 가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표현을 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또 다른 단계
가장 중요한 거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내친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풀어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다음에 실천적으로 그 사람과 불안한 관계에 있는 것을 청산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완전한 용서의 마무리지
대면하여 꼭 화해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내 스스로 그런 미움의 마음이
자기의 자기 마음에서 푸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에 그 마무리가 이제 가서 내가 당신을 이런저런 이유로 미워했었는데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하고 이제 상대방의 수용해 주는 것 배제하지 않고 수용해 주는 거 배제는 미움의 감정이고 포용은 이해의 감정이란 말이에요.
그런 속에서 미로슬라프 볼프의 포용과 배제 같은 책도 도움이 많이 돼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 어려운 책은 읽어내야 되지 않겠어요
내 마음에 맺힌 것을 풀고 가서 이제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풀었어요.
그 반응이 그거 용서해 달래 전 2m 0m 다 가다는 건 정식으로 말고 이제 면이의 반응을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거는 상관이 없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고 본인은 본인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어 본인의 영원히 미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렇게 가는 거지.
목사님 많은 청년과 대학생들은 이 원가족의 상처가 크다 보니까 본인이 이후에 결혼하고 나서도 이 부모를 떠나라는 그 이제 말씀을 일반적으로 이렇게 가르칠 때는 이제 불편한 관계 떠나기라는 그런 책도 있듯이 그러니까 자기가 계속적으로 원가족이 지금 새로 이루는 가정에게도 계속 강압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은 이제 적당한 거리를 두지만 그 자녀로서의 해야 할 것 해야 할 것들은 이렇게 본인이 책임을 감당하는 것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이제 이야기해 주고 하는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내가 용서하지 못했다.
어떤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사례들이 있다면은 좀 어떻게 그런 것들을 권고해 줘야 되나요?
좀 거리를 둬야 되는 시기도 있는 거는
사실이죠.
새 가족들 그건 또 이제 펼치면 또 너무 긴 문제고 이제 그거는 이제 가족에 대해서 또 하면 또 이제 눈물 좀 빼야지.
그래서 부모를 용서하고 또 자녀를 용서하고 원리는 똑같아 원리는 똑같아.
근데 이제 가족 가족 간에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이제 하나의 사회잖아.
그러니까는 그 가정에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가정 가족들과 헤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한 그 도피형 결혼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서양 속담에 도망간 곳에는 천국이 없다는 말이 있어.
그러니까 그걸 피해서 도망을 갔는데 거기는 더 센 게 기다린단 말이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도 훌륭하지만은 설교가 끝난 다음에 이제 세미나 같은 걸 해가지고 사람들이 적당한 수가 모여서 서로 토론을 하면서 이제 이렇게 의견을 좁혀가는 그런 것들.
미엄마 용서의 문제는 찔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
예전에 두란노에서 나온 책인데 내치는 것을 풀어야 영원히 산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지금 주어 서전 같은 데서 아마 구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좋아지 있으면 한번 읽어보세요.
그거는 뭐 이거에 비교하면 그거는 한 중학교 정도 수준에서 썼으니까
됐지 이제 그렇게 하시 여기 기도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