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마 5:13-16)

마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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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

마태복음 5:13–16 NKRV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가 근무하던 군대에는, 부대 규모가 작아서 주말에 이등병과 일병이 취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일병 때, 국을 만드는데, 짠맛을 내려고 소금을 넣었는데, 아무리 넣어도 짠 맛이 안나고 뭔가 점점 이상한 맛이 나는거에요.
왜 이럴까 하면서, 계속 넣었는데, 알고보니 제가 소금이 아니라 설탕을 넣고 있었더라구요.
그래서 국물을 다 퍼내고, 다시 물을 넣고 다시 간을 맞추었는데, 나름 성공적으로 잘 끝내서 별 일 없이 지나갔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소금이 정말 중요하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맛을 내는 중요한 조미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의 존재 목적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아니라, 광물 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모두 “세상”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13절은 “땅”으로 되어 있고 14절은 “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의미의 큰 차이는 없어,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모두 “세상”으로 번역했지만,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3절에서 “땅”은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고, 14절에서 “세상”은 더 넓은 의미의 인간 사회와 문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불교의 스님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는, 불교는 속세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속세에 집어넣고 거룩하게 살라고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채 맛을 내는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터전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그리스도의 맛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아무리 많은 재료가 들어가더라도, 결국 맛을 결정하는 것은 소금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지만, 그 소금이 그 음식의 맛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소수로 살아가지만, 세상이 부패한 맛을 내지 않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맛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세상은 맛을 잃어버린 음식, 썩고 부패하는 세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졌을 때,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그것만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맛을 잃고 빛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학지남이라는, 총신대학교에서 출판되는 학술지가 있습니다.
2016년 학술지 83권 가을호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약 800만, 6만 교회의 성도를 헤아리고 있다. 기독교 인구가 적지 않은데, 사회는 계속 더 어두워지고 있다.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회는 점점 더 부패해가고 있고, 세상은 더 캄캄해지고 있다. 교회가 이 암울한 시대의 소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고 있고, 전혀 ‘대안’이 되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짓 평안을 외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 안에 잠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볼 때, 교회의 축제와 행사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고 세미나, 제자훈련, 성경공부, 찬양집회, 각종 교회 행사 등 수많은 모임들도 볼 수 있지만, 하나님 말씀 듣기는 어렵고 눈물과 애통하는 심령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교회의 타락인 것이다,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을 더 타락하게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맛을 내고, 타락을 막는 소금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빛’이라는 것은,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처럼 빛의 특성은, 어둠을 환하게 비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빛은, 감추어져서는 안 되고 드러나야 합니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 ‘베니싱’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어느 날, 세상에 대정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모든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촛불이나, 자가발전으로 빛을 사용했던 일부 사람들만 생존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빛을 찾아 떠돌게 되는데, 모든 빛이 사라진 도시에서 소수의 빛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향해 몰려들게 됩니다.
빛은 이처럼 어둠을 밝힐 때에만이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숨겨질 수 없습니다.
또 15절에서 등불은, 말 아래에 있지 않고 등경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로 번역된 이 단어는, 8.75리터의 양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아마도 곡식을 측량하는 도구를 가리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서, 아마도 이 도구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구로 불을 덮으면 산소가 부족해 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불의 역할은 어둠을 비추는 것이기 때문에, 불은 말 아래에 놓여 있어선 안됩니다.
오히려 높은 곳에 두어 방 안을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6절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드러내시는데, 앞절에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뒷 부분에서 어떤 말이 나와야 하냐면, “그들로 너희 빛을 보고”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추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빛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뒷 문장에서 ‘빛’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착한 행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이 착한 행실은 행한 것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영광은 착한 행실을 행한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세상은 그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빛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도 이에 대해서 비슷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1–12 NKRV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영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영광을 향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6:2 NKRV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자를 고치자,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그 때, 자신들을 붙잡는 백성들을 향해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도행전 3:12 NKRV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행전 3:16 NKRV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자신이 행한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려드렸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도, 사람들은 예순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마태복음 9:8 NKRV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착한 행실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면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13-16절의 말씀은, 3-12절의 팔복과 이후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바로 산상수훈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리스도인의 그 정체성과 그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그들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15 NKRV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고, 온유한 자들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노하지 않으며, 간음하지 않고, 함부로 맹세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릍 통해 썩은 맛이 아니라, 소금의 맛을 내는 곳이 되며, 우리를 통해 어둠이 물러가고 밝게 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패와 어둠에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에게 몰려올 것이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어느 날 이발소에서 겪었던 일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강력한 인물이 이발소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식했다. 나와 같이 이발을 하기 위해서 조용히 들어온 인물인데, 내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설교를 한 것은 아니나 이발사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발이 끝나기 전에 나는 전도 집회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디 선생님이 거기 앉아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떠난 후에 의도적으로 이발소에 더 남아 있으면서 무디 선생님이 이발소에 남긴 특이한 영향을 보았다. 사람들은 조용하게 말했으며, 그분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지만 뭔가 자신들의 생각이 고상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발소를 떠날 때에 예배당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무디 선생은, 착한 언행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무지와 사망의 흑암에 앉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등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를 통해, 우리의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작지만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적은 소금이 음식의 맛을 결정하고, 작은 빛은 큰 어둠을 물리치듯이, 세상을 살아가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삶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이신 변화의 능력을 통해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사셨던 나사렛의 지구 정 반대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거룩하기보다 교회 밖에서 진짜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소금과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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