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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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허용하시는 이유

다시 보는 요한복음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시는 분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시는 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담의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십니다. 이 부분이 놀라운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의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말 잘 듣는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서로 믿을 대상을 목적하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이 말하는 최고의 가치인 도덕성과 실용성은 비정합니다. 누구와 친했다가도 이해관계가 깨지면 그만입니다. 원칙과 이해와 이익이 깨져도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가족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편애가 우리에게 구원이고, 우리의 운명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의리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과 믿음은 대등한 인격적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다시 말해 자발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는 그걸 쓰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담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발적이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사랑도 믿음도 기쁨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어떻게 참여시키시고 항복시키시는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자들, 비정한 자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의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선택이 있어야 하고, 선택은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는 한번 잘하겠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매 경우마다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많은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훌륭해지려면 자발성과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생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길고 긴 인류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을 것 같은 인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앞서 계속 언급했듯이 우리의 실패는 우리가 일할 기회입니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일을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도덕성이나 논리성이나 이기심 같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승부와 경쟁의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이때 교회는 훨씬 더 용서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해 주고, 푸근하게 반겨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도덕보다 더 높은 종교심을 요구하는 곳으로 긴장감이 꽤 높습니다.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곳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가족과 같습니다. 교회는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기다려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편을 들어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고 우리 보고 ‘전 인류를 향해 하나님의 뜻에 편을 드는 자, 곧 증인으로 하나님의 곁에 서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은 멋있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교회에 오면 반가운 인사도 못한다고 제가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웃으라고 했더니 더 못 웃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웃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첨과 아양은 떨 수 있어도 웃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지켜 주는 권세, 힘, 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편이 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면 지옥까지 찾아오실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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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요한복음 실패가 허락되는 이유

실패가 허락되는 이유

우리가 왜 신앙 훈련이 안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실패가 무엇인지와 실패가 허락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일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는 바람에 훈련이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내 책임이 끝나고, 새로 하려고 하면 다시 출발점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태껏 한 실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면 바울이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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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로마서 인간에게 선택권을 허락하신 이유

우리는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이 왜 이 꼴이냐, 이 전쟁의 비극을 보시라,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는가.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가 자초한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 의 좋은 글이 있어 여기에 인용합니다.

성경이 전하는 바는 복음이 실패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실패자라는 것이다. 영광, 권능, 위로, 건강, 그리고 부를 향한 요구는 이에 대한 갈망과 환멸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너무 약해져 버린 영혼들은 위기를 만나게 되면 적절히 반응할 만한 힘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해 주는 ‘해결’을 갈망하는 욕구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천박한 희망의 희생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무언가를 항상 약속하고 여기에 너무 쉽게 설득되는 우리는 또한 아주 쉽게 실망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실패자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순진함으로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순진하게 공 주우러 철조망 넘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리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무서운 예를 드는지 물으신다면, 현실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것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이 사실을 깨달으라고 거기에 우리를 넘겼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졸랐지요. 우리가 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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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 불만스럽고 부족한 것이 좀 있더라도, 남에게 불만스럽고 부족한 것이 좀 있더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그대로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회복시키시고 치료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꼭 바로잡아야겠다’고 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조적으로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기도로 말씀드리고 존귀함을 되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축복하시고 함께하신 것은 날 고치기 위해서이지 내 신앙이 옳아서가 아닙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믿어도 되기 때문에 허용하신 것이 아니에요. 계속 이런 신앙에 머물려고 하면 절대 못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바른 신앙, 뜨거운 신앙을 되찾으십시오. 그러면 내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실수하고 실패한 모든 것을 다 회복시키셔서 그것이 곧 은혜의 조건이 되게 하시고, 기쁨의 조건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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