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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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라
1말, 2뿔, 3측, 4대여는 5 등대 두 감람나무
지난 주에 4장에서 두 감람나무 그리고 순금 등잔대에 관한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 완성 예언의 대상은 스룹바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완성시킬 인물은 스룹바벨인 것이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의미를 살표 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볼 부분에서도 ‘영’에 관한 같은 단어가 다른 표현으로 등장을 하는데 어떤 단어인지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다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가능하면 여섯 번째부터 마지막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5장의 앞 4절은 여섯 번째 환상으로 6.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여 줍니다. 그 크기가 9미터 4.5미터인데 말 그대로 거대한 모습이죠. 이것을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라고 말하고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 한 쪽은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좀더 강력한 내용 같을텐데 의외로 너무나 평범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주를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보낸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심판과 저주는 확실할 뿐만 아니라 ‘모두 땅 위’라고 말함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장면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전하고 있나요? 대상은 포로에서 돌아온 남 유다인데 아버지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심판을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심판의 특성이 회복을 위한 순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녀 세대가 태어나고 일부는 같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기초 공사 후 사마리아와 유프라데 근처에 살던 이방인들의 방해로 16년을 시기 상조라는 핑계로 주저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개는 이미 나이가 많을 것으로 추측하고 그는 3-4개월 동안의 행동을 촉구하는 강력한 말씀을 전했다면 스가랴는 성전을 재건 동안 계속해서 왜 성전을 지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성전을 지었고 초라함을 경험했죠. 학개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진동하고 이방 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실 영광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그런 의미를 보다 세분화해서 하나님 백성의 신앙적 정체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 누구나 아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심판의 의미를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합니다. 우리는 앞서 소선지서를 살피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그저 너 잘못했다 이리와라 혼나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면 그 정당성이 다른 민족들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경배하자 할 정도로 흠모할 만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에 광범위한 심판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며 누구도 심판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두 두루마리에 나타난 글을 통해서 알수 있다는 것이죠. 1. 도둑질 하는 자, 2,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입니다. 둘 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두고/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흔히들 하는 표현으로 좋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악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잘못된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려 해도 이면에 숨겨진 사람을 속이고 그렇게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세상 방식’이라고 쉽게 표현했습니다.
최근 런.베.뮤에서 드러난 사장의 마인드도 일종의 그것입니다. 종업원을 인테리어 소품 취급하는 태도 말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오브제라고 해도 사물 취급을 했다는 것입니다. 고도의 상술로 숨기는 것을 우리는 정도에서 벗어 났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학개 1장에서 말한 자기의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들이 나무와 돌로 아울러 있기에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눈에 보이는 장소가 무너진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헤롯에 의해 지금 지어진 성전을 증축하는데 46년이 걸렸다고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 화려함이야 말로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허물겠다 그리고 다시 삼일만에 세우겠다 하는 말씀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반드시 악의 근원도 때가 되면 완전하게 멸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6번째 환상은 심판과 심판의 대상이 전 지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일곱 번째 환상인 7. 에바 속의 여인을 넣고 두껑을 닫은 후 여인이 있는 에바를 학과 같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시날이라는 장소로 옮기는 환상입니다. 여기 에바가 대략 35-36리터의 곡식을 담기도 하면서 측정하는 항아리와 유사한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몰랐을 수도 있고 만일 알면서도 그랬다면 생각보다 커서 여인을 넣을 정도라는 크기에 놀라서 이게 뭔가요 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둥근 납 한 조각이라는 두껑의 형태를 열고 여인을 넣는다 했으니 입구의 크기도 가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인’을 가리켜 ‘악’이라고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רשׁע // 그렇게 납 조각으로 입구를 막고 이어서 학 날개를 한 두 여인이니 에바를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짓고 나면 일종의 신전을 짓는 것이고 그 신전에 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에바일까요? 신명기 25:14–15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에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앞서 속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명기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을 정리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에바 속에 여인을 악으로 묘사한 이런 장면은 생각보다 커다란 에바라는 측정 도구를 통한 거짓이 그 사회에 자연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렇게 당시의 편만한 죄악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니 에바라고 한 뒤에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다’ 즉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 가는 유다 백성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돌아왔다고 회복된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유다 전역에 걸쳐 죄는 일반화되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백성들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유사한 일들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잖느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하는 말 들어 보셨을 겁니다.
잠언 초반부에서는 여성으로 의인화 된 죄의 형태를 언급합니다. 여성이라는 특정 지은 표현은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런 표현 그대로는 젠더 갈등으로 끌고 들어 갑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아니 성경에 있는대로 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 할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시대와 이면에 배경이 되는 숨은 시대와 읽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읽는 시대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 텍스트의 시대만을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계시록에서도 음녀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7:1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에바 속에 여인을 악으로 그리고 뚜껑을 닫는다는 표현은 유다 백성에게 죄에 대한 경고와 이를 에바에 담아 먼곳 시날 땅 즉, 바벨론인데 그곳으로 치워 버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학의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의 존재는 악이라는 존재와 상반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가 있으니 쉽게 천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4장에서 두 감람나무로 소개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과 영적인 존재를 대비시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루아흐’라는 호흡한다거나 바람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표현이 날개 짓을 할 때 일어나는 바람을 ‘루아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날개에 루아흐가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특이하게 ‘루아흐’가 여덟 번의 환상에 5번이나 나온다. 셋째 환상에서는 여덟째 환상에서 사용된 표현과 똑같은 ‘알루 루호트 화솨마임’인데/ 스가랴 2:6 “6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흩어지게 하는 루아흐이기도 하고 4:6절에는 성전을 재건할 때 ‘하나님의 영’의 의미로도 사용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환상의 상징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꿈인데 너무 흔하고 별것 아니면 흔히들 ‘개꿈’이라고 하지만 개꿈이라도 비 이상적으로 크다든지, 많다든지 하면 좋게 해석하는 것처럼 자의적 해석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범위 안에서 성경이 말하는 의미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어째든 악이 학의 날개를 한 여인들은 악과 상반되면서 악을 옮기는 영적인 존재로써 의도적인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악이 유다 사이에서 마치 비정상적인 에바를 만들어 세상의 방식으로 살게 한 것을 에바에 담아 먼 곳으로 보내는 환상이죠. 이런 중요한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 납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이들은 아버지 세대의 불순종으로 70년이라는 포로의 생활을 하지만 돌아와서도 바벨론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울 역시 끈임없이 우리에게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어서 2절에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에베소서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등 다양하면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그렇게 시날로 불리는 곳은 바벨 성과 탑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곳, 죄악으로 심판을 받을 곳입니다. 바로 이곳이 악의 원흉인 것과 옮겨간 악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다루는 요한계시록 17:1–5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이렇게 연결해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앞두고 또는 재건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땅으로 옮겨졌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한 포로 이후의 세대들에게 스가랴의 환상을 통해 다시 상기 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6장의 초반부에 여덟 번째 8. 네 병거 환상이 나옵니다. 두 구리 산 사이에서의 네 병거 출현하는데 처음 등장하는 네 마리 말 환상과 유사합니다. 5절에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해석이 4절부터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온 천하를 두루 다닌 후 돌아 온 말 탄 자들에 대한 내용이라면 여기에서는 두루 다니기 위해 나가는 내용만 있습니다. 이 환상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이는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다를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들이 있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분명하다는 것이며 힘을 나타내는 병거들이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하늘의 네 바람은 땅을 두루 다는 것인데 8절에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한다’를 새 번역에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여덟 번째 환상의 분위기가 정리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스가랴서가 성전 재건을 하는 상황에서 성전의 역할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일어날 영광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백성의 삶의 모습을 그때 ‘쉰다’, 시원하게 했다는 표현으로 지금 재건되고 있는 성전을 통해 돌아온 백성이 죄로 부터 해방되고 그들의 삶에서 드러 날 에바를 속이지 않는 거짓말과 공의를 따라 살도록 죄를 멀리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 내는 상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기가 부모의 품에서 생명을 공급 받음과 동시에 평안을 이뤄내는 것이죠.
결국 그런 내용은 9절부터 이어지는 지금의 재건의 현장에서 여호수아와 그를 향한 싹이라고 칭하는 미래의 소망과 함께 이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로 드러나게 될 것임을 8개의 환상이 가리키는 방향인 것입니다. 시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 냅니다. 말씀을 따라 살면 마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물을 공급받고 이어지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자연적 순리가 따라오죠. 이것이 지극히 ‘안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나, 과실이 아니라 ‘시냇가’이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것, 계속해서 흘러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메타포는 성경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성전은 그 자체가 아니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비유되고 말씀 드린 것처럼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말씀은 인류 역사의 정점인 창조에 말씀으로 되어진 진정한 세계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에 이런 그림은 그대로 그려집니다. 그 중심에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까? 멀리 가지 않고 지난 주에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삶과 시간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