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01. 세광교회 청년부 집회.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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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13:44–46 NKRV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누가복음 7:36–50 NKRV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랜만에 이 자리에서 뵙는 것 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지요?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시 한 번 앞뒤로도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소개)
오늘 저는 "안목”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성도님들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안목이 있으신가요?
안목이 무엇입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사물이나 사람의 가치를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능력” 쉽게 말하면, “진짜 가치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누구가는 그것을 “보물”로 보고, 누군가는 그것을 “잡동사니”로 봅니다. 안목이 있고 없고가 바로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지요.
그럼, 잠깐 우리의 안목을 한 번 테스트해볼까요? 지금부터 화면에 사진과 함께 문제가 나갈겁니다. 잘 보고 맞춰보세요.
(PPT 8) 이건희 회장 어린 시절
(PPT 9) 파텍필립 시계
(PPT 10) 피카소 그림
솔직히 피카소의 그림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희 조카가 낙서한 그림이랑 크게 다른 것을 못느끼겠어요. 제 조카가 천재적인 실력을 가졌거나, 제 안목이 한참 모자르거나 둘 중 하나일겁니다. 어느쪽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 만약 성도님들께서 우연히 들어간 골동품 가게에서 아주 귀한 물건을 보게 된다면, 과연 그 가치를 알아보고 손에 넣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1960년대 영국 런던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말리본이라는 동네의 골동품 가게에서 한 화가가 아주 낡은 샹들리에 하나를 250파운드, 지금 시세로 치면 40만원 가량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먼지만 쌓여가던 골동품이었지만, 화가의 눈에는 뭔가 달라 보였던 거죠. 그는 그 샹들리에가 특별한 것임을 직감했고, 확신에 차서 기꺼이 값을 치르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후 화가는 50년 동안 샹들리에를 자신의 집에 걸어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9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이 유산으로 그것을 물려받게 되었죠.
가족들은 이 샹들리에를 경매에 내놓기 위해 감정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곧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샹들리에는 20세기 조각의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이었던 겁니다. (PPT 11)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적게는 백억, 많게는 천억에 이르는 귀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니 샹들리에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분명했던거지요.
(PPT 12) 2023년 런던의 경매장에 출품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샹들리에, 당시 경매 예상가는 107억원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이들은 수 년 동안 그것을 그냥 지나쳤지만, 한 화가만이 먼지가 뒤덮인 골동품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목입니다. 누구든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나 보물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오직 안목이 있는 자만, 그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지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보화를 발견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 보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본론 1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살면서 몇번쯤은 누구나 ‘꽤 괜찮은 기회’를 만나기도 하지요.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놀라운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고,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갑자기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기회를 붙잡습니다. 실제로 그런 순간들은 분명 귀한 축복이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화’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 보화는, 내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라도 얻고 싶은 것, 내가 가진 전부를 기꺼이 팔아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것,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심지어 내 삶과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바로 이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보화를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말씀 한 구절이 내 심령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뚫고 들어왔던 날이 있으셨테고,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온 마음이 녹아내렸던 날이 있으셨을겁니다. 그때 우리가 고백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것 되십니다.” “이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다른 것을 다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예수님을 선택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자, 곧바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곧바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지체 없이, 기쁨으로 전부를 내려놓습니다. 왜요? 그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날들. 하나님이 정말 내게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 되기를 바라고, 주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이 약속이 정말 내게도 믿어지기를 원해서 씨름하듯 기도했던 날들. 한 줄기 은혜라도 붙들고 싶어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부르짖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두고 씨름하다가, 마침내 보화를 얻게 된 그 날. 그 날의 기쁨과 즐거움은 정말 세상에 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내 머리 위로 천국의 문이 열리고, 내 영혼이 살아나는 듯한 은혜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었고, 보화를 손에 넣은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요? 아니요. 보화는 이미 이전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흙먼지로 덮여 있던 그 자리에, 계속해서 감추어져 있었던 보화입니다.
그 밭을 지나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땅, 별 볼일 없는 흙덩이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안에 내 영원한 운명을 뒤바꿀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을까요? 또 어떻게 그 보물이 내 전부를 팔아서라도 손에 넣어야 할 값진 것임을 한 눈에 알아보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건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안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4 NKRV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보화는 처음부터 우리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눈이 죄로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보화가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수도 없이 우리의 귓가를 울렸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 버젓이 높이 들려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나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구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구나.”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면, 내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주저 없이 우리의 것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두었습니다. 심지어 내 삶과 생명까지 그분의 발 앞에 내려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진짜 보화임을 드디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눈 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셨고, 우리가 원래 안목이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보화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까지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당연히 그 보화를 손에 넣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을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즉시 움직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걸린 보화를 눈앞에 두고서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눈이 가리워져 있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알아볼 안목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보화를 얻기 위해 그동안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보화를 품에 안아들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본론 2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더 드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그 보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장 귀한 보화가 맞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에 무엇을 보화로 두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제가 지금 ‘한때’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장 귀한 보화였었는지를 여쭙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장 귀한 보화가 맞습니까?
이런 질문은 솔직히 참 피하고 싶어집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타성에 젖어, 나와는 거리가 먼 정답을 말하며, 빨리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습니다. 정작 그렇게 살지 않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대답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주목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보화로 두고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대로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내가 시간과 열정을 어디에 쏟고 있는가? 무엇을 가장 자주 생각하고, 무엇에 가장 쉽게 중심이 흔들리고, 무엇을 가장 깊이 갈망하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지금 나의 보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를 보화로 삼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보화로 삼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보화로 삼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지켜줄 것 같고, 내게 기쁨을 줄 것 같고, 내 삶을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 삶이 흔들리고 죽게 될 것 같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이전에 가졌던 가장 귀한 보화를 버리고, 다른 보화를 손에 넣으려 헛된 수고를 반복합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안정감을 느끼는 것. 그리스도보다 더 기쁨을 느끼는 것. 그리스도보다 더 만족이 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보다 더 자주 바라보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화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어떤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1 NKRV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지금 내가 가장 얻고 싶은 것,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것, 내가 가장 잃기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마음의 중심에 둔 보화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는 어떤 보화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때 진정한 보화를 품에 안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정말 기쁨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분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했고, 그분 외에는 다른 보물이 없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안목을 다시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세상의 잣대와 가치를 좇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닙니까? 진짜 보화를 버리고, 세상의 가짜 보화를 손에 넣으려 헛수고를 거듭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증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들을 속여 멸망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를, 가짜 안정과 가짜 기쁨과 가짜 만족으로 유혹하여 파멸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늘 부추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헛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것이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겠어’, ‘저것만 이루어지면 내가 정말 기쁠 것 같아’, ‘저것을 손에 넣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우상을 좇아보아도 결국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자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한때 우리가 우상을 좇아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을 좇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 숭배를 그치고, 그 우상을 찍어 내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 앞에 최고의 요리를 두고 굳이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를 선택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부모님께서 직접 차려주신 따뜻한 식탁을 외면하고, 굳이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를 채우려는 자녀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11–13 NKRV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온 하늘이 놀라고 떱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려 하나뿐인 아들을 희생하셨는데, 그 보화를 이제 헌신짝 내다버리듯 하는 우리의 죄악에 어찌 진노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시는 것입니까?
세상의 온갖 것들을 보화로 삼고 있으면서,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그리스도께서 내 보화가 되신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24 NKRV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음에는 단 하나의 보화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보화는 결코 공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상과 그 자리를 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가 보화던지, 세상의 헛된 것들이 보화던지 오직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자가 아니면 우상 숭배자인 것입니다.
오… 우리의 죄악이 심히 큽니다. 너무나도 큽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맹렬합니다. 그의 진노는 불처럼 타오르며, 누구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15–17 NKRV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만약 이 진노가 우리에게 0.1초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한순간에 불타버릴 것입니다.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능히 이 앞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회개하지 않고 세상의 우상을 보화로 살아간다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모독하며 살아간다면, 그 끝은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심판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중히 말씀드립니다. 회개하십시오. 돌이키십시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며 다시 그리스도를 보화로 삼으십시오.

본론 3

그렇다면 안목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른 복음서 기자와 달리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남자의 이야기와 여자의 이야기를 골고루 기록하기 위해 애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사가랴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한 쌍으로 기록되어 있구요, 2장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남종과 안나라 하는 여종의 이야기가 한 쌍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누가가 볼 때 예수님은 여성을 매우 존중하셨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역할과 능력이 아주 대단했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를 비중있게 싣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소개할 인물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시던 당시에 가장 높은 안목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아마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럼 한 번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맞추면 오늘 야식으로 먹을 수 있는 기프티콘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모두 같은 인물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인물들일까요? 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사건들일까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얼른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누가복음의 이야기와 마태·마가·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흥미롭게도 두 이야기 모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어났지만, 누가복음은 북쪽 갈릴리에서, 나머지 세 복음서는 남쪽 유대 땅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헷갈려했던 문제이니 틀렸다고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걸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신앙 생활에서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닐겁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은 누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과연 안목을 가진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하는 것 말이지요.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함께 확인해보도록 합시다.
(PPT 19) 누가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에서의 사역과 수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첫번째 부분에 해당이 되구요.
누가는 보통 예수님께서 방문하시는 지역이 바뀌면 항상 그 지역을 밝힙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고 하고, 그 후 11절을 보면 나인성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가버나움 아니면 나인성이었을 텐데요,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제자들의 무리와 또 자신의 지인들을 한데 모아 식사를 대접할 만큼 큰 집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나인성보다는 더 큰 도시인 가버나움에 살았던 바리새인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던 흥미로운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은 어린 아이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을테구요. 누가복음 7장 16–17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찬양했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도 분명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도 당연히 ‘혹시 이분이 정말 선지자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이진 않을까?’ 궁금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불러, 직접 만나고 그 정체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기다리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첫인상에 모든 기대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권위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빌어 먹고 다니는 거렁뱅이 무리들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이사야서에 예언된 대로 겉보기에는 흠모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바리새인의 마음은 기대에서 곧장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이실망은 곧 그의 태도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손님을 맞을 때 지켜야 할 중요한 기본 예절이 있었습니다. 북쪽의 갈릴리는 조금 덜하긴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건조한 지역이라서 흙먼지가 참 많이 날립니다. 그래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왔을 손님에게 손과 발을 씻을 물을 내어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기본 예의였지요. 또 존경과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볼에 입맞춤을 하였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보통은 올리브오일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피곤을 풀어주고 냄새를 없애주며 건조한 머리에 윤기를 더해주는데 효과가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분명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했습니다. 44절부터 46절까지를 보십시오. 발을 씻을 물을 내어주지도 않았고, 볼에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이 기대하던 손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과 마주한지 채 몇분도 지나지 않아서 바리새인의 마음은 “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어”라는 냉랭함으로 물들어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참 대단하신 것이, 거의 문전박대 수준이나 다름 없는 대접을 받으시면서도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셔서 꾸역꾸역 상에 앉으셨습니다. 배가 고플 제자들을 양껏 먹이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잘 차려진 식사를 드시던 차에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갑작스레 등장을 합니다.
37절을 보면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잡숫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붙어 있는 호칭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여자가 과연 어떤 죄를 지었길래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PPT 21) 37절에 쓰인 ἁμαρτωλός(hamartōlos)라는 단어는 본래 단순히 죄인을 뜻하지만, 이처럼 대화의 맥락 속에서 공공연한 죄인을 가리킬 때에는 보통 남성의 경우에는 세리를, 여성의 경우에는 간음을 저지른 자나 매춘부를 뜻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세리와 죄인”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같은 의미로 “세리와 창녀”라는 표현도 쓰이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간음이었던 매춘이었던 죄를 지은게 들켜 온 동네에 소문이 난 이 여인,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곳에 향유 옥합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함께 38절을 읽어봅시다.
누가복음 7:38 NKRV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PPT 23) 당시에는 그림처럼 사람들이 쇼파같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채로 식사하는 것이 문화였습니다. 예수님도 딱 저런 모습으로 식사를 하고 계셨을텐데, 느닷없이 한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발을 부여잡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를 풀어 정성스럽게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준비해온 향유를 발랐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닥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의 문화에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대 사회에서 여인이 공공연히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표시였습니다. 경건한 여인은 언제나 머리를 가려야 했지요. 어떤 여인이 머리를 풀어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남편과 가족 뿐이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은 자신이 문란한 여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전통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혹 어떤 여인이 실수로 머리를 푼 것을 다른 남자에게 보였다면 아주 강경한 이슬람 지역에서는 그 일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 여인의 지극히 정성스러운 모습에 누구하나 자초지종을 묻거나 제지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 여인의 섬김이 끝나기만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여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것을 알아보기에 먼저 이 연회를 주최했던 바리새인의 반응을 잠시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7:39 NKRV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은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였다면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고,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자신에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예수님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끝냈습니다. 이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선지자나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도대체 이 여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보통 사연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벌이기 쉽지 않습니다. 무슨 연유로 이런 충격적인 일을 벌인 걸까요?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만 나오는 듯하지만, 당시 향유 옥합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깊이 살펴보면 이 여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 대략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본론 4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원해서 매춘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가난한 지역의 매춘부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백이면 백 다 경제적인 이유로,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다하다 매춘을 하는 처지에까지 내몰리게 되는 법이지요.
당시 여성에게는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고 보통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기본적인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가장 노릇을 해야할 남자가 죽거나 다쳐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이들이 처음에는 눈칫밥을 먹고 또 빌어먹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선택하게 되는 마지막 수단이 매춘이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몸을 팔아야만 겨우 하루 한 끼를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몸을 내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죄인”이라 불렀지만, 정작 그 여인의 아픔과 절박함을 이해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율법이 정해둔 큰 죄악 중에 하나였으니까요. 주제를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성도님들께 한 번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이 여인만 죄인일까요? 아니면 이 여인이 매춘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이웃 모두가 공범일까요? 나중에 이 고민을 가지고 요한복음 8장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여인에게나 결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토끼같은 자녀를 낳고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런 소박해보이지만 사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어떤 여인이든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매춘부 신세가 되어 누구하나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그 꿈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나봅니다.
이 여인이 가져와 예수님께 부어드렸던 향유는 그저 값비싼 사치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여인들에게 향유는 결혼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지참품 중 하나였습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한 방울 한 방울 모아두던 소중한 소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보내는 첫날밤, 여인들은 소중하게 간직한 향유를 남편에게 붓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는건 살림 밑천으로 보태기도 하구요.
이 여인은 이제 그 꿈을 꾸지 못합니다. 매춘부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정상적인 혼인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나같은 죄인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하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한 방울 한 방울 향유를 모았습니다. 굶주림과 한 방울을 바꾸고, 헐벗음과 한 방울을 바꾸고, 설움과 한 방울을 바꾸고, 눈물과 한 방울을 바꾸어 그렇게 옥합을 채워갔습니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모든 이에게 죄인이라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삶에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하고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이들이 그랬듯이 여인의 곁에 서 있는 모두가 자신을 향해 죄인이라 정죄하였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며 손가락질 하는 자들을 다 물러가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고 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 섬기는 자들을 통해 이 여인이 더 이상 매춘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지 않았을까요?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던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던 수치와 절망이 씻겨졌습니다.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 생각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내 삶에 일어나 버렸습니다.
이렇게 자기 영혼의 깊은 갈망과 진정한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더 이상 이전에 품었던 것에 미련을 둘 수 없습니다. 이제 그것이 그닥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결혼을 위해 향유 옥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이 향유가 쓰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옥합을 들고 다짜고짜 길을 나섰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연회가 있을거라던 집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 바리새엔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계신 자리로 곧장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하지 않았던 일을, 여인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이 발 씻을 물을 내어주지 않아 씻지 못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려 그분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순간,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눈물은 이내 예수님의 발을 가득 적셨고, 여인은 급히 자신의 머리를 풀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어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옥합을 열어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에게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향유를 붓는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모든 소망과 목적을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시선으로 보던 상관치 않고 남은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작고 초라하게 여겨지던 그곳에서, 죄를 용서받아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분으로 높아지셨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이고 사랑인가요?

결론

이것이 안목이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있던 수많은 자들 중에 오직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 오신 진정한 왕이셨고,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을 구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존귀함에 걸맞게 반응했습니다.
사랑하는 세광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여인과 우리 사이에 아주 사소한 단 하나의 차이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동네에 소문난 죄인이었고, 우리는 아직 소문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그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이 여인같이 우리도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던 큰 죄를 용서받았고,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었던 수치와 절망을 씻어냈습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저 화면에 그대로 드러난다면 우리 중에 누가 여기에 부끄럼 없이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수치를 가려주셨듯, 우리의 수치도 가려주셨기에 여기에 맘편히 앉아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그랬듯, 우리 또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 여인과 같이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다음 세대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던 큰 죄를 용서해주신 분 맞습니까?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던 수치와 절망을 씻겨주신 분 맞습니까? 결코 기대할 수 없던 진정한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주신 분 맞습니까?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의 수치와 절망을 씻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위해 오르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왕,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우리가 다른 무엇을 우리의 보화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진정으로 보화를 알아본 자라면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보화를 손에 넣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파는 법이지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보화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화로 주셨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온통 사랑으로 가득 담긴 이 보배합은 무엇으로 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내 전부를 건 사랑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예수님이라는 보화에 걸맞는 값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시길 바라십니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예전처럼 기쁨이 없어요. 예배가 감격스럽지가 않아요. 예전엔 교회 가는 게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교회가 계속 세상에 물들어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 살이가 점점 더 힘겨워지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우리 신앙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안목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과거의 뜨거웠던 시절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때는 상황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이었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보화를 위해 기꺼이 다른 모든 것들은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헛된 것들이 우리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자리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점 식어가고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십니다.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훗날 천국에서, 영원에 영원을 거듭해서 그분을 알아간다 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만족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풍성하심과 아름다우심에 다시 눈 뜬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모든 것을 팔아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얻으려 할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외치며 우리의 모든 삶과 생명까지도 다 드리려 할 것입니다.
안목을 가지고 살았던 또 다른 사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7–9 NKRV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무슨 뜻입니까? 자신에게는 그리스도가 보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평생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힘쓰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수고를 마친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바울은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한 평생 보물로 여겼던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를 영원토록 보물로 여겨주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혹시 바울이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 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화로 여기며 살았던 모든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랑과 헌신을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결말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보화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안목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눈을 씻고 비벼보아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목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죄로 멀어졌고, 우리의 안목은 흐려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이 시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18–19 NKRV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 하신 주님의 음성 앞에 엎드리십시오. 이 안약은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무엇으로 이 안약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전부를 건 사랑으로 다시 예수님을 사랑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안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그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며 주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이 밤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안목을 다시 회복하셔서 그리스도를 보화로 삼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걸고 우리를 사랑하셨듯, 우리도 우리의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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