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은 자의 최후

이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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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켜 ‘아골(괴로움)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다급한 상황인데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사이에서 바로 이 아골 골짜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와 아이 사이에서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볼 것은, 이 괴로움이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나빠져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움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죄를 알게 하시고, 이것은 죄로 인한 실패와 패배이며 거룩함을 통해 회복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1.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13~18절)
이전 본문인 7장 앞부분을 보면,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루 종일 엎드려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어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어떻게 혼자 이 많은 백성을 다 거룩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거룩하게’ 하도록 그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백성이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그 200만 명 이상 되는 그 백성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다 거룩하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여호수아는 백성이 어떻게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지 그것을 선포하고, 백성은 각자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목사나 장로나 자기가 의지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그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한 공동체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라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리고 성을 치기 전에 먼저 동쪽에서 서쪽으로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이 말씀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주어진 명령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3:5).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의 영적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영적 수준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소망도 있습니다. ‘내일’이 되면 다시 요단강을 이전에 건넜던 마음으로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에서 승리를 주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누구라도 여리고에서 나오는 물건을 하나도 가져서는 안 되며, 만일 그 물건을 가지는 자는 자기 자신을 바치게 되는 ‘헤렘’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헤렘’이라는 단어는 ‘진멸하다’라는 뜻도 있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첫 번째 성이기 때문에, 그 첫 번째 성에서 나오는 모든 물건은 너희가 가지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노략해서 백성들이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성인 여리고 성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가진 사람이 이스라엘 중에 있는 한 이스라엘은 아무리 싸워도 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 바로 그런 사람이 생긴 겁니다. 지금 죄가 그들 가운데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여기서 언약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11)라고 하셨고,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15)라고 하시며 언약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언약 관계, 즉 계약을 맺은 관계라는 겁니다. 계약을 맺은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쪽이 함부로 계약을 어기면 그 관계가 깨집니다.
특히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가나안 민족들과 똑같아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적들에게 패한 이유가 그들이 죄를 짓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물건인 ‘헤렘’을 가져가서 자기들 가운데 둠으로써 언약이 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진멸 당해야 할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12).
“그들 스스로가 전멸시켜야 할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새번역)
원래 다 전멸시켜야 하는 것을 슬쩍 가져가니까, 자기가 전멸당해야 할 그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절대 승리할 수 없게 되며,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13).
여러분,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들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의 핵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할까?’ 이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만 계속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뭔가를 결정할 때 그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서는 세상에서 살기 어렵고 도태되며 뒤처질 수 있으니까, 그냥 내 방식대로 살겠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은 결코 내게 해가 되는 것을 하라고 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라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다 실패할 때도 있고 잘할 때도 있지만, 계속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나아가는 삶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유능하고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아무리 연약한 사람이라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연약한 나의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한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니까 그분의 엄청난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내가 하려고 하면 그냥 거기까지입니다. 그런데 능력에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면 한이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덜 할까? 어떻게 하면 좀 편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적당히 할까?’ 아니면 여기까지 선을 딱 그어 놓고 ‘여기까지만 해야지. 그거 넘어가면 너무 피곤해.’라고 하며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자기에게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나중에 다 계산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해야 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단순히 도둑질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내서 심판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불순종의 죄를 심판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찾아내서 무조건 때려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야, 어느 지파, 어느 족속, 어느 가족에 속한 아무개가 이 죄악의 원인이다.’라고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지만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아간이 범죄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신 제비를 뽑게 하십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무엇을 보여 주길 원하십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은 곧바로 그 죄를 드러내며 심판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별다른 일이 안 일어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것이 우리 죄를 몰라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다 아시면서도 못 본 체하며 기다려주십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다려주시는 것이지,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그냥 눈감아주시는 게 아니라,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혹시 죄를 짓더라도 성령님이 안에서 찔러주십니다. ‘너, 그거 죄야. 그러면 안 돼.’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맞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죄를 고백하면, 마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불쌍하게 여기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회복의 역사와 놀라운 복을 더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 기다려주시지만, 무한정으로 기다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둘 경우 죄가 속으로 깊이 들어가 썩어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도저히 더 놓아두었다가는 완전히 망가지기에 더 이상 그냥 두실 수 없을 정도가 될 때 드디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내실 때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일,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통해서 다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비를 뽑게 하십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제비를 뽑아서 하니까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렸겠습니까? 뭐 하러 그렇게 합니까, 그냥 ‘이놈이다’ 하면 되는데?
그것은 이 일을 통해 철저히 거룩과 성결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16) 일어나 일을 진행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요단강을 건널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이때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가까이 나오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아침부터 일찍 그렇게 한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열두 지파 중 아주 대표적인 지파인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대개 죄를 지었다면 유다가 아니라 르우벤 같이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는 지파가 뽑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열두 지파 중에도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유다의 자손들이 많으니까 유다 지파를 가문별로 나오게 하니까 세라의 가문이 뽑힙니다. 세라의 가문 중에서 그 자녀들인 남자들을 나오게 하니까 삽디가 뽑힙니다. 또 삽디 집안의 남자들을 차례대로 나오게 하니까 드디어 아간이 뽑힙니다.
이때 아간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제비뽑기 방식으로 죄인을 찾아낼 것이다.’ 하고 발표했을 때 아간이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때 혹시라도 가슴이 철렁하면서 ‘아,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하며 곧바로 여호수아를 찾아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자수했더라면, 그는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간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설마 내가 뽑히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떻게 내가 한 줄 알겠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가 딱 뽑힙니다. 또 그중에서 세라 가문이 뽑힙니다. 이때 남자의 수가 많으니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을 겁니다. 이제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데, 처음에는 많이 걸렸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좁혀 들어올 때까지도 ‘에이, 설마, 설마’ 이러면서 끝까지 버텼습니다. 점점 더 많이 떨렸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에 자기 이름이 불릴 때까지 그는 시치미를 뚝 뗀 채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아간은 끝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독한 사람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간아, 빨리 나오거라. 빨리 나와 회개해라. 아직도 기회가 있다. 어서, 어서 나와!’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아간이 스스로 고백하며 나오길 원하시면서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초청과 주어진 기회를 끝까지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남들 모르게 숨겨 놓은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르셔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 아십니다. 시간을 주실 때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2.아간의 자백 (19~21절)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지금 아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라고 하니까 ‘아, 이러면 되나 보다.’ 생각하며,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는데 이러이러하게 했으니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줄여서 그냥 이렇게 써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고 하고, 아간은 자기가 무엇을 훔쳤고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자백합니다.
그가 가져간 물건들은 과연 누구라도 욕심을 낼만 한 것들입니다. ‘외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겉옷을 말하는데, 모든 외투가 화려하거나 값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 산’의 값진 것이었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날이 어떤 곳입니까? 성경 창세기에서 ‘세상의 첫 용사’라고 하며 ‘용감한 사냥꾼’이라고도 부르는 니므롯의 나라가 있었던 곳입니다. 또한 바로 이곳이 나중에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내자고 하며 높은 탑을 쌓았던 곳, 바로 바벨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시날이라는 곳은 완전히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외투가 바로 거기서 온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상징하는 물건인 겁니다. 다시 말해,
아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반역하는 자라는 사실을 여기서 암시해 줍니다.
아간은 시날 산의 외투를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평소에 그런 쪽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는 겁니다. 명품을 꿰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딱 보는 순간 탁 가져간 겁니다.
모르는 사람은 좋은 걸 봐도 몰라서 못 가져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고 가져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지였던 그 시날 산에서 나온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이스라엘 사람이 나아가 가져갔다는 것은, 성경이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반역한 자라는 암시를 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아간이 훔친 ‘은 이백 세겔’은 자기가 무게를 달아보며 좋아했다는 말 아닙니까? 이것은 약 3kg이고,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는 700g 정도가 됩니다. 가볍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당시 고대사회에서 보통 사람이 평생 일해서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간신히 가질 수 있었던 엄청난 양입니다.
아간의 고백을 보면 그가 죄를 범하게 된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21). 그는 먼저 이 물건들을 보았고, 탐냈으며, 마침내 가졌습니다. 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냥 보이는 것을 그가 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의도적으로 계속 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 이것은 예쁜 여자가 지나갈 때 ‘아유, 참 예쁘네’ 하며 한 번 쳐다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혹해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것을 말합니다.
아간도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보고 또 보고 또 보면서 ‘야, 저거 시날 산 외투, 은, 금, 너무 좋다. 남들이 가지기 전에 내가 가져야겠다.’라는 욕심이 생긴 겁니다. 욕심이 올라올 때도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하며 빨리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났으면 괜찮은데, 아간은 결국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건들을 몰래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는 이스라엘 전체가 패하고 고통을 당하는 길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무슨 죄이든지 이런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보고, 탐내고, 그다음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전부를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통제하겠습니까? 그러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안 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더라도 ‘안 봐야지’라고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봐야지’ 하며 보는 것도 자기 선택입니다.
죄는 관심을 가지고 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보여서 보는 게 아니라, 일부러 보는 데서 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도를 가지고 보는 데서 죄가 시작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내 시각으로 볼 때 문제가 됩니다.
보면서 자꾸 뭔가를 상상하고, 그러다 보면 욕심이 일어나며, 그래서 결국 죄에 빠집니다. 처음에 한번 죄를 짓는 것이 어렵지, 일단 한번 죄를 짓게 되면 그다음에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아간이었지만 그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제비를 뽑는 동안 그는 앞으로 나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간은 끝까지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겁니까? 왜 그는 끝까지 자기가 저지른 죄가 발각되지 않을 거라고 헛된 희망을 품었던 겁니까?
그가 한 말에 답이 있습니다. 21절에서 그는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라고 말합니다. 아간은 자신이 가져간 물건들을 가리켜 ‘노략한 물건’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이 물건들을 포함해서 모든 여리고의 물건들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긴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한 여리고 성의 것들을 노략하고 빼앗아 가는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노략할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노략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들인데 이것을 자기가 노략했다고 합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13),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15)라고 계속 온전히 바쳐진 물건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하시는데, 아간은 단순히 노략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인데 그냥 노략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안 된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한 겁니다. 이러한 그의 아주 잘못된 시각이 그를 죄의 길로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그 안의 것들을 어떻게 보는가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지식과 상식으로 볼 것인가?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시는데 나는 된다고 하는지? 하나님은 하라고 하시는데 나는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건 아닌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면 분노하십니다. 단순히 ‘너, 내 말 안 들어? 기분 나쁘네.’라고 하면서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게 되면 자기는 그것이 똑똑한 것 같고 괜찮은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은 잘못된 죄의 길로 가는 것이고 인생이 망가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실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길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꾸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니까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노는 사실 사랑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질투’라고 표현했습니다.
3.죄에 대한 심판 (22~26절)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자기 장막 안의 땅에 묻음으로 그 땅을 ‘가나안화’ 시켰습니다. 가나안처럼 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가나안처럼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의 장막은 분명히 이스라엘 진 안에 있었지만, 그곳은 가나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이 된 그와 공범들인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는 ‘헤렘’, 즉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이 되어 진멸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라합과 라합에게 속한 모든 것이 구원을 얻었던 것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만 짓다가 멸망 당할 수밖에 없었던 가나안 사람 라합은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이스라엘화’ 되어 영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인데 영적으로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 아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가나안의 길, 죄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가나안화’ 되어서 영적으로 가나안 사람이 되었고, 결국 멸망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도 끝없는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잘해야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이렇다고 하시는데 나는 ‘아닌데요’라고 하는 것은 혹시 없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신 것, 인정하시지 않는 것을 선택해서 내 삶을, 내 가정을 ‘가나안화’ 시키는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누구의 시각으로 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순종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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