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0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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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디모데후서는 주후 64년에서 67년경, 바울이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이 투옥은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첫 번째 투옥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 번째 투옥 (가택 연금): 당시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셋집에 머물며 비교적 자유롭게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행 28:30-31). 희망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투옥 (진짜 감옥): 그러나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의 감옥은 빛도 잘 들지 않는 차갑고 습한 지하 감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일반 범죄자, "행악자"처럼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딤후 2:9). 이전과 같은 자유는 없었고, 면회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가 그를 "힘써 찾아 겨우 만났다"(딤후 1:17)는 표현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후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 박해의 광풍 속에서 체포되어 '로마 제국에 해를 끼치는 위험인물'로 취급받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본론 1: 세상이 강요하는 부끄러움, '손절'의 시대
본론 1: 세상이 강요하는 부끄러움, '손절'의 시대
바울이 왜 감옥에 갇혔습니까? 당시 로마 제국에서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황제의 말이 법이고,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진짜 왕은 따로 있다. 온 우주의 주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황제의 눈에는 이것만큼 발칙하고 위험한 반역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행동은 가장 확실한 성공의 길을 걷어차고, 가장 미천한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 '부끄러운 죄수' 바울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요즘 말로 '손절'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와 어울리는지가 그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결정했습니다. 죄수와 가깝다는 것은, 그의 고난과 차별에 나도 동참하겠다는 선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을 떠났습니다. 15절을 보면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아시아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는 데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치던 제자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과 엮이면 자신들의 인생까지 끝장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내 평판에 흠집이 날 것 같으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부끄러움'의 법칙입니다.
본론 2: 부끄러움을 이기는 확신,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압니다."
본론 2: 부끄러움을 이기는 확신,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압니다."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에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지혜와 문화를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로마의 권력 앞에 힘없어 나무 십자가에서 반역자로 처형된 예수님은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복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모두가 떠나고,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그 차가운 감옥에서, 바울은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12절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고백합니다.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내가 안다"는 말이 그냥 아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안다'는 단어에 '기노스코(γινώσκω)'와 '오이다(οἶδα)'가 있습니다. '기노스코'가 경험을 통해 점차 알아가는 지식이라면,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오이다(οἶδα)'**는 완전히 알아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본질적이고 완결된 앎을 의미합니다.
마치 우리가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바울은 "나는 내가 믿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나 지식이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체험하고 확증한, 뼈에 새겨진 앎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깨뜨리신 전능자이시며, 가장 신실하신 보호자라는 것을 그는 '오이다'의 앎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믿음이 바로 이 '오이다'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풀무불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실까?"를 시험해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은 그분께 맡깁니다."라는 절대적인 신뢰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오디아’의 앎이 있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 생명과 사명, 영혼까지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내가 맡긴 그것을 우리 주님은 마지막 그 날까지 안전하게, 완벽하게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 흔들리지 않는 앎과 확신이, 세상의 모든 부끄러움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본론 3: 부끄러움에의 초대, 고난에 동참하라
본론 3: 부끄러움에의 초대, 고난에 동참하라
바울은 이 확신 위에 서서,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나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마. 걱정하지 마. 오히려 너도 이 위대한 고난에 동참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라고 유혹합니다.
안정적인 직장, 좋은 차, 넓은 집,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반대로 초대합니다.
"세상이 부끄럽게 여기는 그 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라. 그것이 진짜 영광의 길이다."
결론: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습니까?
결론: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바울을 버리고 떠난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의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로 '오네시보로'입니다. 그는 쇠사슬에 매인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써 찾아와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네시보로가 목숨을 걸고 바울을 찾아간 이유가 단순히 인간적인 우정이나 의리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그보다 훨씬 깊은, 신앙고백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로, 그의 방문은 복음과의 연대였습니다. 바울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곧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찾아감으로써 "바울이 전한 저 복음은 내 목숨을 걸 만한 진리이며, 나는 그 복음 편에 서겠습니다!"라고 온몸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방문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체로 여겼습니다. 교회의 심장과도 같은 사도가 감옥에서 무너진다면 교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격려한 것은, 한 사람을 위로한 것을 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에 생명을 공급한 거룩한 섬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방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복음의 진수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죄수'라는 세상의 시선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은혜를 받은 존귀한 형제'로 보았습니다. 그의 위험을 감수한 사랑은, 먼저 받은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고난받는 지체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 위에 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의 곁을 지켰던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어디에 의탁하시겠습니까? 곧 사라질 스펙과 세상의 평판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나를 지키실 신실하신 우리 주님이십니까?
우리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빽'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을 '오이다'의 앎으로 알고, 그분께 내 인생을 온전히 맡기는 것, 이것이 우리를 모든 부끄러움에서 자유하게 할 유일한 길입니다. 이번 한 주, 세상의 기준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믿고 담대히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