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은 땅에 두 눈은 하늘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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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벨의 세상에서 올람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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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7-9

[서론]

최근 온라인에서 '성공한 인생의 기준'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 글은 연령대별로 어떤 삶을 살아야 '성공'이라 불릴 수 있는지를 간단히 정리한 내용이었는데, 제가 보면서 공감하면서 웃기도 하고 마음 한 켠으로는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여러분도 잠시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10대는 성공한 부모가 있으면 성공
20대는 명문 대학에 입학하면 성공
30대는 좋은 직장에 다니면 성공
40대는 다른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여유 있게 하면 성공
50대는 공부 잘하는 자녀가 있으면 성공
60대는 은퇴하지 않고 돈 벌고 있으면 성공
70대는 몸이 아프지 않으면 성공
80대는 배우자가 건강히 내 곁에 있으면 성공
90대는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성공
100세는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해도 성공
어떠십니까? 이 기준들을 보면서, 혹시 여러분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이 기준들에 맞추어 평가해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사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라고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이란 좋은 학교, 안정된 직장, 넉넉한 재정,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최근 통계에서도 현대인 대부분은 '내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면 성공이다'라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스스로 만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만 이루면 행복할 거야, 성공할 거야' 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정작 그 자리에 도착하면, 또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집에 살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이사 와 보니 옆집 집이 더 커 보입니다.' '이 정도 월급이면 만족할 거라 생각했는데, 친구 월급 얘기를 듣고 나니 내가 부족해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행복의 기준, 성공의 기준은 이렇게 자꾸 흔들리고 움직입니다.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한 계단만 더 오르면 행복할 것 같은데, 정작 그 위에는 더 높고 가파른 계단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이렇게 끝없이 더 높은 기준, 더 좋은 조건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의 만족과 행복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항상 조금씩 더 멀어져만 가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전도서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해 아래' 인생의 '헛됨' 곧 ‘헤벨’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이 공허함과 끝없는 갈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통찰하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헛됨을 넘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마주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바로 이 세상에서 성공이라 부르는 모든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사라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는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들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결핍 때문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이 중요한 문제를 함께 들여다보며, 과연 우리가 어디에서 이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고,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세상적 성공의 허망한 실체]

[주해] 우리가 읽은 본문 앞 부분인 1-2절에서 전도자 솔로몬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역설을 드러냅니다. 함께 1절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6: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아멘.
해 아래,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공과 행복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6: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아멘.
이 구절에서 전도자가 사용한 “헛되다”라는 말이 바로 ‘헤벨(hebel)’입니다. 이 단어는 전도서 전체의 핵심 개념으로, ‘무의미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바람’, ‘입김’, ‘안개’라는 생생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헤벨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 중에 손을 휘저어 바람을 붙잡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끝에 닿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쥘 수 없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모든 성취와 부요를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을 바쳐 재물과 존귀, 명예를 쫓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결국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잡히는 듯 보이지만, 손을 펴보면 남는 것은 허무함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헤벨’입니다. 인생의 모든 수고는 결국 덧없고, 우리가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흩어져 버린 바람이 됩니다. 전도자가 이를 “악한 병”이라 부른 이유는, 사람은 그 허무함을 알고도 멈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람을 잡으려 끝없이 손을 뻗는 아이처럼, 인간은 다시 또 그것을 잡으려 몸부림칩니다.
이 통찰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재산, 더 큰 성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달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이들도 결국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허전하고, 공허합니다. 왜냐하면 바람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잡는 순간 흩어지고, 손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을 들으며, 솔로몬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허무함’과 같은 허무주의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인생의 근본적 진실을 보여줍니다. “해 아래의 모든 것은 바람과 같다는 것, 즉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의 성공과 명예, 그 어떤 것도 우리 영혼의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애써 붙잡는 모든 것은 시간이라는 손길 속에서 결국 흩어질 뿐입니다.
[예화]
실제로 이 헤벨의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세계적 억만장자이자 면세점 사업가였던 척 피니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 세계 면세점 사업을 최초로 창시한 사람이었으며, 한때 약 1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부러워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를 향해 “저렇게 성공하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척 피니는 부와 명예의 절정에서 깊은 허무를 느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이렇게 깨달았습니다."부는 바람과 같다. 그것은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허무하고 공허하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이 평생 동안 이룬 모든 재산을 기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척 피니는 무려 40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기부를 이어갔고, 결국 2020년에는 전 재산을 모두 기부하여 소위 ‘빈털터리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기부를 마치고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서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돈과 명예는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것입니다. 내가 붙잡으려 했던 세상적인 성공은 결국 내 영혼을 진정으로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신 더 크고 영원한 가치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척 피니의 고백이 바로 오늘 전도자가 말하는 ‘헤벨’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쫓는 부와 성공, 명예는 마치 손에 잡는 순간 사라지는 바람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자는 우리가 읽은 본문 전도서 6:7-9절을 통해 인간의 노력과 욕망 자체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그것조차도 허망한 ‘헤벨’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루려는 모든 것들이 붙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헤벨의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람 사이의 따뜻한 사랑, 서로를 품어주는 사랑만이 이 허무를 극복하게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이 우리 삶의 허무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오히려 인간관계와 사랑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우리를 더 깊은 진리로 이끌어 갑니다. 전도서 6장 3절에서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본론 2: 인간관계의 한계와 영혼의 고독]

[주해]
전도서 6: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아멘.
여기서 ‘백 명의 자녀’란 단지 숫자 그대로의 자녀 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풍성함과 번영을 상징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많은 자녀와 오랜 삶을 큰 축복이자 성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도자 솔로몬은 이런 인간관계의 풍성함마저도 결국 우리 영혼의 깊은 갈망을 채워줄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특히 솔로몬은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이라는 충격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안장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생 맺었던 관계가 마지막 순간 아무 의미 없고,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많은 자녀와 풍성한 인간관계를 누렸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 자신을 돌보는 관계가 없다면, 오히려 태어나지 않은 자만도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관계는 결국 그 끝에 가서는 공허함과 허무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에서 솔로몬은 이 허무를 더욱 강렬히 드러냅니다.
전도서 6: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전도서 6: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아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풍성한 관계와 축복을 누렸던 사람보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낙태된 아이가 더 평안하다니, 이는 인간관계가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고독과 공허함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관계를 통해 사랑을 주고받으며, 그것이 우리 삶에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국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도, 배우자도, 친구도 우리의 영혼의 근본적인 공허를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은 인간적인 관계와 사랑을 넘어 하나님을 닮아, 영원을 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사랑과 관계는 분명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채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관계는 결국 헛된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더욱 깊은 외로움과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적용]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만족을 얻고, 근본적인 고독과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만족과 평안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인간관계에 너무 의지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자녀의 인정과 사랑, 배우자의 헌신, 친구들의 격려가 여러분 존재의 의미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결국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에게서 만족을 찾는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외롭고 상처받을 때에도, 우리의 삶의 모든 관계가 무너질 때에도 우리 곁에 영원히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을 완전하게 채우실 수 있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영원한 가치'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전도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올람’의 세계입니다.

[본론 3: 영원을 품은 인생, 올람의 세계]

[주해]
성도 여러분, 이제 전도자가 제시하는 ‘올람’, 즉 영원을 품은 삶이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허망한 실체, 곧 ‘헤벨’의 세상을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말하는 헤벨은 바람과 같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입김과 같아서, 세상의 모든 성공과 행복, 인간관계조차도 결국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메시지는 결코 이 허무와 절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제 전도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궁극적 소망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Ecclesiastes 3:11 NKRV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의 깊은 비밀과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 단어 ‘영원’, 히브리어로 ‘올람(עולם)’이라는 단어는 매우 깊고 풍성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올람은 단지 끝없이 긴 시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완전한 충만’, ‘변치 않는 견고함’, ‘끊어지지 않는 사랑과 평안’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헤벨’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부요, 인간관계의 풍성함도 결국에는 사라지는 바람과 같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우리가 갈망해야 할 진정한 대상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올람’, 즉 영원의 세계입니다.
헤벨의 세상은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애써 붙잡으려 했던 모든 것이 결국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습니다. 그러나 올람의 세계는 다릅니다. 올람은 시간과 변화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올람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만족시키는 완전한 안식의 상태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경험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최고의 성적을 받았던 날, 대학 입시의 합격을 경험했던 기쁨, 결혼식을 올리던 그날의 감격, 사랑하는 자녀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눈물, 그 외의 다양한 기쁨과 감격, 행복의 순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해 아래 세상의 모든 감격과 행복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희미해집니다. 그런데 올람의 세계에서는 이 행복이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이 기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충만해지고, 더 깊어지며, 더 영광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조차도 기쁨의 깊이를 더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올람의 세계는 우리가 너무나 보고 싶어 했던 주님과 마주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기도하며 사모했던 그 주님의 얼굴을 눈으로 직접 뵙고, 우리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그분의 음성을 직접 듣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는 다 이해할 수 없던 모든 고통과 눈물의 이유를 그분의 눈을 보며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난과 외로움이, 그분 앞에서 마침내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헤벨이 아닌, 올람 속에서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 살아가며 때로 인생의 공허함과 허무함에 흔들리더라도, 우리 안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음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적용]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가 품은 이 올람에 대한 갈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못 누리고 죽은 후 천국에만 가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영원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해 위의 세상에서 해 아래의 헤벨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는 헤벨로 가득하여, 우리가 올람을 누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영원을 품고 오셔서, 우리에게 더 이상 헤벨의 한계 속에서 허덕이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시선을 ‘올람’이신 예수님께 고정합시다. 세상의 덧없는 가치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의도적으로 가지십시오. 매일의 말씀과 기도, 예배를 통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친히 채워주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갈 때, 세상은 절대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영원한 만족이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될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전도서를 통해 헤벨의 세계를 깊이 마주했습니다. 우리 손에 닿을 듯 보였던 세상의 모든 성공과 성취, 사랑과 명예가 결국 우리 손끝에서 흩어져 버리는 바람과 같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생을 걸고 붙잡으려 했던 모든 것이 결국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마는 허망한 '헤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흩어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 올람이 있음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자신의 온 생애로 드러낸 한 젊은이를 소개하며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1956년 1월, 에콰도르의 아마존 밀림 깊숙한 곳에서, 짐 엘리엇이라는 젊은 선교사가 아우카 부족의 창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는 겨우 28살의 나이에 이 땅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단지 그의 젊은 나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명문대 휘튼 대학을 졸업하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휘튼 대학 졸업 후 에콰도르 선교사로 가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 좋은 능력과 젊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간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텐데, 뭔가 대단한 일들을 해보이고 성공할텐데 왜 헛되이 버리니? 바보야?” 그러나 짐 엘리엇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이 그의 전 생애를 정의했습니다. 그는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리스도 안의 생명을 붙잡았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올람’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렸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순교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벳 엘리엇(Elisabeth Elliot)과 딸 발레리(Valerie)는 남편을 죽인 바로 그 땅, 아우카 부족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원수와도 같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은 그 지역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 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헤벨의 허무함을 넘어 올람의 영원한 가치가 삶에서 열매를 맺은 역사이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세상이 준다고 약속한 부와 명예, 성공과 안정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분의 관계 안에서 허락하신 영생을 쫓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 사람들이 쫓는 가치들은 결국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는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기쁨입니다. 짐 엘리엇과 엘리자벳 엘리엇이 붙잡았던 것은 바로 그 영원한 가치, ‘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시는 참된 생명과 위로를 붙들었습니다. 그들이 젊음과 명예와 성공을 내려놓았기에, 지금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살아 있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부터 헤벨을 붙잡는 인생이 아닌, 올람을 붙잡으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기로 결단합시다. 영원한 것을 위해 언제든 영원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으며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의 제자,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입니다. 이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올람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성공과 만족이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헤벨’임을 깊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세상의 헛된 것들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게 하시고, 이제는 흔들림 없는 영원한 ‘올람’의 가치, 곧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을 붙들게 하옵소서. 주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주시고, 우리의 남은 삶이 오직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원히 붙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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