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장 19-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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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낮아짐의 이유
제목: 낮아짐의 이유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찬송: 505장 온 세상 위하여
찬송: 505장 온 세상 위하여
오늘은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말씀을 가지고 '낮아짐의 이유'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려 한다.
바울은 자유로운 사도였지만 스스로 종의 자리를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이는 복음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세 가지 전도 전략을 배운다. 그것은 낮아짐과 같아짐과 절제함이다.
19-23절은 바울이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된 이유를 말한다.
19-23절은 바울이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된 이유를 말한다.
바울은 분명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였다.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권리를 내려놓았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바울은 자기 의지로 종의 자리에 섰다.
그의 낮아짐은 구체적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표현은 본문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이는 전략적인 낮아짐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보다 복음의 확장을 우선했다. 그는 상대방의 문화와 형편에 자신을 맞췄다. 이는 타협이 아니다. 이는 사랑의 지혜이다. 복음의 본질은 결코 바꾸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상대방에게 맞췄다.
우리에게도 이런 낮아짐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전도 대상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자존심보다 소중하다.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기꺼이 낮아져야 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고 말한다.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낮아질 때, 복음이 높아진다.
22절은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이 된 목적을 말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바울의 같아짐은 영혼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상대방과 같아지려고 노력했다. 이는 자기 정체성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는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바울은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줬다. 유대인 회당에서는 율법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방인 사회에서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며 복음을 전했다. 약한 자들 앞에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함께 느끼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경계를 넘는 사랑을 실천했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는 표현이 감동적이다. 바울은 많은 숫자를 기대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했다. 이것이 진정한 목자의 심정이다. 99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의 마음이다. 한 영혼이 그만큼 소중하다.
우리도 이런 유연함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방식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세대 간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들의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나이 든 세대에게는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며 다가가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전달 방식은 바꿔야 한다. 우리의 고집이 아닌 그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가 변화할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24-27절은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이유를 말한다.
바울은 운동 경기의 비유를 든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고린도 사람들은 2년마다 열리는 운동 경기를 잘 알았다. 선수들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철저히 훈련하는지 보아왔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 선수들은 모든 일에 절제했다. 먹는 것도 조절했다. 잠도 줄였다. 훈련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썩을 승리자의 관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이다. 영원한 면류관이다.
바울은 자신을 엄격히 훈련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그의 달음질은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의 싸움은 실제적인 훈련이었다. 그는 허공을 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웠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조차 자기 절제를 강조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실격자가 될까 두려워했다. 이는 복음 전도자의 일관성을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우리의 삶이 일치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제가 필요하다. 영적 훈련 없이 열매는 없다. 기도 없이, 말씀 묵상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성숙은 불가능하다. 새벽에 나온 우리의 모습이 이미 절제의 시작이다. 따뜻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님 앞에 나온 것, 이것이 절제이다. 이 절제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썩을 것이 아닌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달려간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낮아졌다. 그는 자유로운 사도였지만 스스로 종이 되었다. 바울은 영혼을 위해 같아졌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이 되어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했다. 바울은 면류관을 위해 절제했다. 그는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며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 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라간다. 우리의 낮아짐이 전도의 시작이다. 우리가 낮아질 때 복음이 높아진다. 우리의 같아짐이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가 이웃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절제함이 승리의 비결이다. 우리가 자신을 훈련할 때 영적 열매가 맺어진다.
복음을 위해 낮아지고, 이웃을 위해 같아지고, 주님을 위해 절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