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9. 예수 그리스도-1

주일오후예배(인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누가복음 4장 16~21절(신약 93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9. 예수 그리스도-1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독교인일까요?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소리나는 데로 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슨 뜻입니까? 본래 이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원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종교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믿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옆사람을 처다보 진지하게 이야기 하십시오. ‘나 돈 좀 빌려줘.’ 그 말에 ‘그래, 얼마나?’라는 답을 들었다면 신용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진짜로 돈을 빌리시면 안 됩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십시오.’ 이처럼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앎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했는데요.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보다 앞선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저희 가정에 관한 좀 비밀 얘기를 한가지 하겠습니다. 저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아시죠. 이름은 ‘율’입니다. 성까지 붙여야 이름이 완성됩니다. ‘전 율’ 어째든 제 아들은 집에 있을 때랑 밖에 나와서와 다르게 행동합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교회에서 저희 아드님께서는 저를 보고도 시큰퉁합니다. 반겨줄 생각이 없고 때로는 잘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어떻게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두 손을 덜덜 떠는 것은 격한 환영이라고 합니다. 집에서 저희 아드님은 저를 보자마자 두 손을 떨며 크게 소리내어 웃습니다. 아마 교회에서는 거의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아십니까? 저는 압니다. 제가 교회에서와 집에서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중인격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교회에서는 사럼처럼 품격을 갖추고 옷을 정갈하게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옷을 그렇게 갖춰 입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할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제가 거의 헐벗고 있습니다. 상상하지는 마십시오. 또 제가 집에서 그러고 있으니 혹시 저희집에 오실 때는 미리 방문 일정을 잡아주셔야 험한 꼴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차이가 집에선 환영받지만, 교회에서는 시쿤둥한 반응을 낳았다고 봅니다. 제가 말하려는 의도를 기억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제가 집이랑 교회에서랑 다르게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아는 것 또는 자식이 부모를 아는 것은 보여지는 것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저 지금껏 보아왔던 것 들었던 것으로 예수님을 쉽게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고 손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알았다고 지금의 우리보다 더 잘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오늘 성경이야기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주일 곧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합니다. 그러나 약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거니시던 때에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정확하게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안식교라는 기독교 이단 종파에서는 안식일이 토요일이니 토요일날 예배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일견은 맞지만,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바로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요. 안식일이 되면 보통 이렇게 합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특별한 저녁식사를 합니다. 평소보다 격식을 차려서 아버지는 가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성경 읽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약간 우리가 명절에 가정예배를 드리는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집안의 어른이 예배를 인도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안식일인 토요일에는요. 오전에 사람들은 회당으로 모입니다. 오늘 우리처럼 예배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참고로 회당은 예배당이기도 하지만요.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회관이기도 했고요. 율법을 가치는 교회학교 또는 공부방이기도 합니다. 어째든 안식일 토요일 오전에 사람들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그리고 제가 청소년부 설교에서 같은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예배를 드릴 때는 남자석과 여자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고요. 그러나 아마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그러한 풍경이 마냥 낯설지 않은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고대 사회일수록 여러 차별이 심했는데, 그 중에서 성차별은 대표적입니다. 해서 회당의 중앙을 기준으로 앞쪽에는 남자들이 앉고요. 뒤쪽을 기준으로는 여자들이 앉습니다. 지금 2000년 전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예배는 대략 이렇게 진행됩니다. 먼저는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봉독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설교에 따른 성경 말씀을 한 두 개 택해서 읽지만요.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의 여러 부분을 전체적으로 통톡할 수 있도록 정해진 성경 본문을 읽었습니다. 가령, 율법서라고 해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성경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순서에 따라 읽고요. 그 다음엔 예언서라고 해서 이사야에서부터 말라기까지의 내용 중에 한 부분을 또 읽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성문서인 잠언부터 아가서까지의 내용 중에서 또 한 부분을 읽습니다. 이렇게 성경봉독이 끝나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설교하고 같이 기도하고 끝납니다. 제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이 부분이 신기했습니다. 약 2000년 전의 예배를 우리는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그 형태를 잘 지켜오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여느 때와 다름이 없던 안식일 토요일 오전 예배 시간입니다. 순서에 따라 성경 봉독을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그 순서를 맡아서 성경봉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형태의 성경은요. 사실 인쇄기술이 발달한 결과로 얻게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을 보았는데요. 사극 같은데 보면, 양쪽에 봉 같은 것을 끼워서 말아놓은 형태의 성경이었습니다. 당시는 종이도 귀했던 시절이라 양의 가죽을 얇게 펴서 만든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성경을 예수님은 받으셨고요. 예수님은 그 성경이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히 펼쳤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내용 중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인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나옵니다. 같이 읽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신약 93쪽)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오래 전 하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 곧 기름부음 받은 자, 전문용어로는 ‘메시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마도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서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 당시로부터 무려 5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시 그 회당에 모인 사람뿐만 아니라요.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위에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더 위에 현조 할머니 할아버지도까지도 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배 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달달 외우는 것처럼 하도 많이 읽고 들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말씀입니다. 그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마디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을 같이 읽습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신약 93쪽)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겁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메시아 곧 구원자 그가 바로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깁니다. 어떤 이는 눈이 커지고 어떤 이는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어떤 이는 입술을 깨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의 말에 불쾌한 반응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절대로하지 말아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기라는 것입니다. 가령,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아직 친하지 않다면 건강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를 권해선 안됩니다. 육식주의자에게 채소를 권해서도 안 되고요. 농담처럼 드린 이야기지만요. 어떤 문화에서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에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라면, 절대로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금기를 깬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금지하는 것을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러 대하거나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보통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을 이어서 그들의 가문에서 태어날 왕이고 자신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그런 위대한 자임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 속이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대체 저 사람이 방금 무슨 말은 한 것인가?’, ‘이 무슨 참담한 짓인가?’ 더욱이 ‘그렇게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다니’하는 생각으로 주변이 술렁입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실수한 것이라 아직 어려서 실수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잘 못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를 욕한 것과 유사할 정도로 패륜적이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주체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서 낭떨어지까지 끌고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자릴 벗어나 나오십니다. 그때 문득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결혼하여 가난한 살림을 힘겹게 꾸려왔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하고 출살할 때, 호적신고를 위해 고향으로 와야했는데 빈방이 없어서요. 당시 마굿간으로 사용하던 동굴에서 아이를 출산해야 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시죠. 그리고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던 무렵에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이후부터 요셉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를 죽이면, 마리아는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게 될텐데 그것이 참으로 불쌍하다고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분노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라고 했을 때 죽이려 했을까요. 사실 그가 진짜 메시아인지 아닌지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수하는 것이면 오히려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일을 행하는 것일텐데 말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한 곳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입니다. 당시 회당에 모였던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았던 사람들은 이것이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아기를 키워보니 알겠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지 않음을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 같아지려면 최소 1년에서 3년 이상 걸리지 않나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아기들은 혼자서 밥도 못 먹고 혼자서 화장실도 못갑니다. 심지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요. 최소 걷는 데까지 약 1년이 걸립니다. 또 대략 대소변을 스스로 하는 것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 아기를 키우면서 볼 것 못볼 것 다 보게 됩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 구실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았고요. 어떤 이들은 내가 ‘업어 키웠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가 메시아라고 얘기하니 기가 찬 것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옆 사람을 보시고 살짝 얘기해 주십시오. ‘사실 저 천재입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이 가십니까? 우리가 착해서 그냥 고개 끄덕여주고 아무런 대구를 안하는 것이지요. 진짜 속마음은 이럴 겁니다. ‘니가?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틀렸고요. 진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맞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옆사람을 보십시오. 서로에게 다시 말합니다. ‘저 진짜 천재에요.’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깁니까? 우리는 현재의 것으로 또는 과거의 경험으로 쉽게 미래를 판단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내 옆에 계신 분은 훌륭한 분일 겁니다. 앞으로 더 훌륭해질 예정이고요.
저는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앞서 얘기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예수를 모를 수 없다고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두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요. 언뜻 모순되는 말인것 같지만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사람을 깊이 사귀다보면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연인들은 헤어짐의 순간에 보다 분명해집니다. 내가 그동안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요. 왜 일까요? 내 고정관념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분명한 진실은 이러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것보다 예수님은 더 훌륭하신 분이고요. 더 크고 놀라우신 분입니다. ‘내가 교회를 오래 다녀봐서 아는데,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한이 없으시고 측량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로 그 예수님을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해서 알아가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