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7.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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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 1장 26~38절(신약 87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7. 마리아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성경인물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지난주 느헤미야를 끝으로 구약성경 인물이야기는 마칩니다. 이번 주부터 올해 남은 시간은요. 신약성경의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어느 날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당황합니다. 천사의 등장도 그랬지만 마리아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겁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을 전합니다. 전문용어로 ‘수태고지’라고 합니다.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12세 혹은 13세로 추정됩니다. 우리에게 다소 충격적일 수 있지만요. 당시 결혼 문화가 그러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임신하는 것보다도요. 마리아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34절).’ 전문용어로 ‘동정녀’입니다. 천사의 말은 당황스럽다 못해 난해하기까지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어떻게 연기가 날 수 있겠습니까?’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두는 것 아닙니까?’
다행히 천사는 친절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35절)’ 설명합니다. 게다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기적을 덧붙입니다. 불임이던 그녀 또한 임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37절).’
어떻습니까? 만약 이것이 내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떨까요? 혹은 내 딸에게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떨까요?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마리아의 나이가 12세 혹은 13세였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만 나이라 치더라도 현재 우리나라에선 중학생입니다. 중학교 여학생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는 천사에게 어떤 생각이드십니까? 저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 38절을 읽습니다.
누가복음 1:38(신약 87쪽)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믿고 받아들입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말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임신 소식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리아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이상한 사람입니까? 동정녀 중학생이 임신한다는 얘기가 이상한 얘기 아닙니까? 저는 이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마리아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너무 어려서 상황파악을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리아는 비이성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분명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임신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천사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몰지각이 아닙니다. 믿음이고 결단입니다. 자신이 겪게 될 위기와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자칫 그것은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어진 삶을 신실하게 살아냅니다.
수태고지 이후 그에 닥친 첫 번째 위기는 이러합니다. 파혼과 죽음의 가능성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마리아에게는 약혼자 요셉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는 것은 파혼과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율법이 정한 바로 간음죄는 사형입니다. 그것도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더군다나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요.
매우 큰 배신감이 들겠죠. 마리아를 부정한 여인이라 여기겠죠. 자연히 파혼을 생각할 것이고요. 율법에 따른 처벌이 마땅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에 그는 조용히 파혼하려 합니다. 차마 마리아가 죽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요.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게 하십니다. 마리아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요셉은 예정대로 결혼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는 것입니다.
일전에 가까운 목사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기도의 능력에 관한 자신의 경험담입니다. 그분이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는 부목사가 여럿이 있는 규모가 큰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기도 받으러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의 부목사님들이 앞에 나와서 안수하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부목사님들이 일렬로 서 있으면요. 교인들이 원하는 부목사님들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는 시간입니다. 당시에 그 목사님은 시켜서 하긴 하는데, 그 일이 마뜩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체 이러한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뜨겁게 열정적으로 기도를 인도하던 사람은 아니어서요. 교인들도 자기 앞으로는 줄을 별로 서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겠다는 열의에 가득찬 분이요. 다른 데는 줄이기니깐, 줄이 짧은 자신에게 나왔답니다.
목사님이 강사 목사님의 인도에 따라 안수기도를 하려고 손을 얻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뒤로 튕겨져 나가더니 이른바 성령체험을 한 것입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교인들이 자기 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이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나는 오히려 그 일에 관해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약간은 부정적인 입장이었음에도 이렇게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능력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고요.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어쩌면 기도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진 분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신 것 같다고 했어요. 다시 말하면, 내가 어떤 태도를 지니냐에 따라서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우리의 경험에 갇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당연히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틀린 판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동정녀가 어떻게 임신을 하냐는 등의 논쟁은요. 신앙 안에서는 불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왜 우리의 상식으로 우리의 수준에서 감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판단하려는 것입니까? 저는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내 계획과 뜻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들에 관해 하나님은 능히 들어주실 수 있지만요.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와 능력에 따라 뜻을 이루십니다. 내 바람을 하나님께 강요할 수 없고 그것은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고 따르는 것이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상식적이지 않다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반응하는 것은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믿음의 본을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난 후에 그의 행적은 이러합니다. 마리아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목도 하면서 함께 찬양합니다.
해산할 무렵에 마리아는 빈방이 없어서 마굿간에서 아이를 출산합니다. 그 무렵에 온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 왕의 탄생 소식을 전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은 그 일로 예언된 메시아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무렵에 태어난 아기들을 학살합니다. 마리아는 급히 이집트로 몸을 숨깁니다.
이렇게 마리아에게는 생존의 문제 말고도 경제적 문제까지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아이를 낳으면 정결예식을 치룹니다. 이는 율법에 따라 출산한 여인은 부정하게 되어서 약 40일이 경과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결을 위한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제물은 경제적 형편에 따라 달라집니다. 부유한 이들은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지만, 가난한 이들은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립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 때 드린 제물은 산비둘기입니다. 그들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마리아는 자식의 죽음 보아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당하는 아들의 모습을 마리아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에도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남겨진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 또한 그 약속을 믿으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고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마리아도 성령을 받았을 겁니다.
그 이후 마리아의 행적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는 사도 요한과 함께 에베소로 떠났다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이렇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한 이후로 그가 출세했다거나 삶이 더 안락하고 편안해졌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에 성공과 번영을 약속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존재는 매우 특별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예수 그리스도는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가장 낮추어보는 궁녀도 임금의 아이를 갖게 되면 신분이 달라집니다. 그 아이가 차기 대권주자가 되기 때문에 낮은 궁녀의 신분에서 높은 후궁의 신분으로 격상이 됩니다. 마리아의 뱃속에는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리아의 형편이 좋아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생스럽고 버겁기만 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 헤롯은 두려움에 어린 아기들을 몰살하려 합니다. 그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은 타향살이에서는 더 고단했을 겁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자녀를 장성하게 키워냈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비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말 가련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일생을 살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 본래 그런 것이겠다고요. 쉽게 말해 예수 믿는다고 우리의 살림살이가 좋아지거나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 아닙니다. 그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바람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의 목적을 따라 우리의 이익에 놓고 행하는 일들은 거래라고 합니다. 믿음은 그와 다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면,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 할테니 하나님도 내게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거래가 아닙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수단이 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리는 악한 신도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당대 마리아가 굉장한 유명인이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는 심지어 나사렛 출신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 1:46)’ 이는 나사렛은 소망 없는 곳임을 말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깡촌입니다. 세상에서 낙후되고 별로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찾아오셨습니다. 게다가 그에게 아주 특별한 일을 부탁합니다. 이런 느낌입니다. ‘이거 내가 가장 아끼는 건데, 너가 맡아줘. 혹은 이거 내 전 재산인데 맡아줘’. 대체 내가 뭐라고 이런 엄청난 일을 맡기는 것입니까? 달리 말해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익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놓일 때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성공과 출세가 신앙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실패한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에도 고난이 있고 위기가 찾아옵니다. 달리 말하자면, 문제없는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달라집니다.
제가 최근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한국 최초의 교회사에 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간략하게만 몇 가지를 그림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이승훈 현감의 초상화입니다. 이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입니다. 조금 구분을 하자면, 천주교인인데요. 1784년에 조선인 최초로 세례, 천주교식으로는 영세를 받은 분입니다. 평택 현감을 지낸 분이었고 예수를 믿고 남은 삶을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칼 귀츨라프 선교사입니다. 이분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온 선교사입니다. 1832년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배를 타고 무역거래를 위한 통역가로 조선에 왔고요. 몰래 충남 보령의 고대도라는 섬에서 복음을 전했던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무역거래가 거부되어서 약 20일을 머물렀는데, 이분을 통해서 조선에 처음으로 감자가 전했다고 하고요. 최초로 한글로 주기도문이 번역되었습니다.
세 번째 그림은요. 한국인은 서상륜 장로님이고요. 외국인은 존 로스 선교사입니다. 서상륜은 1883년에 존 로스 선교사를 도와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했습니다. 1884년에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그 외에도 백홍준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였으며 최초의 조사 곧 전도사였습니다.
이렇게 제가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의 역사적 인물을 살피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점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분들은요. 결코, 평탄한 환경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분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고요. 심지어 고난이 있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순교에 자리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일까요?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가 말했습니다. ‘은혜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28절)’ 앞서 마리아의 인생을 소개해드렸는데, 그의 삶이 정말 은혜와 평강의 삶으로 여겨지시던가요? 어쩌면, 세상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불행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일 수 있습니다. 여러 조건이 마리아를 위태롭고 힘겹게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추구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에 따라 마리아의 삶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덧붙여 말합니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달리 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와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은혜와 평안을 누리는 삶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바라건대, 저는 오늘 우리가 주와 동행함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성공의 척도를 논하지 말고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온전케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음을 모아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