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 ?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누가복음 4장 16~21절(신약 93쪽)
설교제목: 예수님 = ?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반갑습니다.
오늘은 곽희명 목사님께서 오전 9시, 11시 예배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제가 오늘 청소년부 예배를 인도하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이 잘 지내셨나요? 보통 우리가 1년에 한번 예배를 통해 보는 사이이지요. 이번에는 지난 번 곽희명 목사님이 전도사님 시절에 여름 휴가를 갔다 온 이후에 보니까요. 약 3개월 만에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이에 볼륨매직을 한번 했습니다.
평소보다 만나는 텀이 짧지만, 그래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능하면 좋은 설교를 하려고 고민합니다. 제가 그 고민의 결과로 오늘 나누려는 이야기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곳에는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모여 있는 것으로 압니다. 교회를 다닌 시간은 차이가 나지만요.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라는 말이 예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호칭입니다. 본래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 바로 기독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은 마치 아빠 엄마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개념이 없다 또는 뭣이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본적도 없지만요.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또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에 관해 얘기를 하려 합니다.
현재 우리는 주일 곧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합니다. 오래 전 그러니깐 약 2000년 전에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모여 예배했습니다. 안식일은 정확히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서 토요일 저녁까지 이어집니다.
보통 안식일이 시작되면, 금요일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특별한 저녁식사를 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가 가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찬송하는 등의 예식이 이뤄집니다. 마치 저녁식사를 하며 가정예배가 이뤄진다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 오전에 사람들은 회당으로 모입니다. 회당은 쉽게 말하면 이곳과 같은 예배당을 말합니다. 그러나 꼭 예배하는 장소외에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마을 회관 역할도 했고 아이들의 공부방 역할도 했습니다. 어째든 이 회당에 모여 함께 예배합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시 회당은 남자석과 여자석이 따로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남자석은 중앙을 기준으로 앞쪽에 있었고 여자석은 중앙을 기준으로 뒷쪽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여가 구분되어 자리에 앉습니다.
대략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배가 진행됩니다. 먼저는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봉독을 합니다. 율법서인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중 한 부분을 읽습니다. 끝으로 예언서인 이사야에서부터 말라기까지의 내용중 한 부분 또는 성문서인 잠언부터 아가서까지의 내용중 한 부분을 읽습니다. 이렇게 성경봉독이 끝나면 설교나 기도를 하고 마칩니다. 어떻게 보면, 2000년 전과 지금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안식일 토요일 오전 예배 시간입니다. 성경을 봉독하는 순서에 예수님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받아들었습니다. 양쪽이 말려 있는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성경을 예수님은 조심히 펼쳤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내용중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의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성경본문인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나옵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신약 93쪽)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오래 전 하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 곧 기름부음 받은 자, 전문용어로는 ‘메시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마도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서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무려 5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요.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위에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더 위에 현조 할머니 할아버지도까지도 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달달 외우는 것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마디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을 같이 읽습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신약 93쪽)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메시아 곧 구원자 그가 바로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눈이 커졌을 것이고요. 또 어떤 사람은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인상이 구겨졌을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는 참담하는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절대로하지 말아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기라는 것입니다. 가령, 헤리포터 1편을 보면, ‘볼드모트’라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를 권해서는 안 되고요. 육식주의자에게 채소를 권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농담삼아서 나열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나 말이 어떤 문화에서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금기를 깬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금지하는 것을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러 대하거나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보통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을 이어서 그들의 가문에서 태어날 왕이고 자신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그런 위대한 자임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MBTI로 보면 예수님은 외향적 성향의 E이 그중에서 극 E에 속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사람들 앞에서 엄청나게 자존감이 높은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설령 젊은 혈기에 따른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를 욕한 것과 유사할 정도로 패륜적이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똑같은 단어가 떠올랐을지 모릅니다. ‘감히’
사람들의 분노는 주체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서 낭떨어지까지 끌고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서 이런 말씀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받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더 들끓었을지 모르지만요. 어쩌면, 사람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결혼하여 가난한 살림을 힘겹게 꾸려왔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하고 출살할 때, 호적신고를 위해 고향으로 와야했는데 빈방이 없어서요. 당시 마굿간으로 사용하던 동굴에서 아이를 출산해야 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시죠. 그리고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던 무렵에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이후부터 요셉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회당에서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한 예수님을 끌고 절벽을 향해 가다가 그가 사람들을 뿌리치고 나오자 퍼특 정신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를 죽이면, 마리아는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게 될텐데 그것이 참으로 불쌍하다고요. 그리고 혹시 예수님의 말처럼 그가 정말 ‘선지자라면 그들의 행동 또한 큰 실수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선지자를 죽이는 일도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분노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라고 했을때 죽이려 했을까요. 사실 그가 진짜 메시아인지 아닌지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수하는 것이면 오히려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일을 행하는 것일텐데 말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한 곳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아기를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를 수 있는데요.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최소한 1년 아니 한 3년 이상은 걸리지 않나 합니다. 아기들은 혼자서 밥도 못 먹고 혼자서 화장실도 못갑니다. 심지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요. 걷는데까지도 약 1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분명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부모의 도움을 통해서 먹고 싸고 자라는 일을 배워갑니다.
그래서 부모의 눈에는 자식은 항상 부족해 보이고 아직은 더 자라야 한다고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고향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 구실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의 과거를 아는 분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업어 키웠다’라고요. 그러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보았던 동네 사람들로써는 그가 결코 메시아와 같은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옆 친구를 보세요. 서로에게 말해봅시다. ‘나 사실 슈퍼히어로야’ 어떻습니까? 믿음이 가십니까? 물론 ‘슈퍼히어로’라는 말이 촌스러워서 믿음이 더 안 갈수 있는데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마음이 더 클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그러니 헛소리 마라.’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냥 장난으로 치부될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은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틀렸고요. 진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맞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옆사람을 보십시오. 서로에게 다시 말합니다. ‘나 진짜 슈퍼히어로야’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깁니까? 우리는 현재의 것으로 쉽게 미래를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생각과 우리의 눈은 고정관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릅니다. 내 옆 친구가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될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앞서 얘기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예수를 모를 수 없다고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두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요. 언뜻 모순되는 말인것 같지만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사람을 깊이 사귀다보면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연인들은 헤어짐의 순간에 보다 분명해집니다. 내가 그동안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요. 왜 일까요? 내 고정관념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분명한 진실은 이러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것보다 예수님은 더 훌륭하신 분이고요. 더 크고 놀라우신 분입니다. ‘내가 교회를 오래 다녀봐서 아는데,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한이 없으시고 측량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로 그 예수님을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해서 알아가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