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18. 세례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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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 11장 7~15절(신약 16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18. 세례 요한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요? 각자가 나름 생각하시는 좋은 삶의 기준이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의 좋은 삶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가 소개할 성경의 인물은요. 예수님께서 그의 삶이 높이 평가한 인물입니다. 오늘은 이 인물을 통하여 신앙 안에서 좋은 삶에 관하여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도)
팔레스타인 땅에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를 거쳐 남쪽 사해로 흐르는 강입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성경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낙타 털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고 가죽으로 된 허리띠를 매었다(마 3:4)’라고 말입니다. 그는 오랜 기간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를 놓고 그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해봅니다.
그는 나실인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광야에서 생활해서 그의 피부는 햇살에 오랫동안 그을려 거무스름합니다. 하지만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였기에 그의 눈은 더 없이 맑고 깊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살았던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같다고요. 또한 그에 관한 묘한 말들이 드문드문 새어나옵니다. 그가 오랫동안 광야에서 ‘메뚜기와 꿀만 먹고 지냈다’라고요(마 3:4).
이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요. ‘김치에 밥만 먹는 것’처럼 소박한 식사를 말합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일어난 10가지 재앙중에 메뚜기 재앙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메뚜기는 심판을 꿀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에 모습을 드러나 그는 입을 열어 외칩니다.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마 3:2).’ 또한 그는 오래 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주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주께서 오실 길을 곧게 해야합니다(마 3:3).’
진지한 그의 음성이 사람들의 귓가로 파고듭니다. 자석에 쇠붙이가 이끌리듯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듭니다. 그에게 몰려온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찹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선 것처럼, 내 검은 속내가 들춰지는 것 같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죄를 고백합니다. 그는 죄를 고백한 사람을 요단강으로 데려와 세례를 베풉니다. 한 사람씩 강물에다가 머리까지 푹 담궜다가 다니 꺼내는 방식으로 행합니다.
물은 정화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생을 위해서 물로 씻기도 하지만, 죄악을 씻어내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강물에 머리까지 물이 잠기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뜻이며, 강물에서 다시 꺼내는 것은 그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릅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은 이러합니다.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였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 둘 사이에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전문용어로 ‘불임’입니다.
어느 날 사가랴는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눅 1:13, 16).’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노년에 이른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사가랴는 이 놀라운 소식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한동안 입밖으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비로소 사가랴의 말문이 터지며, 그 아들의 이름을 주의 뜻대로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구별된 사람 곧 나실인으로 자라났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했으며, 빈 들 곧 광야에서 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과 광야에서의 생활에 관해 성경은 자세히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시절을 통해 요한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공간입니다. 일찍이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먹을거리부터 나아갈 방향까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옷이 낡지 않게, 신이 헤어지지 않게 해주셨으며(신 29:5),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출 13:21) 지키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광야는 분명 생활하기 불편하고 힘든 공간임에는 틀림 없지만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과 더욱더 깊어지는 시간을 줍니다.
이로써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와 같은 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갑갑하고 깜깜해서 어떻게 헤어나와야할지 막막한 순간들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고 인생이 이대로 끝난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사람들에게도 광야의 시간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성령의 인도함으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에 광야는 마냥 괴롭고 슬프기만 한 곳이 아니라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되고요. 하나님을 더욱더 믿고 의지하는 복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 삶이 광야에 들어선 것 같다면요.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봄으로 우리는 소망을 얻고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에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했습니다. 요단강에 나타나 세례를 행하는 요한에게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요한은 답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곧 구원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나는 주님의 신발끈을 푸는 일조차도 감당하기에 부족한 자입니다(요 1:19, 23, 27).’
어느 날 아마도 세례 요한의 일생에서 가장 눈부신 날이었을 겁니다. 예수께서 그에 세례를 받고자 나아오십니다. 세례 요한은 그분이 바로 사람들이 기다려온 구원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 세례를 행하는 일을 주저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가 어울리지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행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는 달리 보자면,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온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분에 관하여 이야기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대변하는 것처럼요. 누군가의 대변인은 사실 그에 걸맞은 실력을 요구받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대변자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요.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일입니다. 저는 이것이 세례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행하면서 느꼈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을 신발끈을 푸는 아주 작은 일조차도 예수께 행할 수 없는 존재라 했던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역에 세례 통해 보탬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야기를 자손대대로 전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에게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는 대단할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존재의 격이 다른 신과 인간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선 우리는 먼지와도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요.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셔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비하면 먼지와도 다른 바 없는 우리가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이룬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고 호사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일인지를 생각합니다.
이러한 특권이 과연 우리 말고 또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이 세상에 참으로 많은 동식물을 포함한 생명체가 있지만요. 우리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크신 사랑이라 여깁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진짜로 안다면요. 오늘 우리의 모습과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를 생각해 봅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세례 요한이 이 말을 할 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당시 예수께서는 세상에 주목받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현실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리하여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대체 왜 스승님께 세례받은 예수’라는 인물을 사람들이 주목하고 따르는지에 관한 볼멘소리를 합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결혼하는 것을 그는 비판했습니다. 헤로디아는 본래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은요.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남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고요. 율법에서 금한 간음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을 당시 세례 요한은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가 하는 얘기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면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회심시킬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왕의 문제를 제기한 그를 감옥에 가둔 것이지요.
그는 당시 왕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었고요. 그 때문에 감옥에 갈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그와 같이 존경받을 만한 인물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이 분통이 터졌을 겁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고 자신이 비천해지는 것에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후에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 죽게 됩니다. 헤로디아 자신의 딸 살로매를 이용해서 세례 요한을 죽게 했습니다. 헤롯 왕의 생일에 딸인 살로매는 춤으로 아버지 헤롯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헤롯 왕은 딸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 합니다. 그러자 살로매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 합니다. 헤롯 왕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약속이라 왕의 체면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세례 요한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어떠신가요? 제가 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거의 다 들려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례 요한의 인생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요약하면, 그는 오랜 기간 아이가 없었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기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고요. 그 과정에서 감옥에 갇히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에게 이와 같은 삶은 불행하다고 여겨질지 모릅니다. 더욱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지만,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 결과가 불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을 같이 읽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신약 16쪽)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도 세례 요한만큼 위대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들었던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세례 요한의 삶의 결과가 목이 잘려 죽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10절을 같이 읽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0절(신약 16쪽)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세례 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른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요. 세상에서 성공과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 있습니다.
그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세례 요한의 삶은 불행하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주어진 수명도 다 누리지 못하고 권력의 압제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그는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세례 요한의 삶을 좋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세상 어떤 이의 삶보다 위대했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을 다시 읽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신약 16쪽)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세례 요한의 삶은 위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천국에서는 그도 작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천국은 이 세상과는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니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할지라도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실력과 능력으로 천국에 임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높이 평가한 세례 요한일지라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끝으로 제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합니다. 저는 근래에 제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여러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사람의 인생에 관해 생각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고 특별히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합니다.
과거의 저를 돌아보니 저는 그저 닥치는 삶을 근근히 마주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남들이 대학가니까 대학가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시작된 신학 공부가 목회로까지 이어집니다. 목회자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는 부족하나마 주어진 사역을 최선을 다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제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어서, 때로는 좋지 않은 결과도 맛보고 때로는 낙담하게 되는 순간들도 지나갑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면, 내 마음속에 ‘내가 이것도 못하면서 어떻게, 또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나 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렇게 그냥저냥 닥치는 일을 주어진 상황에서 처리하게 바쁜 나날들을 보내면서 계속적인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목회를 제대로 하고 있나? 혹은 나는 정말 이것을 원하고 있나 등등이요.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기분이 좋을 때는 사라졌다가 조금 울적하거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 때는 다시 생겨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떠밀리듯 살다가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를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잘 살왔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후회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음을 다잡으면서 세운 삶의 방향이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고요. 그리고 마지막 하는 꾸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 삶 있어서 참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제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알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운동을 하며 저의 몸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요. 글을 쓰면서 저의 마음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요. 기도하면서 저의 온 존재를 돌아볼게 될거라 믿어요.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 삶의 보람있게 살아가는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그를 높이 평가하셨던 것 혹은 그의 삶이 위대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했던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불행하다고 불쌍하다고 여겨졌을지 모를 삶일 수도 있는데요.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태어나서 자라는 매 순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분명히 발견하며 그것을 위해 온 몸을 다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의 삶이 이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로 인해서 내 삶의 의미를 일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마지막이 후회가 남지 않고 삶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의 뜻을 이루는 귀하고 복된 살이 되게 해달라고요.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