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 하나님을 믿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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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편 131:1-3(구약 900쪽)
설교제목 : 회복탄력성, 하나님을 믿는 삶.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미국의 와싱톤사귐의 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영봉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회복탄력성’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회복탄력성은 영어 ‘resilience(리즐리언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쉽게 꺽이지 않고 힘을 내어 회복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고무줄이나 용수철을 길게 늘렸다가 놓으면, 다시 원래의 크기와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 또 오뚜기 인형처럼 넘어뜨려도 다시 중심을 잡고 서는 것을 말합니다.
보다 간단히 말하면 ‘위기를 만났을 때, 회복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회복탄력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중에 ‘루시 혼’‘이라는 호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을 일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본래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회복탄력성을 연구하였습니다. 미국 군인 100명을 대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회복탄력성에 관한 나름 일가견 있는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루시 혼의 가족을 포함한 세 가족이 여행을 갑니다. 당시 12살이던 딸은 단짝 친구와 함께 차를 타기 위해 다른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진하던 차로 인해 사고가 납니다. 자신의 딸이 타고 있던 차와 충돌하여 그 차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이 죽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딸의 죽음에 루시 혼은 큰 슬픔에 잠깁니다. 그 동안 학교에서 학위를 따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가 연구했던 이론은 그의 슬픔에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과거 연구를 통해 예측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헤메이다가 루시 혼은 다시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가 아니라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스스로를 위한 연구를 진지하게 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역경을 해치고 회복한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이와 같은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을 한 강연에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고난을 인생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고난의 상황 속에 빠져 있지 않고 그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일전에 담임목사님도 설교 때 얘기하신 것인데요.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 'why me'라고 생각하지 말고 ‘왜, 나는 아니겠냐’ ‘why not me'라고 생각하라는 것이죠.
그때에 우리는 고난의 피해자로 머무르지 않게 되고요. 고난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거죠. 언젠가 암에 관해서 전문가가 유퀴즈에 나와서 얘기해요. 사실 암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건 환자의 마음상태라는 거에요.
환자가 절망하고 미리 포기해버리면 치료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반대로 환자가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면 때로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고난에 있어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고난을 극복하느냐 혹은 마느냐에 있어서 중요한 갈림길이 되는 것이죠.
둘째, 변화 가능한 것과 받아들여할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고난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행하는 것인데요.
이런 거죠. 앞서 루시 혼의 경우처럼요. 딸을 사고로 잃었을 때, 딸을 되살릴 수는 없지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거나 전문가를 만나 상담하는 일은 할 수 있죠.
이렇게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내가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고요. 고통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고통에 빠져서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오기가 어려워지고 허망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죠.
담임목사님이 은빛세대 어른들을 심방하면서 자주 하는 얘기가 있어요. ’지금이 가장 젊을 때‘라는 것 말이죠. 이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괴롭고 힘든 것에 집중하지 말고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내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오늘이 최고임을 기억하고 산다면,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최고의 날을 살아갈 수 있지만, 반대가 되면 우리의 삶을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마지막 셋째, 내게 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이니 큰 슬픔을 만나고 그것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만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가령, 내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식의 생각이나 행동이 내 고통을 해소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복수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루시 혼이 사고로 딸을 잃고서요. 이렇게 했습니다. 딸을 죽음으로 몰고간 운전자를 고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딸을 죽인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루시 혼은 매우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그를 고소해서 내가 얻을 이익이 무엇일지를 말입니다.
딸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지만,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금을 얻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송을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게 할 수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옳다거나 이렇게 해야만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고통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아야 비로소 고통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삶의 문제 혹은 고통으로부터 이겨내는 회복탄력성입니다. 이는 일찍히 성경을 통해 반복해서 나타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이 고통을 마주할 때, 그 고통에 잠식당하기 보다는 그 고통을 벗어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시편의 시인들에게서 그와 같은 모습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원수의 공격으로 몸과 마음을 너덜너덜 해고 삶이 갈기갈기 찢기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회복과 고백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을 통해 잘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1편 1~3절을 같이 읽습니다.
시편 131:1-3(구약 900쪽)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고요함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인생 속에서 우리는 삶의 풍파를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에야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풍랑이 일렁이는 것과 같이 파도가 우리의 덮쳐올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그 위기를 넘어서게 됩니다. 그로부터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무조건 해결된다거나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죽은 딸이 살아 돌아오지 않고 사고로 잃은 육체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우리의 삶에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회복탄력성을 가진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